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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무명옷을 입은 사내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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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터오는 새벽빛을 받으며 두 필의 말이 힘차게 벌판을 달려가고 있다. 너른 습지를 달리는 말들의 목은 망토를 두른 것처럼 갈기가 곤두서 있다. 바람 한 점 없는데 갈기가 곤두설 만큼 빨리 달릴 수 있는 말은 흔치 않다. 관도를 비껴나 소로와 습지를 골라서 가다보니 생각만큼 멀리 가진 못했지만 그래도 천산의 야생마가 지칠 줄 모르고 달려준 덕분에 소주에서 천리 길 이상은 떨어진 것 같았다.

혁련지가 생각했을 때 금릉을 우회하여 장강을 건넌 후 하루가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회하(淮河)를 건널 나루나 진(津)이 나와야 했다. 휘주(徽州)의 몽성현(蒙城縣) 어디쯤으로 짐작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지난밤에는 준비해간 침구로 야영을 했다. 무공을 수련하던 아미산 시절 이후 실로 6년 만에 한데서 잠을 청했다.

자신보다도 서생인 관조운이 더 염려스러웠으나 그는 남자의 객기 때문인지 아니면 유생들 특유의 체면 때문인지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얌전히 자리 속으로 들어갔다. 가끔씩 터져나오는 에헴, 하는 헛기침 속에 야영의 불편과 과거 자신과의 연민에 대한 회한과 불쑥 솟아나는 남성적 충동, 이 모두 담아 뱉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런 관조운을 바라보며 혁련지는 미련스런 사람 같으니, 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숨기며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유성이 하나 꼬리를 길게 달고 서쪽의 천랑좌를 관통하고 있다.

아침 해가 멀리 능선에 자두만큼 솟아오를 무렵이 되자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우마가 다니는 길에 봇짐을 진 사람들이 다닌다는 것은 관도가 가깝거나 고을이 있다는 징조다. 계속 산길이나 소로만으로 다닐 수 없어 관조운과 혁련지는 관도로 달리기로 했다. 관에서 관으로 이어지는 수배령보다 빨리 달리는 게 차라리 안전하겠다는 혁련지의 의견에 따라서였다. 

관도로 달리자 사람들이 점점 붐비더니 멀리 제법 큰 고을이 보였다. 관도의 양옆에 수신(水神) 하백(河伯)을 조악하게 세운 목상의 몸통에 몽성현 구문진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회하를 건너려면 이곳 나루에서 건너는 게 가장 빨랐으나 포리(捕吏)나 관군의 기찰이 있을지도 몰랐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말의 속도를 줄이고 서서히 사람들의 물결 속으로 들어갔다. 구문진은 회하를 건너는 요충지라 그런지 아침나절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붐볐고 배들도 많았다. 그들은 나루가 보이는 객잔 이층에 올라 아침을 주문했다. 나룻배를 대고 배에 짐을 싣는 선착장 입구에 관군 둘이 서 있었다. 그들은 용모파기를 들고 오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대조하며 새우눈을 만들었다, 가재미눈을 만들었다 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곳 나루에서 건널 순 없겠어요."

혁련지가 싸구려 계사면(鷄絲麪)을 한 젓가락 집으며 말했다.

"이곳을 우회하자면 이제 남쪽으로 가야할 텐데. 그러면 정주와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 아냐?, 사매."

관조운이 만두를 하나 입에 넣으며 말했다.

"아녜요. 여기 번창한 나루를 조금 벗어나면 어부들의 조각배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아니면 마을 사람들을 건네주는 사공들을 만나거나. 어쨌든 관아의 수배령이 이곳까지 전달된 것이 확인 된 이상 발각될 줄 뻔히 알면서 건널 순 없으니까요."

관조운과 혁련지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객잔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강변을 따라 반 시진 정도 말을 달렸다. 회하가 큰 굽이로 돌아가며 강폭이 줄어드는 곳이 나타났다. 강변으로 가니 웬 사공이 방갓을 덮어쓴 채 뱃전에 늘어지게 누워 있다. 관조운이 가까이 다가가 사공에게 인기척을 했다.

"이보오, 사공. 강을 건너려 하는데 지금 가능하겠소."

사공이 방갓을 올리며 천천히 일어났다.

"사람은 한 명 당 두닢이고, 말은 한 필 당 다섯닢이오."

늙수그레한 사공이 듬성듬성 빠진 이빨 틈새로 금액을 정확하게 얘기했다.

"좋소, 당장 출발합시다."
"아니오. 사람들이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두 분만 태우고 갔다가는 이 몸이 회하 용왕님의 노여움을 피하려고 용쓴 값도 안 나오죠. 헤헤."

늙은 사공은 일행의 바쁨을 눈치 챘는지 능청스럽게 딴전을 피웠다.

"얼마면 이 배가 당장 움직이겠소."
혁련지가 살짝 솟아오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이 배가 겉보기엔 자그마해 보여도 실제로 사람을 태우면 열댓 명은 낙낙히 태웁죠. 두 당 두닢 씩만 받아도 석냥은 넘어가는데, 두 분이 당장 건너시겠다면 두 냥 다섯 닢으로 건네드리죠. 아, 회하 용왕님도 아침부터 급한 사람한테까지 심술을 부릴라굽쇼, 지가 알아서 어련히 건네드립갑쇼. 헤헤"

늙은 사공은 헤헤거리면서도 노를 물속에 담그지 않았다. 적어도 금액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좋아요, 지금 당장 출발해요."

