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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완전한 사회는 없다. 그러나 이처럼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났는데도 처음부터 시종일관 우왕좌왕인 상황을 보고 있으면 이게 제대로 된 나라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부이긴 하지만 세월호 승객 중에 좌빨도 있었을 것이고, 그들의 자식들이 죽은 것에는 애도를 표할 필요가 없다는 글을 SNS에 올리는 자도 있다.

베레나 카스트는 그의 책 <애도>에서, 삶이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경험하고, 다른 사람이 우리 안에서 그동안 불러일으켰던 경험들, 특히 사랑의 관계에서 가장 내밀한 자기와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연결된 사람들을 잃게 되었을 때 실제 우리의 한 부분도 잃게 된다.

그가 누구든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그가 누구든 죽음 앞에서는 숙연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참사 앞에서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종북좌빨 운운하며 죽음마저도 이편저편으로 갈라놓는 자들을 탓해보기는 하지만, 따져보면 사실 그들만의 탓이 아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이 무책임의 체계가 이런 비극의 되풀이를 언제까지나 계속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세월호 침몰사고' 4일째인 19일 오후 전남 진도 인근 사고현장 부근에서 발견된 3구의 시신이 해경 경비정에 실려 팽목항으로 옮겨지고 있다.
▲ 팽목항으로 옮겨지는 세월호 희생자 '세월호 침몰사고' 4일째인 19일 오후 전남 진도 인근 사고현장 부근에서 발견된 3구의 시신이 해경 경비정에 실려 팽목항으로 옮겨지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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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선장,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좌초하는 배에서 승객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이 맨 먼저 도망간 세월호의 늙은 선장에게 이 참사의 윤리적 비난이 집중되고 있다. 물론 그는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법의 엄중한 처벌도 달게 받을 일이다. 벌써부터 여당의 모 의원은 그런 도망자에게 무기징역까지 가능한 처벌 조항을 담은 관련법 개정안을 냈다는 소식도 들린다. 배를 타고 수학여행 가지 말라는 교육당국의 지시도 있다. 비행기가 떨어지면 비행기를 타지 말고, 자동차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나면 자동차 여행을 하지 말고, 걷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이제 걷는 것도 금지시킬 것인가. 그렇게 하면 해결되는가.

왜군이 부산에 이르렀다는 장계를 받아 든 선조는 그날 밤으로 밤 봇짐을 싸고 서둘러 도망을 간다. 중국과의 국경지역 의주까지 도망을 가면서 차마 그가 자신의 백성들을 버렸다는 자책이 없었을까 싶기는 하다. 침몰하는 배를 두고 맨 먼저 도망 나오면서 늙은 선장이(그것도 비정규직이라고 하니) 설마 나는 목숨을 건졌다는 희열에만 잠겼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선조에게 죽음을 불사하고 백성들을 지켜야 하지 않았느냐는 비난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도성에 남아 있었더라면 그가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으리라는 건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니까. 세월호의 늙은, 그리고 비정규직 선장에게 왜 너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했느냐는 비난은 정당하면서도, 그러나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승객들을 구하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었을까, 너무 자신하지는 말자.

변죽만 울리면서 희생양 찾기에 골몰하지 말자...국가의 책임이다

 17일 오후 전남 목포시 목포해양경찰서에서 2차 소환 조사를 마친 이준석 선장이 경찰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 소환조사 마친 세월호 선장 17일 오후 전남 목포시 목포해양경찰서에서 2차 소환 조사를 마친 이준석 선장이 경찰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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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런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선조는 그때 백성들의 손에 참수형을 당해야 옳았다. 아니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왕들과 비교할 때 오래토록 권좌에 있었다.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거대한 이데올로기, 주자학이라는 담론 체계의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우리는 여전히,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와, 확신을 갖고 증거조작을 했다면 조작이 아니라는 궤변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비극의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느니, 못난 어른들을 용서하라느니 하는 말들은 반은 옳지만 반은 옳지 않다. 그것은 저 90년대 가톨릭에서 제창했던 '내 탓이오' 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무책임한 언설이기 십상이다.

물론 모든 것을 남의 탓이요, 사회 탓이요, 정부 탓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적이지 않다.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하는 건 원론적으로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참극마저 우리 모두의 탓이라고 해버리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다를 게 없어진다. 세월호는 왜 좌초했는가, 왜 그렇게 구조는 더뎠는가를 제대로 따지고 가려서 그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옳을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이 말로만 송구스럽다고 고개 숙이지 말고 온전한 책임을 지는 것이 필요하다.

근본은 놔두고 주변에서 변죽만 울리면서 희생양 찾기에 골몰하지 말자. 대통령의 책임은 그래서 막중하다. 이 되풀이되는 무책임의 체계라는 고리를 끊는 첫 걸음은 대통령의 책임지는 자세에 있다. 국민들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몰살되는 참극을 국가가 막지 못했다면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스스로 책임을 져야 옳다. 이것이 책임윤리다.


태그:#세월호, #책임윤리, #선조와 늙은 선장, #대통령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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