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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황학주는 1954년 광주에서 태어나 1987년 시집 <사람>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 시인 황학주 시인 황학주는 1954년 광주에서 태어나 1987년 시집 <사람>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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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겨울을 춥게 배우지 못하고
겨울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했지만

누가 있다 방금 자리를 뜨자마자
누가 있다 깍지 속에서 풀려나와 눈보라 들판 속으로 들어가는

사랑이란
매번 고드름이 달리려는 순간이나 녹으려던 순간을 훔치려던 마음이었다
또한 당신은 눈부처와 마주 보고 달려 있었다

이제 들음들음 나도 갈 테고
언젠가 빈집에선
일생 녹은 자국이 남긴 빛들만
열리고 닫힐 것이다

그때에도 겨울은 더 있어서
누가 또 팽팽하게 매달려 올 것이다.
자유를 춥게 배우며
그 몸 얼음 난간이 되어
-16~17쪽,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모두

이 시에서 "들음들음"이란 낱말이 가슴에 확 다가온다. "들음들음"이란 가끔 조금씩 듣는다는 뜻이다. 이 시집 제목이 된 <사랑할 때와 죽을 때>도 "들음들음"하는 시들이 차분한 목소리를 낸다. 그래. 사랑하는 것과 죽는다는 것도 어쩌면 "들음들음"하면서 맞이하는 것 아니겠는가. 시인 황학주가 쓰는 시, 그 알맹이가 여기에 숨겨져 있다.  

시인 황학주는 벚꽃처럼 화르르 피어났다 화르르 지는 그런 시를 쓰지 않는다. 그가 쓰는 시는 지금 이 자리에서 못 박건데 "들음들음시"다. 그는 시를 처음 끌어안을 때도 "들음들음"했다. 시인이라고 하면 흔히 등단절차를 밟는 것을 무슨 금뺏지나 다는 것처럼 뽐내지만 그는 그런 등단제도를 아는 척 모르는 척 은근슬쩍 넘어갔다.

그는 언론사 신춘문예라거나 문예지 신인상 등 그 어떤 추천도 거치지 않고 1987년 시집 <사람>을 들고 나와 그 잘난(?) 문단에 충격을 주었다. 그는 그때부터 그만이 주무를 수 있는 독특한 시어와 다른 시인들이 미처 꿈꿀 수 없는 빗댐으로, 바닥만 슬슬 기는 우리 시를 새로운 산마루에 우뚝 세웠다.

그 시인 황학주가 지난 3월 끝자락 열 번째 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창비)를 펴냈다. 지난 2012년 2월에 펴낸 아홉 번째 시집 <某月某日(모월모일)의 별자리>(지혜) 뒤 2년 만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매 순간 좀체 밝아지지 않는 그런 희망"과 "매 순간 좀체 어두워지지 않는 그런 희망"(비 오는 날, 희망을 탓했다)을 탓하고 있다.

이 시집은 모두 3부에 "아직 한 번도 못 본 / 한 사람을 위해 유랑하고 있는 / 시"(백야) 50편이 안개를 헤집는 실루엣으로 흔들리고 있다. '얼어붙은 시', '무덤으로 쓰다', '바람의 분침', '계단 높은 방', '입술', '아란, 흰 그림자 지는 절벽', '짝', '살구 떨어뜨린 살구나무처럼', '낙과의 꼭지', '어느날 입에 봉지를 대고 울었다', '막차는 떠나고', '족발 먹는 외로운 저녁', '어떤 배웅'이 그 시편들.

시인 황학주가 펴낸 이번 시집은 지금까지 펴낸 시집과는 다르게 겨울이란 이미지가 자주 나온다. 겨울은 시인이 바라보는 죽음에 대한 오랜 사색과 깊이 닿아있다. 사랑 또한 예전 시에서 보이는 생명성이나 관능성, 순수함보다 비장함, 종말 또는 완결 등으로 나아가고 있는 게 특징이다. 이 시집을 펼치면 저만치 하염없이 눈밭을 걸어가고 있는 시인이 보인다. 

시인 황학주는 '시인의 말'에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을 것이고, 몹시 쓰고 싶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이라고 귀띔한다. 그는 "얼마나 왔으며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라며 "아무 그림도 그려지지 않는데, 눈밭을 걷는 당신들이 보인다"고 적었다. "땅거미와 시간을 보내는 / 혼자만의 땅거미 무늬가 내게 있"(만년)는 것처럼 말이다.

