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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사건' 이틀째인 17일 오후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세월호 침몰 사고 피해자 가족들이 실종자들의 무사귀환을 기다리고 있다.
▲ 무사귀환 염원하는 피해자 가족 '세월호 침몰사건' 이틀째인 17일 오후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세월호 침몰 사고 피해자 가족들이 실종자들의 무사귀환을 기다리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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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 호 선장

16일 아침 세월호 침몰사고 이후, 나라 안은 온통 사고 뉴스가 전 방송과 신문을 도배하고 있다. 아직 사고도 수습되지 않았고, 사고 원인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침묵으로 일관하기에는 몹시 답답하다. 오늘 세월호 선장 이 아무개가 관계기관에서 조사를 받으며 기자들의 질문에 실종자 가족에게 남긴 말이다.

"정말 죄송하고 면목이 없습니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사실 안전사고는 대부분 인재가 많은데, 사고란 불가항력적인 것도 있다. 선진국일수록 안전사고를 줄이고, 안전사고에 대한 만반의 사전 예방 조치를 강구하고 있다. 기자가 1990년 대 스위스 필라투스에서 등산열차를 탔을 때, 그들은 자기네 등산열차가 개통한 지 100년이 되었지만 단 한 건의 안전사고도 없었다고 자랑했다. 그곳 등산열차는 경사도 매우 심한, 대단히 위험한 열차임에도 100년 동안 단 한 건의 안전사고가 없었다는 것은 아마도 열차승무원 및 관계자들이 맡은 바 책임을 다한 결과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크고 작은 해난사고가 잇따라 일어났다. 대부분 승무원이나 관계기관의 안전 불감증으로 대형사고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때만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유야무야 흐지부지되곤 하다가 똑같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현실이다. 내가 오래전에 본 영화 <타이타닉 호>에서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이 자기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는 대목은 무척 감동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와 같은 강한 책임감이 대영제국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대형사고에는 그처럼 책임감을 통감하고 행동으로 보여준 귀감이 없기 때문에 더욱 비통함을 금할 수 없는 오늘이다. 나는 이번 세월호 선장의 모습에서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비밀 탈출 장면이 떠올랐다.

1950년 6월 25일

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38선 일대는 전날 밤부터 상공을 뒤덮은 검은 구름이 마침내 비를 뿌렸다. 미처 어둠이 가시지도 않은 이른 새벽 굵은 빗줄기가 가랑비로 변했다. 새벽 4시, 가랑비 속에 38선 전역에서는 갑자기 포성이 천둥처럼 울려퍼졌다. 하지만 그 시간 대부분 서울시민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뒤늦게 그 포성 소식에도 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 까닭은 이전부터 38선 일대에서는 소규모 군사 충돌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서울의 라디오방송은 국군의 승전보를 전했다.

그러나 그날 정오부터는 마이크를 단 군용 지프차가 거리를 질주하면서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 복귀하라"고 방송하자 그제야 서울시민들은 조금 동요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서울시민들은 38선에서 전면전이 일어난 줄은 대부분 까마득히 몰랐다. 대부분 서울시민들은 국군이 38선에서 인민군을 곧 물리칠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 이튿날인 6월 26일 오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국회에 출석하여 '서울 사수'를 공언한 다음, "이미 아군은 해주를 돌입하여 의정부 이북을 제압하고 있다. 명령만 내리면 사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호언장담하여 의원들에게 박수까지 받았다. 아울러 국방부 선무방송 지프차는 거리를 돌아다녔다.

"국군은 38선에서 적을 격파했다. 평양은 내일 중에 함락될 것이다. 서울시민들은 안심하라."

하지만 전선의 실제 상황은 이와는 전혀 달랐다. 인민군은 국군을 매섭게 몰아붙이면서 서울을 주방향으로 거침없이 진격해왔다. 6월 25일 낮에는 인민군 야크기 2대가 서울 상공에 날아와 근교 비행장을 공습하고 돌아갔다. 6월 26일에는 동두천, 포천, 의정부, 춘천, 강릉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그날 밤에는 이미 의정부를 점령한 인민군은 곧 서울에 진주할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대부분 서울시민들은 실제 전황을 전혀 모른 채 정부와 군의 승전 보도에 안심하고 있었다.

1950. 8. 15. 대구,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내고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던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1950. 8. 15. 대구,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내고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던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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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새벽 탈출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 2시에 경무대를 몰래 빠져나와 대전으로 갔다. 그 시간 인민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의정부에서 서울로 남하하고 있었다. 국군은 대전차포와 바주카포로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했으나 역부족이었다.

6월 27일 국회에서 서울 사수를 결의한 의원들이 경무대를 방문했을 때 "대통령께서는 이미 서울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의원들은 참담하게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떠난 뒤인 6월 27일 밤에도 서울중앙방송국에서는'서울 사수'를 호소하는 대통령의 목소리가 전국에 울려 퍼졌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 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네다."

이 방송은 대전방송국에서 전화로 보낸 녹음 방송으로, 마치 이 대통령이 서울에서 방송하는 것처럼 내보냈다. 하지만 이 방송에도 일부 시민들은 전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서는 밤늦게 봇짐을 싸들고 한강인도교로 향했다.

하지만 그 몇 시간 뒤인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커다란 폭음과 함께 한강다리가 끊어졌다. 이 폭파로 한강 일대는 아수라장이었다. 그 시각 서울 미아리고개 일대 시민들은 인민군이 몰고 내려온 소련제 탱크 캐터필러의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서울시민들은 그제야 전면전임을 알고는 피난을 서둘렀지만 이미 한강다리가 폭파된 뒤라 속수무책이었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위기의 순간에도 안산 단원고 학생들은 "움직이지 말고 객실에 대기하라"는 선내 안내방송만 믿다가 더 큰 변고를 당한 것 같아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을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으로 받들고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 100만 시민을 팽개친 채 자기만 살겠다고 수도 서울을 몰래 떠난 것은 두고두고 비난받아야할 작태다.

더욱이 당신은 피난을 하고서도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네다"라는 거짓말 방송을 하였기에 많은 시민들은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적치하에서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이제 우리 사회가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당신만 살아난 공직자를 매도시키는 성숙한 자세를 보일 때, 우리나라가 한 걸음 더 앞서 나가지 않을까?

소 잃고 외양간을 고쳐야 다시 소를 잃지 않을 것이다.


태그:#세월호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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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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