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최원일 선생님 부인께서 남편의 점심과 저녁을 위해 은박지에 말아 싸주신 김밥 두 줄을 세 사람이 먹기 좋도록 접시에 옮겨 담았습니다.
 최원일 선생님 부인께서 남편의 점심과 저녁을 위해 은박지에 말아 싸주신 김밥 두 줄을 세 사람이 먹기 좋도록 접시에 옮겨 담았습니다.
ⓒ 이안수

관련사진보기


#1

늘푸름 2013/10/12

늘푸름 선생님,

선생님의 말씀처럼 가족, 행복, 친구가 성공, 돈, 미래, 투자와 치환되거나 미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저도 오래전에는 '미래'를 빌미로 현재의 행복이나 가족에 대해 충실하는 것을 미루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이며 꿈꾸는 미래의 무릉도원이 아니라 '여기'이며 가장 귀한 사람은 바로 지금 마주보고 있는 '내 앞의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미 저보다도 더 깊이 행복의 정의와 그것을 얻는 방법을 훤히 알고 계시다는 것을 능히 알겠습니다.  

헤이리에 오실 일 있으시면 모티프원에서 잠시라도 선생님을 대면하는 행복을 기다리겠습니다. 선생님의 사유 깊고 배려심 가득한 안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_모티프원 이안수 드림

꽤 오래전에 주셨던 글 다시 읽어봅니다.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 글이 어깨를 내려치는 죽비였음을…….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2

7년간 블로그의 덧글로 만나는 분이 있었습니다. '늘푸름'이라는 아이디로만 소통했으므로 본명도 알지 못했습니다. 

덧글의 사연을 종합하면 큰 경제적 시련을 겪고 그것을 극복하기위해 노력중인 분이었습니다. 

늘푸름 2013/10/12
지난 일년간 아내가 말아주는 한 줄의 김밥에도, 고슬고슬한 고봉밥에도 누군가의 손길을, 사랑을, 그리고 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지금 제가 살아있기 때문이고 또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티프원 2013/10/12
식당의 식탁이 아니라 도시의 모퉁이에서 혹은 놀이터나 공원의 벤치에서라도 아내의 남편에 대한 가장 짙은 애정과 응원이 담긴 그 김밥 한 줄에서 천군만마의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내가 찬 없이 아무데서라도 먹을 수 있도록 싸주신 그 김밥 한 줄은 뜨거운 눈물이고 우렁찬 함성임이 분명합니다. 선생님의 아내에게 저의 존경을 받칩니다. 선생님이 오늘도 가족의 희망인 이유이구요.

짤막한 덧글을 통해 접하는 이 분의 처지는 힘겨운 현실이 반영되어있지만 현실을 극복하기위해 매진하는 노력과 세상을 향한 긍정의 시선은 사람들의 탐욕을 반성하게하고 풍요 속에 안주를 분발하게 하는 수도자의 경건함이 담겨있었습니다.
 
최원일 선생님과의 한 나절 대면에서 저는 스스로 고행을 통해 삶의 진리를 터득한 큰 구루(guru)와 대면한 느낌이었습니다. 한 개인의 시련과 실패가 얼마나 인생의 큰 수련이지, 그리고 얼마나 극적으로 영혼의 성장을 가져다주는지를 실감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현상은 모두 이유가 있습니다. 기쁨도 그리고 슬픔조차도……. ‘늘푸름' 은 최선생님께서 서예를 하실 때 쓰는 호이자 ’삶의 지향‘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최원일 선생님과의 한 나절 대면에서 저는 스스로 고행을 통해 삶의 진리를 터득한 큰 구루(guru)와 대면한 느낌이었습니다. 한 개인의 시련과 실패가 얼마나 인생의 큰 수련이지, 그리고 얼마나 극적으로 영혼의 성장을 가져다주는지를 실감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현상은 모두 이유가 있습니다. 기쁨도 그리고 슬픔조차도……. ‘늘푸름' 은 최선생님께서 서예를 하실 때 쓰는 호이자 ’삶의 지향‘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 이안수

관련사진보기


#3

지난 3월 24일, 주변의 땅과 나무는 여전히 무채색이었지만 부드러운 양광이 천지간을 가득해우고 있는 날이었습니다.

서재 앞에서 해모의 등을 쓰다듬는 신사 분이 계셨습니다. 해모는 편안하게 온몸을 그 분에게 맡기고 있었습니다.

서재 문을 연 저를 보자 온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했습니다.

"저는 선생님글을 통해 위안을 받고 용기를 얻는 사람입니다. '늘푸름'이라고……."

지난 7년간 덧글로만 교감하면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라고 막연한 약속글을 남겼던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저는 먼저 오셔서 대화를 나누던 다른 이웃분에게 함께해도 좋을지를 양해 받고 그 분을 우리의 자리로 모셨습니다. 이제 서재의 한 책상을 공유한 사람은 셋이 되었습니다.

늘푸름님이 함께하기 전에 우리는 극히 사적인, 더 정확하게는 지난시간을 힘들게 했던 수많은 시련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습니다.