거울보다 더 맑은 색이 아닌 색에서 작은 기쁨 느끼다

시인 황학주 열 번째 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사랑과 죽음이 엇갈리지 않고 언제나 빛나는 눈빛을 툭툭 주고받으며 더불어 살고 있다.
▲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시인 황학주 열 번째 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사랑과 죽음이 엇갈리지 않고 언제나 빛나는 눈빛을 툭툭 주고받으며 더불어 살고 있다.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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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람의 젖어가는 눈동자를
한사람이 어떻게 떠올리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를 잊지 말자
파탄이 몸을 준다면 받을 수 있겠니

숨 가쁘게 사랑한 적은 있으나
사랑의 시는 써본 적 없고
사랑에 쫓겨 진눈깨비를 열고
얼음 결정 속으로 뛰어내린 적 없으니
날마다 알뿌리처럼 둥글게 부푸는 사랑을 위해
지옥에 끌려간 적은 더욱 없지

예쁘기만 한 청첩이여
목이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좀 아프면 어때
아픔은 피투성이 우리가 두려울 텐데

순간마다 색스러워질 수 있는 것
그 모든 색 너머 투명한 얼음이 색색으로 빛나는,
색이 묻어나지 않는 색의
기쁨인 그것들

우리는 대못 자국 같은 눈빛이
맑디맑게 갠 다음 무엇을 보는지
여간해선 짐작 못한다
-8~9쪽, '얼어붙은 시' 모두

이 시집에 실린 첫 시가 '얼어붙은 시'다. "목이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좀 아프면 어때"라는 시구가 가슴 밑바닥 캄캄한 곳에 숨겨두었던 눈물샘을 툭툭 건드린다. 그래. 사람들은 "한사람의 젖어가는 눈동자를 / 한사람이 어떻게 떠올리는지 모르지만 /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는다. "파탄이 몸을 준다면 받을 수"도 없는 이들이 '사랑한다'고 자꾸 속삭이는 것처럼.

그들은 "숨 가쁘게 사랑한 적은 있으나 / 사랑의 시는 써본 적 없"는 이들이다. "사랑에 쫓겨 진눈깨비를 열고 / 얼음 결정 속으로 뛰어내린 적"도 없다. "순간마다 색스러워질 수 있는 것 / 그 모든 색 너머 투명한 얼음이 색색으로 빛나는, / 색이 묻어나지 않는 색의 / 기쁨"은 더더욱 알 수 없다.

시인 황학주는 "대못 자국 같은 눈빛이 / 맑디맑게 갠 다음 무엇을 보는지"를 알고 있다. 그가 '얼어붙은 시'를 쓰는 까닭도 그 '얼어붙은 시' 안에 모든 색을 뛰어넘은 색, 거울보다 더 맑은 색이 아닌 색이 빛난다. 그 있고도 없고, 없고도 있는 그 색을 바라보며 작은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시인이 황학주다.

그는 '들음들음시', 이 세상 모든 풍경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여 스스럼없이 읽을 줄 아는 탁월한 시인이다. "생(生)이라는 이름으로 싸이렌 울리며 출동한 업이여 / 누군가의 마음에서 피 지우는 데 몇십년…… / 남아서 오지 않는 말이 식는 데는?"(무덤으로 쓰다) 등, 그가 쓰는 풍경에 들어가 보거라. 내가 풍경이 되고, 풍경이 곧 네가 되는 그 순간이 곧  "사랑할 때와 죽을 때"다.  

'풍경'을 가장 평등하게 저울질할 줄 아는 시인

조용한 동네 목욕탕 같은
하늘 귀퉁이로
목발에 몸을 기댄 저녁이 온다

만년은 갸륵한 곳
눈꺼풀 처진 등빛, 깨져간다
눈꺼풀이 맞닿을 때만 보이는 분별도 있다

저녁 가장자리에서
사랑의 중력 속으로 한번 더 시인이여,
외침조차 조용하여 기쁘다

하늘 귀퉁이 맥을 짚으며
물 흐르는 소리에 나는 웃음을 참는다

땅거미와 시간을 보내는
혼자만의 땅거미 무늬가 내게 있다
-38쪽, '만년' 모두

삼라만상이 지닌 풍경을 가장 평등하게 저울질할 줄 아는 시인이 황학주다. 그가 쓴 시들은 물음표와 쉼표, 말줄임표, 큰 따옴표, 작은따옴표를 모두 지나 느낌표를 매달고 있다. 그 느낌표에는 시인 황학주가 지금까지 살아낸 삶과 우리들 삶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착한 눈웃음을 굴리고 있다. 

"숨도 쉴 수 없는 / 행복했던 순간들을 안녕, / 이라고 괄호 쳐두면 / 운명이 생각하는 시간에 대해 낙인에 대해 / 급기야는 우리에게 보석이 되어버리는 불취(不取)에 대해 / 한번 물어줘야지 싶다"(그렇게 협소한 세상이 한 사람에게 있었다)라거나 "한 풍경을 위해 두 개의 풍경을 인화하는"(백야),

"떼배짜는새는 떼배짜는새들 옆에 누웠다"(보내는 마음), "나무로 된 신을 신고 / 나무로 된 밥을 먹고 / 나무로 된 책을 읽고 / 나무로 된 약을 바르고 / 나무로 된 방에 들어 / 나무를 몸으로 만진 게 처음이었던"(바람의 분침), "징그러워라, 받아적으면 소설이여"(받아적으면 소설이여, 그녀가 말했다),

"몸이란 캄캄하다는데 너, 몸 맞아?"(입술), "그곳이 있고 그것이 있다 / 그것이 있었고 그곳이 있었다"(곳과 것), "가지 않으려고 했던 몸과 / 오지 않으려고 했던 몸을 위하여"(달맞이고개), "울먹임처럼 나이테가 간간이 넘쳤다"(고향-고사목), "나를 다치게 해서 살게 해주었던 계절들"(많은 잠깐들), "가장 예쁜 노을은 / 시궁창 속으로 가장 자주 지나간 부위라는 것"(족발 먹는 외로운 저녁) 등에 빠져보라.

