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들은 저마다 팀을 위한 행동이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 발자국 떨어진 제 3자의 시선에서는 그저 치졸한 감정싸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8·9위로 처진 한화와 LG의 꼴찌대전은 그렇게 씁쓸한 감정의 앙금만 남긴 채 마무리했다.

주말 3연전에서 1승 1패로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던 양팀의 지난 20일 3차전. 한화가 7-5로 뒤진 6회말 구원등판한 LG 투수 정찬헌이 한화 정근우의 등을 맞힌 게 발단이었다. 이때만해도 고의성은 없었다. 잠시 주저앉아 고통스러워하던 정근우는 곧 1루로 나갔지만, 정찬헌이 사구를 던지고도 사과 표시가 없는 데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반면 이번엔 정근우의 주루 플레이가 LG를 자극했다. 후속타자 김태균의 땅볼 때 2루로 질주하던 정근우가 아웃되는 과정에서 볼을 잡고 태그를 시도하던 유격수 오지환을 향해 발을 든 채 위험하게 슬라이딩 했다. 정근우의 발에 걸린 오지환은 1루로 공을 정확하게 송구하지 못했고 한동안 무릎을 쥔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심판이 정근우의 수비방해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자칫하면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위험한 장면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화의 공격이 끝나고 공수교대하는 장면에서 LG의 베테랑 이병규가 정근우와 이 장면을 두고 멀리서 언쟁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고 문제의 8회말, 한화가 9-7로 앞선 상황에서 다시 정찬헌과 정근우가 맞딱뜨렸다. 정찬헌은 1구부터 정근우의 몸쪽으로 공을 던졌다. 빈볼의 의도가 명백한 행동이었다. 정근우는 초구는 피했지만  2구째에 결국 또다시 등을 얻어맞았다. 화가 난 정근우가 마운드쪽으로 향했고, 정찬헌은 잠시 모자에 손을 댔지만 별다른 표정 없이 정근우를 마주 쳐다보며 맞섰다. 곧바로 양 팀 선수들이 일제히 그라운드로 뛰쳐나오며 벤치클리어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한화 김태균과 LG 우규민 등이 특히 당사들보다 더욱 흥분한 모습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평소 여유로운 성격의 김태균은 이날 LG 선수들과 뒤엉켜 격한 언쟁을 벌였다. 이날 LG 선발투수로 등판했다가 조기강판된 우규민은 정근우에게 다가가 6회의 주루플레이를 지적하며 고성과 삿대질이 오가기도 했다.

주변에서 뜯어 말려 사태가 진정되고 난 후 심판은 정찬헌에게 퇴장을 선언했다. 올 시즌 빈볼에 의한 1호 퇴장. 김기태 LG 감독이 나서서 잠시 항의를 했으나 판정은 바뀌지 않았다. 잠시후 재개된 경기는 결국 9-8 한화의 1점차 승리로 끝이 났다.

승부의 세계에서 기싸움은 간혹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스포츠에서는 지켜야할 선이 있다. 감정에 치우친 반응은 더 큰 오해를 낳고, 상대를 위협하는 행동은 더큰 보복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일단 정찬헌의 행위는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다. 첫 번째 사구는 고의가 아니었다 해도  타자를 배려하는 최소한의 의사표시는 해야 했다. 정근우가 정찬헌보다 한참 선배라서가 아니라, 빈볼을 맞힌 투수와 타자간의 암묵적인 예의이기 때문이다. 설사 공식규정에 없는 한국만의 관행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페어플레이를 위한 행동이라면 존중할 만한 관행이다.

더구나 두 번째 사구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몰상식한 빈볼이었다. 처음부터 타자의 상체를 노리고 빠르게 직격으로 들어간 공은 상당히 위험한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기싸움으로 용납할 만한 수위가 아니었다.

보통 고의적인 빈볼은 투수 개인만의 의지로 감행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프로 4년차인 정찬헌이 덕아웃에서 코칭스태프나 선배들로부터 모종의 지시를 받은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 충분하다. 벤치클리어링을 전후해 정근우가 이병규나 우규민 같은 LG 고참급 선수들과 언쟁을 주고받은 것도 이런 의혹을 증명한다. 실수로라도 오해를 사기 충분한 행동인데, 하물며 이미 한 번 사구를 맞힌 투수가 같은 타자에게 또다시 위험한 빈볼을 던지게 했다면 LG 선수단 자체가 감정에 휩쓸려 이성을 잃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물론 빈볼의 빌미를 제공한 6회 정근우의 슬라이딩에도 오해의 여지는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오지환에게 큰 부상을 입힐 뻔했고, 마침 사구로 출루한 직후라 오지환에게 보복성 플레이를 한 게 아니냐는 인상을 줄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찬헌의 빈볼과 결정적 차이는, 정근우의 슬라이딩은 고의성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송구지연을 위한 슬라이딩 동작은 직접 선수를 노린 것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는 정상적인 팀플레이로 인정받는다. 정근우의 오른발이 다소 높았던 감은 있지만 슬라이딩시 몸의 방향은 2루를 향하고 있었고, 심판도 정근우의 플레이를 정당하다고 인정했다.

벤치클리어링 당시 LG의 일부 고참급 선수들이 분위기를 진정 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감정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대목이다. 특히 이병규는 노골적으로 정근우의 슬라이딩을 지적하며 불편한 심기를 노출했는데, 이는 본인의 과거를 망각한 태도이기도 했다.

이병규는 3년 전인 2011년 4월 21일 비슷한 상황에서 바로 정근우에게 부상을 입힐 뻔한 전력이 있다. 당시 SK 소속이었던 정근우는 이대형의 땅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2루에 쇄도하던 주자 이병규의 발에 걸려 넘어졌다. 당시와 그때의 차이점은, 이병규의 슬라이딩은 2루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정근우의 하체를 겨냥하고 들어간 모습이었다. 하마터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만한 상황이었고 당시 SK 김성근 감독까지 나와서 항의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이병규가 정근우의 슬라이딩을 문제삼으려 했다면, 3년 전 본인의 플레이는 영구제명감이었다는 것도 환기해야 할 대목이다.

LG는 이날 경기로 많은 것을 잃었다. 한화를 상대로도 위닝시리즈에 실패하며 꼴찌를 벗어나지 못했고,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주축 불펜투수까지 퇴장 당하는 손실을 겪었다. 양팀간 감정싸움의 총알받이가 된 정찬헌은 당일 LG 선배들에겐 칭찬을 받았을지 몰라도, 야구팬들에게 한동안 '비신사적인 선수'로 낙인찍히게 됐다. 기싸움의 금도를 넘어 버린 치졸한 감정싸움으로 잃은 게 너무 많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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