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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졌구나 터졌구나 독립성이 터졌구나 
15년을 참고 참다 이제야 터졌구나
피도대한 뼈도대한 살아대한 죽어대한
잊지마라 잊지마라

탄운 이정근 선생이 지은 노래비
▲ 이정근 노래비 탄운 이정근 선생이 지은 노래비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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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탄운 이정근(1856. 2.10 ~ 1919. 4. 5) 선생이 지은 노래로 화성시 장짐리에 있는 유적지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

4월 15일은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이 발생한 날로,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짐리에는 독립투사 탄운 이정근 선생의 유적지가 있어 다녀왔다.

"1919년 3월 31일 낮 12시 정각을 기해 저희가 가장 존경하는 탄운 이정근 스승님의 지엄하신 지시를 받아 화성군 7개면에 거주하는 저희 800여 제자들은 머리에 흰갓을 쓰고 손에 태극기를 들고 남녀노유 할 것 없이 구름 같이 모인 군중과 합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온천지가 떠나갈 듯이 부르던 일이 어제일 같은데 어느덧 세월이 52년이 지난 아득한 옛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때 나의 나이는 19세의 철부지 소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스승님을 모시던 제자 800여 명 중 제가 가장 연소자였습니다." 1971년 고 김영태 선생은 탄운 선생의 추모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은 통솔력이 풍부하신 분이셨습니다. 한때 구한말 정부 궁내부 요직까지 벼슬길에 오르셨으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야만적인 을사늑약에 큰 충격과 의분을 느낀 나머지 벼슬자리를 초개와 같이 버리시고 향리로 낙향하시어 부근 각처로 순회하시며 서당을 세워 문맹퇴치 운동에 전력하는 한편 조국 광복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시면서 화성군 산하 7개면을 우선 골라 800여 명의 제자를 길러내셨습니다."

김영태 선생의 스승 탄운에 대한 이야기는 <탄운 이정근 의사 전기: 灘雲 李正根 義士 傳記>에 상세히 나와 있다.

발안만세운동의 선구자 탄운 이정근 선생의 창의비
▲ 이정근 선생의 창의비 발안만세운동의 선구자 탄운 이정근 선생의 창의비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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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2월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가재리에서 이연규 옹의 2남으로 태어난 선생은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한문을 배웠다. 17세에 사서오경을 섭렵할 정도로 학문이 깊었으며 33세 때는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직에 임명되었으나 그해가 바로 1905년 을사늑약의 해다.

치욕적인 을사늑약을 지켜보면서 이제 막 첫발을 내딛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팔탄, 우정, 장안, 정남, 봉담, 남양 등 7개면을 중심으로 인재육성에 들어갔다.

당시 탄운 선생은 '왜왕 3년(倭王)' 이라는 구호를 친히 만들어 유포했는데 이는 야만적인 강도 일본이 천벌을 받아 3년이 못 가서 망할 것이란 뜻이었다. 이후 1919년 3월 31일 화성군 향남면 발안(華城郡鄕南面發安) 장날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는 데 그 한가운데 탄운 선생이 있었다.

탄운 선생은 이날 오후 발안 장터에서 안상용(安相容)·안진순(安珍淳)·안봉순(安鳳淳)·김덕용(金德用)·강태성(姜太成) 등과 함께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진두지휘 했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부상자가 발생하자, 탄운 선생은 격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일경들에게 투석으로 대항하였으며 일본인 순사부장을 해치웠다. 그러나 이날 일본 경찰이 휘두른 칼에 찔려 56세로 그 자리에서 순국하는 비통한 일이 일어났다. 이후 선생의 강인한 독립정신과 온후한 인품을 기리고자 하는 제자들의 열망으로 1971년 3월 31일 선생이 순국한 지 52년 되는 해에 창의탑을 장짐리 241-6번지에 세웠다.

한편 탄운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탄운 이정근 의사 기념사업회에서는 지난 2004년 3월 장학회를 설립, 화성시 6개읍면(향남, 팔탄, 양감, 우정, 장안, 봉담)의 모범대학생을 뽑아 해마다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탄운 이정근 의사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탄운 이정근의사 초상 (그림 권귀자 화백)
▲ 탄운 이정근 탄운 이정근의사 초상 (그림 권귀자 화백)
ⓒ 탄운이정근의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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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운 선생의 창의비가 서있는 작은 추모 공원에는 말끔히 잔디가 가꿔져 있었고 울타리 쳐진 뜰 안에는 붉은 자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릴 듯 차올랐다. 올해는 탄운 선생 가신 지 95주년이 되는 해다.

3·1만세운동은 우리 겨레에게 잊을 수 없는 민족적 의거날임과 동시에 화성시 발안 만세운동의 선두에서 진뒤지휘를 하던 탄운 이정근의사가 순국한 해이기도 하다. 붉은 자목련을 뒤로 하는 발걸음에는 선생의 붉게 타오르던 애국정신의 마음이 진하게 느껴졌다.

*탄운 이정근의사(義士) 창의비 가는 길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삼천병마로 283-6(구 주소 화성시 향남읍 241-6)
근처에 제암리교회 학살 현장이 있다.(향남읍 제암리 길 50)

덧붙이는 글 | 한국문화신문 얼레빗. 대자보에도 보냈습니;다.



태그:#이정근, #탄운, #향남, #3.1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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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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