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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대전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북 추정 무인기와 부품들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사진은 배터리.
 11일 대전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북 추정 무인기와 부품들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사진은 배터리.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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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백령도, 삼척 등 전국 각지에서 발견된 무인기 문제로 정국이 시끄럽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인터넷에는 군사 목적을 위한 무인기에 보급형 DSLR이 사용된 것에 대한 의문부터 엔진에서 연료 연소 시 나오는 검댕이 기체에 묻지 않아 실제 비행했던 것이 아니지 않으냐는 RC 마니아들의 주장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잠시 각종 문서(Document)를 검색·관리하기 위한 전산업에 종사했고, 이후 각종 폰트와 각종 문서 형식에 관심이 있는 필자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배터리에 붙여진 라벨이었다.

국방부는 지난 3일 파주 추락 무인기 배터리에 '날자'라는 글자가 포함된 라벨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당시 국방부는 남한에서 사용하는 '날짜'와 표기법이 다른 '날자'가 북한 사전에 등재된 표현으로 이것이 무인기가 북한에서 왔다는 증거라고 밝힌 바 있다.

문서가 증거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원칙

과연 그럴까? 간단한 가정을 해보자. 만약 배터리에 아랍어로 날짜에 해당하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으면, 이건 '알 카에다'의 소행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까? 그것이 성립하려면 문서 보안의 기본 원칙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서 관리 측면에서 보면 날짜가 쓰여진 이 라벨도 일종의 문서다. 이 문서가 증거로 채택되기 위해서는 유일성(Unique)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다른 복제품이 있어서 안 되며, 설사 있더라도 그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문서보안에서는 다른 사람이 만들 수 없는 위조불가(unforgeable), 자신이 서명(혹은 작성)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도록 하는 부인 방지(non-repudiation), 문서 내용을 인증(authentic)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군사용 무인기, 그것도 외신들이 '장난감'이라고 폄하하고 있는 무인기 배터리 라벨에서 이런 원칙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 무리다. 하지만 무인기에 포함된 다른 문서들은 그런 정보를 갖고 있다. 카메라 제조 일련번호가 대표적이다.

카메라 제조 일련번호는 제조사에서 발행하는 유일한 번호이며, 이를 변경할 경우 흔적이 남을 뿐더러 제조사를 통해 생산일시, 판매경로 등 정보를 자세히 알 수 있다. DSLR 마니아들이 국방부에 카메라 일련번호를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특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터리 라벨은 이러한 기능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기용날자'가 한컴 바탕체일까? 글쎄?

그럼 배터리 라벨은 아무 정보도 갖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는 않다. 서체(폰트)에는 많은 정보가 숨어 있다. 하지만 인터넷상에 떠도는 이야기처럼 과연 '기용날자'는 한컴바탕체로 만들어진 글자일까? 안타깝게도 현재 언론에 보도된 크기의 사진으로는 '기용날자'의 서체를 알기 어렵다.

무인기 배터리 라벨에 붙은 '기용날자'와 여러 가지 폰트 비교
 무인기 배터리 라벨에 붙은 '기용날자'와 여러 가지 폰트 비교
ⓒ 이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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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논란이 되는 한컴 바탕·마이크로소프트의 바탕체·신명조를 비교한 것이다. 3가지 폰트는 모두 비슷한 모양을 갖고 있다. 실제 프린터로 3가지 글자를 크게 출력해서 겹쳐 보면 획의 마지막 삐침 각도만 약간 다를 뿐 사실상 동일 글자임을 알 수 있다. 이중 바탕체는 한컴사의 한글프로그램이 없더라도 한글 윈도를 사용하면 자동 설치되는 프로그램이다. 즉, 한컴과 상관없는 글자다.

문서 편집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나라의 폰트가 너무나 단순하고 비슷한 것에 실망할 것이다. 특히 수백 년에 걸쳐 다양한 폰트를 다듬어 온 영어권에 비해 우리의 폰트는 '명조체'와 '고딕체'를 제외한 다양성에서 부족함이 많다. 비슷한 복제를 반복해 온 한국 폰트 제작사를 생각할 때, 해상도 낮은 배터리 사진만을 갖고 정확히 어떤 폰트를 썼는지 구분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차이 알려면 한자를 비교해야

무인기 배터리 라벨에 붙은 '계용'의 한자 폰트 비교
 무인기 배터리 라벨에 붙은 '계용'의 한자 폰트 비교
ⓒ 이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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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배터리 라벨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이것이 전부인가? 그렇지 않다. 언론에서 많이 조명을 받지는 못했지만, 한글로 쓰여진 '기용날자' 뒷면에는 한자로 씌여진 '계용일기'라는 라벨이 하나 더 있다. 그냥 중국어라고만 하고 넘어갔지만, 이중 '열 계'자는 한국에서는 쓰지 않는 중국어 간자체다.

한국의 워드프로세서에서는 한글로 '계'를 입력한 뒤 한자변환을 통해 입력하게 되는데, 이 경우 글자는 啓(계)가 된다. 하지만 중국어 자판(중국어 간체)을 이용해서 'qi'를 입력한 후 한자를 찾으면 启(계)를 제대로 입력할 수 있다.

