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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다. M씨는 한숨을 쉰다. 거리에는 벚꽃이 흐드러졌고 봄바람에 만개한 라일락 향기가 넘실거린다. 그리고 이사철이 돌아왔다. 두 달 전, 계약 만기를 앞두고 휴대전화에 집주인 이름이 떴을 때 M씨는 직감했다. 예상대로 집주인은 전세금 3000만 원을 올려주거나 월세를 추가로 내달라고 했다.

봄이 왔다. 그러나 M씨는 한숨을 쉰다. 집주인의 전화, 바야흐로 이사철이 왔다.
 봄이 왔다. 그러나 M씨는 한숨을 쉰다. 집주인의 전화, 바야흐로 이사철이 왔다.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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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살 여성 M씨는 친구와 함께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다세대 주택에 전세로 살고 있다. 은평구에 살기 시작한 것도, 친구와 함께 살기 시작한 것도 시작은 '집' 때문이었다. 20대 중반에 독립한 후, 비에 젖고 눈물에 젖는 장마철의 반지하와 겨울이면 밤마다 자기 입김에 코가 시리던 옥탑방을 거친 뒤, M씨가 찾아낸 답은 친구와 돈을 합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집세가 싸다는 은평구에 전세를 얻었다. 그렇게 4년을 무사히 버텼다. 하지만 이제 또 어쩔 것인가. 

M씨나 친구나 뻔한 형편이다. 전세금을 올려주기도 월세를 부담하기도 어려운 그런 형편 말이다. '결국 다시 이사를 가야하나?' 싶었는데, 알아본 전월세 시세는 집주인의 전화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지금 같은 집을 구하려면 이사를 가더라도 전세금을 올려주거나 월세를 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결로에 곰팡이에 간섭 많은 집 주인까지, 힘든 부분들이 있긴 해도 지금 집은 반지하나 옥탑이 아닌 2층에 방 두 개짜리 집이다. 그런데 이 전세금으로는 다시 반지하나 옥탑방밖에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또 어쩔 것인가.

LH공사를 클릭하자, 가산점의 세계가 열렸다

LH주택공사 홈페이지 첫 화면.
 LH주택공사 홈페이지 첫 화면.
ⓒ LH주택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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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 손 벌릴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랬다간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잘 안다. "그러니까 얼른 결혼을 해야…!" 로 시작하는 그 이야기. 집 때문에 갑자기 결혼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더구나 M씨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 친구도 마찬가지라서 의기투합한 후로는 같이 나이 들어갈 마음을 먹고 가족으로 지내고 있다. 혹시나 싶어 부동산 사이트를 헤매던 M씨 앞에 눈이 번쩍 뜨이는 뉴스가 보였다.

"LH, 전세임대 2만여가구 공급…서민주거안정 지원"

살 집을 고르면 공공주택기금으로 정부가 전세계약을 대신 해주고 세입자는 저렴한 월임대료만 내면 되는 제도였다. 이런 제도가 있었다니, 오마이갓! 당장 공고를 보러 갔다.

전세임대주택은 저소득계층 주거안정을 위해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시행하는 주거 복지제도이다
▲ LH공사 전세임대주택 모집공고 전세임대주택은 저소득계층 주거안정을 위해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시행하는 주거 복지제도이다
ⓒ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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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 자격조건이 있다. 1순위 기초생활수급자, 2순위 도시근로자월평균소득 50% 이하. M씨는 2순위 당첨이다. 확인차 LH공사에 득달같이 전화를 해봤다.

"전세임대주택 공고 보고 전화 드렸는데요. 이게 그냥 사이트에서 신청만 하면 되는 건가요?"
"신청하시면 심사를 해서 연락을 드려요. 1순위자세요?"
"그렇지는 않은데, 2순위 소득기준은 맞거든요."
"신청은 하실 수 있는데, 대부분 1순위자로 마감돼요. 1순위 신청 받고 남아야 2순위 신청을 받습니다. 혹시 세대원이 있으세요?"
"…없는데요."
"2순위 모집을 하게 되더라도 세대원이 있어야 가능성이 있어요. 가산점이 있어야 유리하거든요."

M씨는 친구와 같이 산다. 하지만 법적으로 서로의 세대원은 아니다. 서로를 가족으로 의지하며 살 계획이지만, 통계상으로는 그저 각자 1인 가구일 뿐이다. M씨는 가산점을 받을 수 없다. 결국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이야기다.

부양가족의 수가 많을 수록 가산점이 높다
▲ 전세임대주택 우선순위 결정 조건 부양가족의 수가 많을 수록 가산점이 높다
ⓒ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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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공고만 쳐다보다 말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떡 하니 보이는 '신혼부부 3천호'. 자세히 보니 신혼부부는 아예 할당이 따로 있다. 둘이 사는 건 똑같은데 결혼이냐 아니냐에 따라 복지제도가 달라진다? 뭔가 이상하다.