신사분께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저는 최원일입니다. 건축을 전공했지만 건축보다는 지난 15년간 재무컨설팅업무에 종사해왔습니다. 회사에서 저의 별명은 '세븐일레븐(Seven Eleven)'이었지요. 항상 7시전에 출근해서 11시가 넘어야 퇴근했거든요. 1년에 단 이틀만 빼고요. 설날과 추석날... 앞뒤 돌아보지 않고 일에만 매진한 결과로 그 계통에서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연봉3억의 이상의 사람들로 만들어진 클럽을 운영하면서 미술품을 수집하기도하고 나눔문화 등 평화나눔운동에 참여하고 대안 커뮤니티를 만드는데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요. 이 헤이리같은……."

저는 지난 7년간 단편적으로 알아왔던 최선생님의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고 저와 함께했던 분도 최원일 선생님과 같은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위안일 수 있으므로 최선생님의 얘기에 집중했습니다. 최선생님은 지난 세월에 대해 가감 없이 담담하게 말씀을 이어갔습니다.

"아마 저는 이런 직장인의 치열한 삶이 아니라도 좀 더 여유 있는 삶이 유지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적지 않은 돈을 북한 사업에 투자했다가 그것을 고스란히 손실로 안았습니다. 

그 실패를 만회하기위해 회사도 그만두고 베트남에 다시 투자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저의 자금뿐만 아니라 저의 친인척 돈까지 빌려다 넣었습니다. 제가 투자한 사업은 진척이 없었고 결국 회수될 가능성은 희박해졌습니다. 절망에 머리도 깎지 않았고 체중도 15kg이나 줄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살던 아파트조차 비워주어야 했습니다. 낡은 아파트로 나앉은 뒤 아이들이 물었습니다.

"우리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왜 없는 거야? 경비아저씨가 없어도 돼?" 

제가 세상에서 제일 쉬웠던 것이 사람만나 설득하는 것이었어요. 7천여명정도의 사람을 만나 상담을 진행했던 사람인데 사람을 만날 수도 없더군요. 투자했다가 제가 사기당한 것뿐이지 제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바깥을 나가도 뒷골목을 택했고 제가 전화를 먼저 하는 경우는 없어졌습니다.

작년에 중학교에 입학한 딸이 말했어요. 

"아빠, 나 이제 중학생 됐는데 선물하나 줄 수 없어?"
"뭔데……."
"아빠 머리 깎는 거!" 

아이의 선물로 다시 머리 깎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면서 정신을 차리고 망가진 사업을 일으켜 세워보려고 막 뛰었지요. 그 때 비로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투자한 것이 아니라 욕심을 부린 거였구나.' 나의 결과는 내가 뿌린 욕심의 씨앗이 발아해서 크진 거지요. 그 넝쿨이 저를 옥죄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욕심의 넝쿨을 끊어버리는 대신, 미련 때문에 계속 그 식물에 물을 주었던 거예요.  

그 넝쿨을 완전히 자르고 나온 게 작년 초 집이 경매에 넘어가고 나서 에요. 신문을 보는데 '동반자살'이라는 네 글자가제 눈앞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다른 글자는 하나도 안보이고요. 예전에는 그런 기사에 대해 가장을 질책했어요. 죽으려면 혼자 죽던지... 그런데 그 시점에 제 생각은 오죽했으면 가장이 그런 선택을 했을까하는 것에 공감되면서 '그래 이게 답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렇게 되면 가장 편안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컴퓨터의 자료들을 하나하나 지우기 시작했어요. 전화번호도 모두……. 

작년 8월말까지 이 계획을 시행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어요. 5일 동안 잠 한숨자지 못한 상황에서 카카오스토리에다가 글을 썼어요.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다'는 그대로의 상황을……. 그런데 20분쯤 뒤에 두 분이 답글을 주셨어요.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공교롭게도 두 분 모두 말기 암환자였어요. 저와 나이가 비슷한 분으로 한분은 뇌종양이고 한분은 췌장암환자인데 이분들이 저를 위해기도한다하시고 제게 힘내라고 하시는 거였어요. 

그때 제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만약 그분들이 제게 '내가 네 빚을 갚을 테니 내 병과 바꾸자'라고 했을 때 내가 바꿀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생각에서 제가 뒷걸음질 쳐지더라고요. '아휴, 죽고 싶다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거구나'하는 각성을 하게 되었지요. 그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나는 살고 싶은데 저 사람은 죽고 싶다니……. 가진 욕심 내려놓기만 하면 되는데……." 

작년 8월말 밤에 그 두 분의 기도 글을 읽고 완전히 정신을 차리게 된 겁니다. 9월 1일부터 다시 일터로 돌아왔지요. 예전부터 하던 일로……. 하지만 완전히 욕심이 버려지지는 않더라고요. 저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일할 수 있을지를 찾아보곤 했어요. 톱 랭크에 있다가 바닥부터 다시 뛰려니 작년 12월까지는 많이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곤 했지요. '죽을 각오'도 했었는데 '살 각오'도 하면 되지, 라고."

