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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 후의 감상이야 읽은 책의 종류에 따라 여러가지로 갈리겠지만, 그래도 크게 보면 읽을 때 막 재미있었는데 막상 책을 덮고 나면 시시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읽는 도중엔 이게 뭘까 하다가, 오히려 책을 덮고나며 그때서야 작가가 그려내고자 했던 큰 그림이 두둥 떠오르면서 새삼스레 감동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쿠쿠스 콜링]이 어느쪽이냐고 묻는다면, 나의 경우엔 후자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룰라 랜드리라는 영국 최고의 톱 모델의 추락사를 기점으로 시작된 소설은 2권 중반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그녀의 죽음과 관련된 어떤 실제적 추리를 하기엔 부족한 주변인들에 대한 장황한 인터뷰로 이어진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부분 살인자가 밝혀지고 나서 책을 덮고 나서, 그때서야 비로소 이 책을 통해 작가가 그려내고자 했던 영국 상위 1%의 '그들만이 사는 세상'이 다가온다.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가명이 무색하게 이 책이 그 유명한 해리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롤링의 성인용 작품으로 두번 째 작품이라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나 역시 아들들과 함께 해리 포터 시리즈를 즐겨 읽었던 사람으로, 조앤 롤링의 차기작이 어떤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영국 상류층이 사는 고급 빌라에서 몸을 던져 죽은 룰라 랜드리에 대한 사후 조사를 위임받은 코모란 스트라이크의 수사 일지에 가까운 [쿠쿠스 콜링]을 1권 정도 까지 읽어 내릴 때만 해도 여성 작가인 조앤 롤링이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남성이 연상되는 필명을 쓴 것에 대해 의심받는게 당연하다는 공감을 하는 정도의 섬세한 필체와 묘사에 집중하게 되었다.
하지만 권수가 2권에 넘어 가면서, 어느샌가, [쿠쿠스 콜링]을 통해 조앤 롤링이 그려내는 세계가 그리 낯설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되돌아 보건대, [해리 포터] 시리즈를 읽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조앤 롤링의 특기 중 하나는, 한번만 읽어도 오래도록 기억나는 등장인물의 면면이 살아있는 캐릭터들이다. 그리고, 그 생생히 기억나는 캐릭터의 상당 부분은 해리와 해리 주변의 선한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반대에서, 그들과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해리와 해리의 친구들을 겁박했던 그리고, 도무지 그가 누군의 편인지 모호했던 인물들의 캐릭터이다. 가장 극단적으로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동인이었던 볼드모트를 비롯해서, 볼드모트와 해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뇌했던 가장 큰 존재감을 떨쳤던 스네이프, 한결같이 나쁜 편이었던 말포이의 부모님 루시우스 부부, 엄브릿지 선생 들이다.

저들 악, 혹은 악의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인물들이 생동감있게 다가온 것은, 바로 그들이 형성하고 있는 세계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의 기성 세대가 가지고 있는 위선과 위악의 그것과 흡사하기 때문이었다. 인종 차별이나, 계급, 계층 차별에 근거한 확고한 선민 의식과 그것에 기반하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쉽게 무시하다 못해 짓밟고 도구화할 수 있는 어느 사회에나 실제로 존재하는 상위 1%의 세계를 해리 포터 시리즈의 볼드모트와 그 주변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선명하게 그려냈었고, 어른들의 허위 의식을 맛본 아이들은 그런 작가의 현실에 기반한 악의 세계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바로 그런 해리 포터의 캐릭터 구축이 [쿠쿠스 콜링]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단지 그것이 어린이용 소설 해리포터에서 절대적인 악의 세계로 형성되었던 반면, [쿠쿠스 콜링]에서 롤라 랜드리가 속했던 세계는, 그보다 더 세기말적인 부패와 향락과 절망의 세계이다.

이 책의 등장인물 존 브리스토는 사업을 했던 그의 아버지에게서 신탁 재산을 물려 받았지만, 21세기에 한때 융성했던 그 아버지 사업의 신탁 주식은 종이 쪽지에 불과하다. 오히려, 변호사인 존은 남의 이혼 사업과 회계 장부를 맞춰주는 월급장이에 불과하지만, 그와 함께 입양되었던 누이 룰라는 최고의 모델이 되어 그가 탐낼만한 천만 파운드의 재산의 주인공이 된다. 즉 영국을 움직이는 부의 중심이 달라졌다.