시인 황학주는 풍경을 통해 세상을 읽고, 세상을 통해 풍경을 읽는다. 그 풍경 속에 사람만상이 지닌 속내가 혹은 빛으로 혹은 어둠으로 엎드려 있다. 그 빛과 어둠 사이를 누가 쳐다보거나 말거나 조용조용 걷고 있는 시인 황학주. 그가 쓰는 시는 풍경이다. 그는 그 풍경에 가만가만 다가서는 시인이다.

시인 황학주는 풍경을 통해 세상을 읽고, 세상을 통해 풍경을 읽는다. 그 풍경 속에 사람만상이 지닌 속내가 혹은 빛으로 혹은 어둠으로 엎드려 있다.
▲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시인 황학주는 풍경을 통해 세상을 읽고, 세상을 통해 풍경을 읽는다. 그 풍경 속에 사람만상이 지닌 속내가 혹은 빛으로 혹은 어둠으로 엎드려 있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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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눈빛으로 웃는 시... 웃는 눈빛으로 우는 시

영원을 지나온 듯이
하늘을 봤다는 듯이

운다는 것도
웃는다는 것도 맞다

빨랫방망이로 두드려놓은
맑은 물이 놓였다

눈으로 어루만지며
나는 어루만지며

검은 치아 흰 치아를 차례로
올려놓는다

물소리,
두드리는 돌에서 난다

돌에서,
물소리 난다
-94~95쪽, '우물터 돌' 모두

시인 황학주 열 번째 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사랑과 죽음이 엇갈리지 않고 언제나 빛나는 눈빛을 툭툭 주고받으며 더불어 살고 있다. 슬픈 눈빛으로 웃는 시…  웃는 눈빛으로 우는 시다. 그 눈빛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지닌 상처와 아픔이 너울로 '들음들음' 다가와 삶, 그 물무늬를 자잘하게 아로새긴다.

그 물무늬에는 "두 입술이 하나의 입술로 / 공평한 수평을 만"(입술은 흐릿하게 그 저녁에)"든다. "공평한 수평" 그 사이에는 "낮의 문장과 밤의 문장 사이 오래된 초승달이" 뜨고, "두 개의 탑 사이엔 여전히 /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문장… 행간, 이라는 말의 팽팽한 적요"(짝)가 있다.

시인 이근화는 '추천사'에서 "누구나 자연의 시간 위에 서 있지만 아무도 그 시간을 그대로 살지 않는다"고 입을 뗀다. 그는 "황학주 시인은 이제 '저절로 살구 떨어지는 시간'에 들어섰다"며 "영혼은 집이 필요 없고 떠도는 영혼의 가장 친한 벗은 시인이어서 '혼자만의 땅거미 무늬'를 찾아 그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고 썼다. 

시인 송재학은 발문 '풍경은 사람이 된다-학주에게'에서 "네 시집 원고를 일별했다"며 "'짝'이라는 이메일의 파일을 열자마자 너의 시가 좌르륵 모니터 여기저기 흩어진다"고 글머리를 열었다. 그는 "그릇에 가득 담긴 검은 콩을 바닥에 쏟는 것과 다름없다"며 "튀어 나가는 콩을 그릇에 주워 담듯 한 편 한 편 네 시를 읽었다"고 되짚는다.

그는 "학주의 삶에는 '生'(생)이라는 한자말이 맞춤하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다. 너의 생이 만지고 접축하는 모든 사물은 너의 감정적 쏠림을 받는다"며 "학주만큼 '生'을 사랑하고 '生'이란 글자를 자주 어루만졌던 시인이 있을까… 예컨대 너는 풍경에서 사람의 감정을 읽어낸다"고 평했다.

문학평론가 이숭원은 '서평'에서 "겨울과 사랑은 무슨 관계에 있는가? 이 물음이 이 시 해석의 열쇠가 된다"고 못 박는다. 그는 "황학주는 '저녁의 사랑'이 아니라 '겨울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진정으로 겨울의 사랑을 하려면 '겨울이 모일 때까지' 기다려 '겨울을 춥게' 배워야 한다"며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자신의 전신으로 껴안을 때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쐐기를 박았다.

시인 황학주는 1954년 광주에서 태어나 1987년 시집 <사람>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내가 드디어 하나님보다> <갈 수 없는 쓸쓸함> <늦게 가는 것으로 길을 삼는다> <너무나 얇은 生(생)의 담요> <루시> <저녁의 연인들> <노랑꼬리 연> <某月某日(모월모일)의 별자리>가 있다. 서정시학 작품상, 애지문학상 등 받음.

덧붙이는 글 | 문학iN에도 보냅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장희창 옮김, 민음사(2010)


태그:#시인 황학주, #사랑할 때와 죽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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