#4

지금 상태에서 좀 더 객관적으로 스스로의 과거를 명징하게 볼 있게 되었습니다.

"몸에 탈이 나도록 지난날 3~4시간 자면서 일에만 매달렸던 날들을 돌아보니 제가 일을 한 게 하니라 일의 노예가 되었던 거예요. 옆에서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의 주인공처럼 무조건 뛰고 있더라고요. 어느 순간 '내가 왜 뛰지?' 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물론 그 질주의 시간들을 통해 얻는 것이 있었지만 제가 놓치고 챙기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속도를 줄이고 싶었어요. 그때까지 번 돈을 아껴서 쓰면 평생을 쓸 수 있는 돈이었는데 그 때 다른 생각을 한 겁니다. 이 돈을 가지고 내가 뛰지 않아도 돈이 돈을 벌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보자고……. 북한 사업한다고 들어갔다가 날리고, 베트남 사업한다고 들어갔다가 묶이고……. 그것이 순전히 욕심이었던 거지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데 저는 공짜를 바랐던 거지요. 

돌아보면 계속 어긋나는 삶을 살았어요. 그림을 좋아했는데 미대대신 건축을 공부했고요, 건축을 전공했지만 보험영업을 하게 되었고, 보험영업을 잘했지만 서툰 투자자가 된 겁니다. 

예전의 제 목표는 전원에서 작은 숲을 가꾸며 정원사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남의 빚이라도 갚고 우리 아이들에게 최소한 빚은 남겨주지 말자, 는 것이에요. 빚내는 삶이 아니라 빛나는 삶을 살아야 되는데 말이지요."

최선생님의 말씀은 때로는 느리고, 때로는 빨랐습니다. 간혹은 높고 간혹은 낮았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고행을 통해 스스로 삶의 지혜와 통찰을 갖게 된 신성한 교육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시간은 이미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제 아내가 김밥 두 줄을 싸주었습니다. 하나는 점심식사용이고 하나는 저녁식사용입니다. 함께 먹으면 어떨까요?"

가방에서 은박지에 싼 김밥 두 줄과 작은 보온병하나를 꺼냈습니다. 따뜻한 가족의 온기가 함께 따라 나왔습니다. 

은박지를 풀고 셋이 둘러앉았습니다. 사실 김밥 한 줄은 최선생님의 저녁식사용이었습니다. 저는 그 김밥이 너무 달고 맛있어서 어쩌면 최선생님이 저녁식사를 거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제가 먹어본 것 중에 가장 맛있는 김밥 두 줄이었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난시각, 최원일선생님께서 김밥 두 줄과 작은 보온 병 하나를 꺼냈습니다. 마침, 자리에 함께하시면서 최선생님의 말씀을 함께 들은 서양화가 김미원선생님께서 김밥을 접시에 옮겨 담았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난시각, 최원일선생님께서 김밥 두 줄과 작은 보온 병 하나를 꺼냈습니다. 마침, 자리에 함께하시면서 최선생님의 말씀을 함께 들은 서양화가 김미원선생님께서 김밥을 접시에 옮겨 담았습니다.
ⓒ 이안수

관련사진보기


#5

최원일선생님이 다녀가신 지 3주가 지나서 조팝나무 꽃이 화사해졌습니다. 긴 겨울을 나고 피운 희고 맑은 모습이 최선생님의 온화한 미소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부를 확인하기위해 그 분의 블로그에 접속했습니다. 모티프원을 다녀가신 날의 흔적이 마지막으로 올려져있었습니다. 

김선생님과의 대면은 장속에 여전히 소화되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었던 탐욕과 증오, 분노와 망상들을 씻어주는 효과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김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선생님과 보낸 한나절은 제게 마중물이자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저도 선생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나눔을 또 나누겠습니다." 이렇듯 세상은 모두가 서로에게 스승일 수 있습니다.
 김선생님과의 대면은 장속에 여전히 소화되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었던 탐욕과 증오, 분노와 망상들을 씻어주는 효과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김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선생님과 보낸 한나절은 제게 마중물이자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저도 선생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나눔을 또 나누겠습니다." 이렇듯 세상은 모두가 서로에게 스승일 수 있습니다.
ⓒ 최원일

관련사진보기


"법인상담차 파주에 갔다가 예술마을 헤이리의 촌장이신 이안수선생님이 생각났습니다.

직접 뵌 적은 없지만 7년간 선생님이 매일매일 올리는 블로그 글을 읽었고 짧은 덧글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바로 알아봐주시고 반겨주십니다. 

가져간 두 줄 김밥과 갓 내린 커피 그리고 큰 접시에 담아내신 빵과 과일을 나눠먹으며 살아온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살아갈 이야기로 한나절을 보냈습니다. 

파주의 봄볕보다 따스한 선생님의 마음에 행복했습니다. 산미 감도는 커피보다 진한 사람 사는 향기에 행복했습니다.
_늘푸름"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최원일 선생님의 접속 정보
-카카오스토리 아이디 | fineadvisor1004
-이메일 | fineadvisor@naver.com



태그:#김밥, #최원일, #늘푸름, #성공, #실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