[쿠쿠스 콜링]에서 부의 실세로 등장하는 건 여직원을 성희롱하고 그걸 돈으로 덮을 수 있는 베스티귀같은 제작자요, 직원에게 온갖 험한 말을 하며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는 디자이너요, 그의 알현에 여러 사람들이 목숨을 건 팝스타이다. 하지만 스타이건 제작자건 디자이너건 제작자건, 약물, 그게 아니라면, 줄담배에라도 의존해야 할 허약한 심신을 가지고, 사랑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서로가 서로의 뒤를 캐고, 그래서 서로가 엇물리며 서로 공범자가 되어가는 세계, 멀쩡한 정신으론 살아내기 힘든 부조리한 영국 상류층의 세계를 조앤 롤링, 아니 로버트 갤브레이레스는 룰라 랜드리라는 아름다운 모델의 저항을 통해 담아낸다.

룰라 랜드리의 죽음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탐정으로 등장하는 것은 코모란 스트라이크라는 마치 [해리포터]시리즈의 거인 해그리드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해그리드가 거인족의 후손이라는 의심을 받듯이, 코로란은 역으로 한때 잘 나가던 락스타의 사생아로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와의 인연이 꼬리처럼 그를 따라다니는 것과 달리, 아버지로부터 한 푼의 재산을 받기는 커녕, 그의 후견인으로 부터 빛독촉을 당하는 입장인 코모란은, 그 부조리의 세계에서 잉태되었지만, 자유로운 영혼인 어머니 덕택(?)에 그 세계의 부조리함에 일찌감치 눈을 뜬, 그래서 자기 힘으로 살아내다 다리 하나까지 잃은 참전 군인이다.

반면 여주인공 룰라는 그와 정반대의 입장이다. 거리의 여인과도 같은 부랑아 흑인 여인의 소생이지만, 상류층에 입양되어, 극심한 모성애의 소유자 브리스토 부인의 품에서 화초처럼 키워질 운명의 여성이었다. 삼촌 토니를 비롯하여 어린 시절의 그를 그저 불량한 소녀처럼 묘사한 그 전사에서 부터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그녀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룰라는 자신의 이식된 삶에 대한 철저한 저항성을 보인다. 그리고 그 저항성은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는 끊임없는 시도로 이어지고, 그것이 안타깝게도 그녀의 죽음으로 귀결되게 되는 것이다. 최고의 모델로서 그녀를 이용하고 칭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 출신의 입양아라는 족쇄를 결코 풀어주지 않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 [해리포터]에서 머글이라는 출신 성분으로 내내 고통받던 소녀 헤르미온느가 떠오른다.

심지어 성 조차도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않은, 그 상위 1%의 삶에 대한 반기를 든 코모란 스트라이트에 의한 룰라 랜드리 사건의 해결은 소설 속에서 일종의 결자해지의 성격을 띤다. 사인이 불분명했던, 하지만 방탕하니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치부되었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그래서 그를 안온했던 대학 시절로 부터 도망가게 만들었던 사건에 대한, 그리고 어린 시절 전학 온 그를 따스하게 대해주었던 친구 챨리의 죽음에 대한 해명이 된 것이다.

소설 속에서 이렇게 지금의 한 사건을 통해, 화자가 짊어진 과거의 사건이 해소되는 경우는 종종 드러난다. 평범한 듯 보였던 룰라 랜드리의 사건 해결은, 소설 후반부에 이르러 가면서, 그녀의 삶이,  결혼 제도, 그리고 사회 제도  속에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코모란의 어머니, 그리고 룰라가 택했던 거리의 친구 로사의 삶과 동일하게 치환되면서, 그저 화려했던 스타의 삶이 아니라, 시대성을 가진 불우한 한 여성의 삶으로 형상화된다.

또한 현재의 사건 해결이, 코모란이 기억 속의 또 다른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개인사에 불과하지만 역사성도 품게 된다. 그러면서, 평범한 스타의 살인 사건은,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의 점층적 터치로 제법 사회적 배경이 그럴싸한 미스터리 작품으로 결론지어지게 된 것이다.


쿠쿠스 콜링 1

로버트 갤브레이스 지음, 김선형 옮김, 문학수첩(2013)


태그:#쿠쿠스 콜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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