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이버전트>의 한 장면.

영화 <다이버전트>의 한 장면. ⓒ 서밋 엔터테인먼트


미국에서 지난달 21일 개봉한 영화 <다이버전트>는 개봉 전부터 <헝거게임>과 줄곧 비교되었다. 하이틴 여성이 전체주의 색깔을 물씬 풍기는 디스토피아에서 혁명서사의 주인공이 된다는 점이 두 영화의 닮은꼴이다. 또 <헝거게임>이 세계를 12구역으로 나눌 때 <다이버전트>는 5개의 분파로 구획한다는 설정도 닮았다.

감독에 관한 이슈도 비슷하다. <헝거게임>은 1편 <판엠의 불꽃>의 감독인 게리 로스를 교체하고서 나머지 후속편들(<캣칭 파이어><모킹제이 파트1><모킹제이 파트2>)의 연출을 모조리 프란시스 로렌스에게 맡겼다. <다이버전트>도 후속편들이 예정되어 있는데(<인서전트><얼리전트 파트1><얼리전트 파트2>), 역시 1편의 감독인 닐 버거가 하차하고 다른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인서전트>는 이미 로베르트 슈벤트케가 감독으로 확정되었다. 덧붙여 두 영화 모두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영화평은 갈린다. <다이버전트>는 영화 평가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의 지수에서 현재 40%를 기록하며 1억 2480만 달러의 흥행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저조한 성적을 나타내고 있다. <헝거게임1>과 <헝거게임2>가 각각 84%, 89%의 토마토 지수를 얻은 것과 대조된다.

아무리 하이틴 소녀의 이야기더라도 지나치게 약한 액션, <헝거게임>이 높여놓은 기대치에 미달하는 상투적이고 느슨한 플롯 전개, 매기 큐와 케이트 윈슬렛을 단역 수준으로 만드는 비효율적인 캐릭터 운용 등 영화의 완성도 자체에는 의문점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다행히 영화의 세계관과 설정은 꽤 곱씹어 볼 만한 요소가 많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세분화시킨 듯한 5개 분파

<다이버전트>의 디스토피아적 미래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 대한 노골적인 패러디다. 플라톤은 시민들이 각자의 성향에 따라 직업을 갖고 정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때 조화롭고 평화로운 국가가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 국가는 크게 생산자, 수호자, 통치자의 세 부류로 나뉘어 구성된다. 이 세 부분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의 부류에 참견하지 않고 지배와 피지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정의가 실현된다.

영화의 5개 분파는 현대사회의 복잡성을 감안하여 플라톤의 세 카테고리를 좀 더 세분화시킨 것처럼 보인다. 평화를 사랑하며 식량 생산을 담당하는 '애머티', 흡사 성직자들을 떠오르게 할 만큼 이타심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통치자 집단 '애브니게이션', 언론처럼 진실에 목숨을 거는 '캔더', 용기의 덕목으로 무장하고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돈트리스', 그리고 지식과 권력을 연구하는 지성의 집단 '에러다이트'.

<다이버전트>에서는 누구든 16살이 될 때 성향 테스트를 거쳐 어느 분파에 속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한번 선택하면 절대 바꿀 수 없다. 설령 가족과 다른 분파에 속하게 된다 해도 생이별을 한 채 본인의 분파 구역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는 청소년기에 단 한번 일시적으로 부여될 뿐이다.

이렇듯 평화주의자들과 이타심으로 똘똘 뭉친 봉사자들이 있고 곧잘 바른말을 하는 언론이 시퍼렇게 살아있어도 <다이버전트>의 세계가 여전히 전체주의적인 이유는 그들에게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제거한 이타심과 평화, 진실에의 추구는 온정적 가부장주의의 허위의식에 다름 아니다.

극 중의 공식적 통치 집단은 애브니게이션이지만, 실질적으로 5개 분파의 시스템을 기획하고 통제하는 쪽은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의 면모를 보이는 에러다이트이다. 그들은 성향 테스트로 다섯 분파 중 하나로 분류할 수 없는 이들을 '다이버전트'로 정의하고는 발견되는 즉시 비밀리에 사살한다.

 영화 <다이버전트>의 한 장면.

영화 <다이버전트>의 한 장면. ⓒ 서밋 엔터테인먼트


주인공 트리스(쉐일리 우들리 분)도 이 '다이버전트'인데, 그래서 살해 위협에 시달리며 도망치게 된다. 에러다이트의 이러한 다이버전트를 향한 살해 욕구는 5개 분파 체제가 결국 자유와 적대적인 관계 위에 세워진 전체주의 시스템이라는 점을 좀 더 선명하게 증명한다.

인간이 자의적으로 설계해 놓은 체제 및 체계에 포착되지 않는다는 것은 투명하게 통제되지 않는다는 뜻이고,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유롭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는 한 작은 소녀에게마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과민하게 반응하는 에러다이트의 성질은 모든 독재적, 파쇼적 시스템들이 공유하는 체제의 속살이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체제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 다이버전트들을 숨겨주는 분파가 애브니게이션이라는 것이다. 애브니게이션도 전체주의 시스템의 한 축이기에, 다이버전트들이 늘어나 5개 분파가 와해되면 애브니게이션으로서도 기득권을 잃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을 숨겨주었던 이유는 애브니게이션이 가졌던 이타심, 휴머니즘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휴머니즘 덕에 5개 분파의 전체주의는 커다란 균열 속에서 붕괴의 조짐을 보인다.

다시 말해 애브니게이션은 자유에 대한 투철한 지향 없이도 자유의 확산에 무의식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휴머니즘과 자유는 별개의 개념이다. 하지만 상대 인간을 진정 인간으로 대우하고 존중하는 와중에 휴머니즘은 반드시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호의적인 관련을 맺고 자유의 확장과 진보를 지원하게 된다. 도저히 가두어 놓을 수 없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것을 따뜻하게 품고 지지하는 휴머니즘의 만남은 <다이버전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빼어난 주제의식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블로그 http://blog.naver.com/pellicks513 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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