사공은 노를 강물에 담그고 널빤지를 이물에 연결해 말들이 올라올 수 있도록 했다.

회하의 강바람을 맞으며 건너편에 도착하자 사공에게 배삯을 건넨 관조운과 혁련지는 말에 올라타기가 무섭게 북쪽으로 달렸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늙은 뱃사공이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어젯밤 포졸을 거느린 포두가 나타나서 뱃사공들에게 하나씩 준 방문이다. 포두는 이들이 나루에서 배를 타지 않고 한적한 곳에서 뱃사공들에게 건네달라고 할 가능성이 크니 수배령이 내려진 남녀를 보면 필히 신고하라고 했다. 포상이랬자 좁쌀 가루 서너 되쯤 되겠지만, 그까짓 포상보다는 신고를 하지 않을 경우 있을지도 모를 뒤탈 때문이라도 포두에게 알려야 했다. 사공은 바쁠 것 없이 느긋하게 건너편으로 돌아왔다. 아무렴 어때 아침부터 두둑하게 벌었는데. 사공은 용모파기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포졸이 있는 구문진을 향해 걸어갔다. 

휘주의 몽성현에서 회하를 건넜으니 이제 큰 장애물은 없는 편이었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더해 박주(亳州)를 우회하여 다시 관도에 들어섰다. 박주 외곽에 있는 관도의 길목에 관병들이 길을 막고 검문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관조운이 급히 고삐를 당기자 말이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히이잉 하며 하늘 높이 발을 쳐들었다.

뒤따르던 혁련지의 말도 놀라서 말굽을 쳐들고는 마성(馬聲)을 지르자 소리가 울려퍼졌다. 삼십 여장 밖에서 검문을 하던 관병들이 이 모습을 보며 쑥덕거리더니 그 중 세 명이 말에 올라탔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말머리를 다시 돌려 관도로 달렸다. 뒤에서 세 명의 관병이 말을 끌고 쫓아오고 있다. 관조운과 혁련지가 가는 방향이 오히려 박주로 들어가는 길이 되고 말았다. 이대로 간다면 박주 성으로 향하는 꼴이다.

중간에 소로로 들어가 우회를 하려했으나 급한 발길에 소로를 찾을 여유가 없다. 말이 빨라 잡힐 염려는 없으나 박주 성안으로 들어가면 독안에 든 쥐꼴이 되고 만다. 주위에는 야트막한 야산이 듬성듬성 보이고 그 주위는 모두 논이다. 달리 몸을 숨길만한 숲이나 산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야산을 도는데 돌연 사람이 나타났다. 아니 나타났다기 보다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던 모양새다. 급한 발말굽 소리가 세차게 들려왔을 터인데 비켜나지 않고 길을 가로막고 있다. 길을 막은 자는 키가 크고 몸집이 단단해 보였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암청색 경장에 무명으로 만든 배자를 걸치고 검은 두건을 쓰고 있다. 두건 밑으로 두 눈만 배꼼이 드러낸 채 나머지 얼굴을 무명천으로 가렸다.

관조운이 급히 고삐를 당기자 말이 또 한번 놀라며 하늘 높이 말굽을 쳐들었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말이 갑자기 서자 관조운은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혁련지도 얼굴에 놀란 빛을 감추지 못하며 겨우 말을 세웠다.

"말이 달리고 있는데 길 한가운데 서 있으면 어떡해욧! 말굽에 채이면 어쩌려구요."
혁련지가 무명배자를 입은 자를 향해 고성을 질렀다.

무명 배자 사내는 아무런 말이 없이 허리에서 칼을 뽑았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뜨끔했다. 이 자는 길목을 지키는 관군인가. 그러나 사내는 검을 손에 쥐긴 했으나 특별히 공격 자세를 취하진 않았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마주 보았다. 이 자의 의도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길을 막고 검까지 뽑은 것은 분명 적대적인 행동이지만 공격 자세를 취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사형, 그냥 돌파해욧."

혁련지가 등에서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관조운도 그 말에 동조해 말고삐를 당겼다. 히이잉, 한혈마가 다시 마성을 지르며 앞발을 들며 질주 본능을 드러냈다. 그들을 추격하는 관병들의 말발굽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언덕의 모퉁이 하나만 돌면 따라잡힐 거리다.

관조운과 혁련지가 앞을 향해 달려가자 웬일인지 무명배자 사내는 옆으로 한 발 물러서며 길을 비켜 주었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의아해 하며 그를 통과했다. 아마 그가 막고자 하는 대상이 관조운 일행이 아닌 관병들인 모양이다.

관조운과 혁련지를 보내고 나자 무명배자 사내는 검을 쥐고 무검사적세(撫劍伺賊勢)를 취하며 관병들을 기다렸다. 막 모퉁이를 돈 관병들은 웬 자가 길을 막고는 검을 겨누자 급작스레 말을 멈췄다.

"우리는 휘주부 박주현의 관군이다. 길을 비켜라."앞에서 선 관병의 우두머리가 소리를 쳤으나 사내는 꼼짝하지 않았다."
"지금 죄인들을 쫓고 있는데 이자도 한 패인 모양이구나. 이봐라, 이놈부터 잡아 들여라."

우두머리가 말에서 내리며 소리치자. 나머지 두 관병들도 말에서 내렸다. 우두머리가 환도를 허리에서 꺼내자, 두 관병도 장창을 꺼내 사내에게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월, 목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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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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