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40년전, 어느 시골 초등학교 여자 졸업생 이름
 40년전, 어느 시골 초등학교 여자 졸업생 이름
ⓒ 송준호

관련사진보기


이순자, 김옥숙, 손명순, 이희호, 권양숙, 김윤옥…. 1980년대 이후 역대 영부인들의 이름을 순서대로 열거하면 이렇다.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를 제외하면 이름의 끝 글자가 '자', '숙', '순', '옥' 중 하나다. 어쩌자고 영부인들의 이름이 이렇게 촌스러울까. 하긴 장차 귀하신 분이 될 줄을 그 부친들께서 어찌 알았으랴. 

아들만 귀하게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딸을 낳은 마나님은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죄인 취급까지 받았다. 줄줄이 낳았다가 박복한 여자라고 쫓겨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딸자식은 이름도 대충 지었다. '김끝순' 같은 이름도 그 시절에는 흔했다. '박딸고만'이라는 이름도 들은 적 있다. 딸로는 너로 마지막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기생들 이름에는 '월(月)'을 주로 썼다. '산월'이니 '유월'이니 '명월'이니 하는 이름이 그런 예다. '향(香)'도 마찬가지였다. '춘향'이가 대표적이다. 물론 그 몸종이었던 향단이는 빼고다.

앞서 보았던 영부인들의 '자', '숙', '순', '옥'에 '희', '애', '이', '임'을 더해 보자. 이 여덟 글자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여자들 이름 끝 글자로 과거에는 대단히 즐겨 썼던 글자인데 요즘에는 좀처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이…, 설마라고? 믿지 못하겠다고? 여기 그 증거가 있다. 그림은 지금부터 대략 40년 전인 1973년 2월에 어느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한 여학생들만 따로 정리한 135명의 명단이다. 거기 적힌 이름을 하나씩 읽어보면 앞서 언급했던 여덟 글자를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순서대로 정리하면 이렇다.

이름 끝 글자로 '자'를 쓴 이들은 구평자와 김대자를 비롯해서 모두 21명이다. 135명 중 무려 16%에 달한다. 여자들 이름 끝에 습관적으로 쓴 '자(子)'는 이웃 섬나라 사람들의 작명법이라는 게 정설이다. '하나꼬'니 '미찌꼬'니 하는 바로 그 '-꼬' 말이다. 그런데 '김대자(金代子)'는 또 뭔가. 다음에는 아들 하나 쑥 낳자는 뜻인가. 

'순(順)'도 김진순, 전태순 등 17명으로 13%다. 가운데 글자로 '순'을 쓴 이름도 13명이나 된다. 둘을 합치면 '자'와 쌍벽을 이룬다. '숙(淑)'은 모두 14명이고, '희(姬)'를 쓴 이름으로는 김복희를 합해서 10명이다. '김복희'의 '희(熙)' 한 사람을 제외하면 '자(子)', '순(順)', '숙(淑)', '희(姬)' 모두 한자까지 똑같다. 

이 네 글자를 이름의 끝 글자로 쓴 여학생이 모두 62명이다. 전체의 46%에 이른다. 당시 여자들은 열 명 중 거의 절반에 해당되는 이름이 끝 글자로 '자', '순', '숙', '희' 넷 중 하나를 썼던 것이다. 이들보다 한 세대쯤 앞서 태어났으니 영부인들이라고 예외가 아닐 수밖에…. 물론 '옥', '애', '이', '임'의 비율도 만만치 않다. 이 넷도 각각 6명에서 8명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이 여덟 글자를 쓴 여학생들의 수를 모두 합치면 90명이다. 전체 135명 중 무려 67%다. 1960년 전후에 태어나서 1973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해서 중학교에 입학했고, 지금 50대 중반이 된 여자들은 세 명 중 두 명이 이름에 이 여덟 글자 중 하나를 썼던 것이다. 물론 이름 가운데 글자까지 합치면 네 명 중 세 명꼴로 비중이 훨씬 커진다. 여자들 이름 짓기가 참으로 수월했던 시절이었다.

농촌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집안 논밭 일을 거들어가며 성장했던, 그림 속 초등학교 여자 졸업생 135명의 이름을 하나씩 짚어가며 다시 읽어보라. 혹시 그 많은 여자들 이름 중에 자신의 딸에게 선뜻 붙여주고 싶은 게 있는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시골 아이들이어서 그러는 거라고? 도시에서는 달랐을 거라고? 과연 그럴까? 1960년대 우리나라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소위 원조 여배우 트로이카는 남정임, 문희, 윤정희다. 1970년대의 2세대 트로이카는 유지인, 장미희, 정윤희다. 앞서의 '촌스런' 여덟 글자가 이름에 들어 있지 않은 여배우는 유지인 하나뿐이다. 그나마 본명은 이윤희라고 하니 그 정도면 말 다한 거 아닌가.

참고로 2012년 2월에 바로 그 초등학교를 졸업한 여학생들 이름을 찾아보았다. 그 해에 졸업한 여학생 수는 모두 33명으로 줄었다. 물론 농촌 지역 인구 감소 탓일 것이다. 어떻게 변했는지 보자.

곽서진 김가혜 김소원 김하늘 노수아 남규린 박예담 박진혜 방효진 배윤아 변혜영 서수현
서지혜 성은빛 손예나 송아현 신가혜 신소미 양서연 오은서 왕나연 원세은 이소희 이하은
임하늘 장다운 장아름 장은혜 조나연 최시라 최하늘 최하림 한다미

이 33명은 대략 2000년 전후에 태어난 아이들일 것이다. 앞서 보았던 135명의 이름들하고는 그 어감이나 분위기부터 확연히 다르다는 게 드러난다. 그 여덟 글자 중 하나를 이름의 끝 글자로 쓴 건 '박진희'와 '이소희' 둘뿐이다. 이 정도면 그야말로 상전이 벽해했다고 할 만하다. 세상 변화를 충분히 실감하고도 남는다.

작가들은 좀 달랐던 모양이다. 1970년대 초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별들의 고향>의 여주인공 이름은 '경아'다. 장미희가 주연한 <겨울여자>의 주인공은 '이화'다. 1980년대 중반에 발표된 최인호의 장편소설 <겨울 나그네>의 여자 주인공 이름은, 작가의 실제 딸 이름이기도 한 '다혜'다. '아', '화', '혜' 모두 앞서 보았던 135명 중에는 하나도 없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게 하나 있다. 바로 '혜'다. 당시만 해도 여자 이름에 '혜'를 쓰는 건 꽤 파격적이었다.

물론 그 옛날이라고 딸아이의 이름을 요즘말로 아무 생각없이 짓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그것도 사람 나름이고 신분 나름이다. 고종 황제가 유난히 총애했다는 옹주 이름이 '덕혜'였으니 하는 말이다. 그런데 '덕혜'는 그 소리가 '더켸'라서 발음하기가 아무래도 좀 그렇다. 어쨌든 공주나 옹주쯤 되면 이름부터 시대를 앞서갔던 모양이다. 


태그:#여자 이름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