이는 한자 음으로는 같은 '계'자이지만, 한글 프로그램이 처리하는 문자코드 상으로는 중국어 '启'와 한국어에서 사용하는 한자 '啓(계)'가 완전히 다른 글자이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문제는 한컴바탕체로는 중국어로 입력하든 한국어로 입력하든 이와 같은 글자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启(계)의 중국어 간체 모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계(启) 자를 입력할 수는 없을까? 가능하다. 한글 프로그램은 한글 97 이전까지 중국어 간자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어 간자를 입력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편법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간자'폰트다. 즉, 한국어로 '계'를 입력해서 한자로 바꾼 후 폰트만 '신명조 간자'를 선택하면 간자로 바뀐 글자가 보인다.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이런 식으로 열심히 중국어를 입력했다가 편집과정에서 모두 글자가 바뀌어 당황했던 경험을 가진 이들이 종종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억지로 이 글자를 입력할 수는 있겠지만, 일반적인 중국어를 쓰는 사람이라면 택하지 않을 방법이다.

어쨌든 이 라벨을 인쇄한 사람은 애초 '한글'로 내용을 적을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어'로 글자를 입력하고 싶은 생각이었고, 중국어를 자세히는 몰라도 최소한 간체와 번체의 차이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중국어 폰트일 가능성은 없나?

그럼 다른 가능성은 없나? 아예 한컴이 제공하지 않는 중국어 폰트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는 한 가지 가정이 필요하다. 전문적으로 디자인하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대부분 일반인들은 새로 폰트를 설치해서 글을 쓰지 않는다. 특히 무인기 배터리 라벨처럼 실용적인 라벨에 특별한 폰트를 쓸 가능성은 높지 않다.

무인기 배터리 라벨에 붙은 한자 '계용'과 중국어 서체 비교
 무인기 배터리 라벨에 붙은 한자 '계용'과 중국어 서체 비교
ⓒ 이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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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정하에 일차적으로 볼 폰트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제공하는 한자 폰트다. 윈도 시스템을 만든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한글 글꼴이 들어 있는 바탕체, 맑은고딕 이외에도 몇 가지 외국어 폰트를 배포하고 있다. 일본어 폰트인 MS Mincho, 중국어 폰트인 MingLiU, Simsun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중국어를 할 줄 알고 그것으로 글자를 썼다면 이런 폰트를 썼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 폰트로 계용(启用)을 써서 비교해 보면, 신명조 간자, MingLiU HKSCS(MingLiU의 광둥어 버전)이나 Simsun이 비슷함을 알 수 있다. 다만 MingLiU HKSCS의 경우, 엄호와 입구의 위치가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데, 언론 보도 사진과 비교하면 일부 차이가 나타나기는 한다. 이러한 차이나 비교는 원본을 갖고 있는 국방부가 더 정밀한 사진 자료들을 공개하면 손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것을 종합해 봤을 때, 이 라벨을 제작한 사람은 간체와 번체의 구분을 이해하고 있으며, 중국어를 입력하려는 목적으로 한컴의 신명조 간자나 마이크로소프트의 Simsun, MingLiU_HKSCS 등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낮은 해상도의 사진을 바탕으로 얻어낸 추정이어서 더 자세한 것은 국방부가 정부를 제공하거나 폰트 전문가, 워드프로세서 관련 업체의 협조를 얻어 내용을 파악하여 공개하는 것이 불필요한 논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무인기 출처를 말해주지 못하는 배터리 라벨

무인기 배터리 라벨은 인터넷상뿐만아니라 정치권에서도 주요한 논점이 된 바 있다. 하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측이나 이에 대응하는 측 모두 어떤 객관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정치 논박만 반복하고 있다.

필자는 이 무인기의 출처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이 라벨의 정보만 갖고 이것이 북한에서 만들었다는 근거는 찾기 힘들다. 불법 소프트웨어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한컴의 한글 프로그램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워드(Word)는 인터넷에서 누구나 다운 받을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누구나 다양한 글자를 출력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라벨은 증거로서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다만 몇 가지 정보를 분석해 볼 때 중국어에 대한 기초 상식을 가진 이라는 정도이다. 이 사람은 중국의 조선족 동포를 포함한 중국사람일 수도 있고, 북한, 한국 혹은 제3국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무인기 출처의 결정적 증거인양 표현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북한에서 왔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증거가 필요하다. 국방부가 무인기를 둘러싼 이런저런 논란 때문에 국론이 분열될 것을 우려한다면, 하루 빨리 각종 의혹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고 이런 의혹을 없애야 할 것이다. 또한 오래 전 현업을 떠나 이제는 문서 마니아인 필자 같은 이들이 아니라 현업의 전문가들이 이러한 논쟁을 잠재워 줘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헌석 기자는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로 일하고 있다.



태그:#무인기, #무인항공기, #배터리 라벨, #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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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정의행동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에너지,기후변화,탈핵발전 분야에 관심이 많으며, 녹색정치와 진보정치 그리고 환경정의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 환경단체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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