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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니스와 코르시카섬을 연결하는 페리호가 서로 엇갈려 들고 나는 니스항 모습.
 프랑스 니스와 코르시카섬을 연결하는 페리호가 서로 엇갈려 들고 나는 니스항 모습.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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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비탄에 빠트린 세월호 침몰 사고는 지난 1987년 발생한 영국의 헤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침몰 사고를 떠오르게 한다. 1980년 독일에서 제조된 엔터프라이즈호는 1987년 3월 6일 오후 7시 벨기에 지브뤼게(Zeebruges)항을 떠나 영국의 도버(Dover)항으로 향했으나, 출발하자마자 침몰한다.

항구에서 겨우 1500m 떨어진 곳에서 사고가 발생했고, 엔터프라이즈호는 2분 만에 뒤집혔다. 사고 해역의 깊이는 겨우 10m였지만, 폭이 23m나 되는 이 선박의 반이 바닷물 속으로 침몰하게 된다. 이 사고로 총 459명의 승객 중 193명이 사망했고, 4명이 실종됐다.

사고 원인은 배가 앞문을 닫지 않은 채 출발해 이 문으로 급작스럽게 바닷물이 밀려들어왔고, 이로 인해 균형을 잃은 선박이 침몰한 것으로 드러났다. 원래 영국의 도버와 프랑스의 칼레(75분)를 연결했던 엔터프라이즈호는 가끔 승객들의 특별 요청에 의해 도버와 벨기에 지브뤼게(4시간)를 연결하기도 했다.

이날 지브뤼게를 떠나 도버로 향한 이 선박에는 독일에서 돌아오는 군인들을 비롯해 수많은 승객이 타고 있었다. 더욱이 이날은 상당한 할인요금이 적용돼 평소보다 많은 승객이 선박에 탔다.

당시 여론은 선박의 문을 닫지 않고 항해를 시작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선박의 문을 닫는 일을 맡은 선원이 항해 4시간 전에 술을 마시고 잠이 들어 선박의 문을 닫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져 비난의 화살을 받기도 했다.

1987년, 단 2분만에 침몰한 엔터프라이즈호

그러나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대다수의 여객선이 선박의 문을 닫지 않은 채 항해를 했다. 대부분 바다의 수심이 선박의 문보다 3~4m 낮아 파도가 심하지 않은 경우엔 문을 닫지 않았다. 또 여객선에 실린 자동차의 가스를 빼기 위해 항해 초기에는 문을 닫지 않는 게 관례였다(사고 당시 81대의 승용차와 47대의 트럭이 실려 있었다). 그러므로 선박의 문을 닫지 않았다는 사실이 엔터프라이즈호 침몰의 치명적인 요인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브뤼게 항구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지브뤼게항은 칼레항보다 낮아, 선박에 차량을 싣기 위해서는 선박 앞쪽에 바닷물을 집어넣어 선박의 높이를 낮춰야 했다. 대신 항해 전에 이 물을 빼야 했는데, 사고가 난 날엔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냥 항해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을 빼는 작업에는 2시간이 필요했지만, 당시 항구에 다른 배들이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 엔터프라이즈호는 물도 빼지 못하고 문도 닫지 않은 채 쫓기듯 항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선장은 연착 상태로 떠난 배의 항해시간을 조금이라도 벌기 위해 항해 초부터 속도를 33.3km/h로 올렸다. 선장의 이런 선택은 수심이 낮은 바다에서 심한 파도를 유발했고, 바닷물은 이미 열려 있던 문으로 빠르게 밀려 들어왔다. 당시 선박에 들어온 물은 총 7900t이나 되었다. 급격하게 밀려들어온 물과 이미 선박 안에 들어있던 자동차 트럭의 무게를 못 이긴 엔터프라이즈호는 단 2분 만에 침몰한다.

승객 459명 중 193명이라는 많은 수의 사망자를 낸 침몰사고.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랄까.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이 없었더라면 더 많은 인명사고가 날 뻔했다.

사고 발생 1시간여 만에 땅 밟은 초기 구조자들

 4월 20일자 <르몽드>에 "세월 페리호 침몰로 충격에 빠진 한국"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4월 20일자 <르몽드>에 "세월 페리호 침몰로 충격에 빠진 한국"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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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선박이 수심이 낮은 항구 근처의 바다에서 침몰하여 선박의 반이 해상 위에 떠 있었다는 점, 둘째는 사고 당시 마침 옆을 지나치고 있던 소선박이 사건을 보고 사고 상황을 즉시 알린 점 등이다. 사고 선박은 당시 전기가 나가 사고를 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소선박의 신고로 항구를 떠난 지 18분만에 오스탕드 라디오에 사고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신속한 구조작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셋째 요인에 해당한다.

원래 이런 긴급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신속한 구조작전이 이뤄지도록 돼 있는데 이날 마침 나토 해양 선박이 항구에 정착해 있던 터라, 더욱 신속한 구조가 이뤄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선박이 침몰된 지 5분 만에 구조선박이 도착했다. 6분 만에 헬기를 탄 잠수부가 도착했고 12분 후에는 이미 8대의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여기에 해당 지역의 모든 차량을 금지시켜 구조차량의 신속한 진입을 보장했다. 그 결과 밤 8시 25분, 사고소식을 접한 지 1시간 만에 초기 구조자들이 육지를 밟게 되었다.

엄청난 사망자를 낸 엔터프라이즈호 침몰 사고는 페리호 안전규칙 도입의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모든 페리호에는 선박 앞쪽의 문이 닫혔다 걸 알려주는 신호등을 설치하는 것이 의무사항이 됐다. 또 1990년부터 항해 전에 페리호의 문을 반드시 닫으라는 규정이 만들어졌고, 국제안전관리규약(ISM, International Safety Management)도 생겼다.

당시 사고 선박은 금요일 저녁에 침몰했는데, 이틀이 지난 일요일부터 선박 세우기 작업이 이루어졌다. 거의 8000t이나 되는 선박을 일으켜 세우는 작업에는 무려 한 달이 걸렸고, 이후 선박 인양 작업에 다시 20일이 소요되었다. 사고 선박은 인도로 보내져 폐기됐고, 헤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는 1987년 10월 22일부터 P&O European Ferries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사회 분위기가 달랐다면, 사고 결말은 달랐을까

한국 세월호 침몰의 이유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상황인 가운데, 지난 20일 프랑스 언론인 <르몽드>에 실린 <세월 페리호 침몰로 충격에 빠진 한국>이라는 기사의 한 문장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구조된 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배가 침몰하기 시작할 때 승객들에게 배를 떠나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의 없이 이 명령에 따랐다."

보도에 따르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배가 침몰하기 시작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만약 위험상황을 인지했더라도 학생들은 배 안에 있으라는 지침을 무조건 따랐을까? 충효가 강조되는 한국 사회에서는 부모의 말이, 국가 지도자의 말이 개인의 사고보다 더 강조되곤 한다. 반면 서양에서는 개인의 인식이 더 중요시 된다.

프로이드는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개인과 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한국인들 사이에 비복종 의식이 조금이라도 더 발전했더라면, 이번 침몰사고의 결말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안타까운 마음에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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