신혼부부를 위한 주거 복지 제도가 있는 건, 아마 '부모님 집에서 독립해서 살 집'을 마련하는 걸 그 시기의 중요한 과제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과제인 건 M씨도 마찬가지다.

다만 다른 점은 결혼 여부인데, 그 차이 때문에 당장의 집 문제에 대한 답이 하나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뭔가 화가 난다. 사실 눈물이 난다. 휴대전화가 울린다. 집주인 이름이 뜨는 걸 보니 이사 갈지 말지 알려달라는 재촉 전화가 분명하다. 이제 또 어쩔 것인가.

그날 밤, M씨는 답답한 마음에 블로그에 주절 주절 글을 썼다. 제목은 'LH공사 전세임대주택 공지 뜬 날, M씨의 신청 좌절기'. 전세임대주택 신청 시즌이라 검색을 많이 하는지 글을 올린 뒤 블로그 방문자 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그리고 댓글이 하나 둘 달리기 시작했다. '나랑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 많나…?' 그런데 클릭을 해 보니…. 

"전 지금 신혼부부 전세금 받고 있습니다 그거 받기 너무 힘들고 까다로워요. 받고나서도 다 끝나는 게 아니더라고요. 2년 뒤 재계약 할 때 재심사 한다는 거 저 오늘 알았네요 --"

"신혼부부는 따로 있어야 돼요. ㅠㅠ 화가 날 게 아니에요. 신혼부부라고해도 1순위 되려면 혼인신고한 지 3년 이내여야 되고 자녀도 있어야 돼요. 그리고 한 달 소득이 부부 둘 합쳐도 200만 원 남짓 이하여야 됩니다. 신혼부부 둘의 보금자리가 아니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 신청하는 거예요. 자식 셋에 남편 월급 200만 원 아내는 주부, 이런 분들이 많이 신청합니다. 웬만큼 형편 어려운 거 아니곤 당첨되기 힘들어요. 더 어려운 사람들 지원해 주는 건데 내가 안 되니까 제도의 모든 것을 지적하시는 분들 많던데 참 안타깝네요."

고생을 경쟁해야 하는 사회

국가가 좁은 문만 열어 두었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다투게 되고, 어려움을 경쟁하게 된다.
 국가가 좁은 문만 열어 두었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다투게 되고, 어려움을 경쟁하게 된다.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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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씨는 어리둥절했다.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정된 자원으로 복지 제도를 운영할 때 소득이 더 적은 사람, 가족 더 많은 사람이 우선순위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가족'으로 결혼한 관계만을 인정하는 건 M씨 같은 사람에겐 당연히 억울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M씨의 '억울하다'에 '나도 힘들다. (그러니까 억울해 마라)'는 댓글들이 달렸다. M씨가 억울한 이유는 전해지지 않았고, 그저 모두 힘들 뿐이다.

결국 문제는 '너무 적은 양'이라고 M씨는 생각했다. 댓글을 남긴 이들도 집 때문에 고생스럽기는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다. 고생스런 M씨와 고생스런 이 사람들이 '내가 더 힘들다'고 호소하고 있는 이 분위기. 이건 애초에 전세임대주택 지원 대상이 적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국가가 좁은 문만 열어 두었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다투게 되고, 어려움을 경쟁하게 된다. 그 경쟁이 만들어내는 팍팍한 공기 안에는 M씨가 말하고 싶었던 결혼 하지 않아도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 주거 복지 제도에서 혼인 여부로 인해 차별 받지 않을 권리 같은 것은 낄 자리가 없다.     

전세임대주택에 대한 마음을 접은 M씨는 요즘 국민주택기금의 근로자 서민 전세 대출을 알아보고 있다. 반지하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다. 빚을 내서 집을 유지한다는 게 마음이 영 불편하긴 하다. 소득이 얼마 안 돼서 대출 한도도 높지는 않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도 또 이렇게 한 고비를 넘길 수 있는 게 어딘가.  하지만 이 다음엔, 또 어쩔 것인가.

* 바람 잘 날 없는 우리들의 집 이야기. 한국여성민우회는 2014년 '무엇이 지금 우리의 집 문제인지', '그 집 문제가 왜 중요한지'를 이야기하고, 대안을 찾는 활동을 합니다. 그 시작으로 4~5월에 걸쳐 <나의 집 이야기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 <대안적 최저주거기준>, <세입자 주거 인권 가이드북>도 기대해주세요!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 (http://womenlink1987.tistory.com/558)에 게시된 'LH공사 전세임대주택 공지 뜬 날, M씨의 신청 좌절기'와 게시물에 달린 댓글을 기사로 각색한 것입니다.



태그:#한국여성민우회, #민우회, #전세임대주택, #전세, #주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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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회는 1987년 태어나 세상의 색깔들이 다채롭다는 것, 사람들의 생각들이 다양하다는 것, 그 사실이 만들어내는 두근두근한 가능성을 안고, 차별 없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상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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