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실상사 작은학교 아이들과 선생님이 2주간 걸어갈 길을 지도를 보면서 공부하고 있다.
 실상사 작은학교 아이들과 선생님이 2주간 걸어갈 길을 지도를 보면서 공부하고 있다.
ⓒ 정혜선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전교생이 44명인 작은 학교에 다닌다. 중·고등 대안학교인 우리학교의 이름은 실상사 작은학교. 11명의 선생님들까지 합하면 우리 식구는 모두 55명이다. 작은학교 사람들 모두는 해마다 봄이 되면 2주간의 도보여행을 떠난다. 따라 와서 밥을 해주는 부모님이나 펜션 같은 번듯한 숙소는 상상할 수 없다.

세 끼 밥을 직접 해먹고 그날 그날 발길이 닿는 마을 회관을 찾아가 잠자리를 구한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이 2주간의 도보여행을 우리는 '세상보기'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몇 년 전까지 '세상보기'는 3박 4일 정도의 일정이었다고 한다.

이 짧은 세상보기 일정 동안 아이들의 불만이 쇄도했다. 우리가 왜 이렇게 힘든 여행을 해야 하냐고. 그 무렵 학교에서는 아이들 사이에 힘든 일은 안하고 보려는 분위기가 슬슬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심 끝에 학교는 특단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세상보기를 13박 14일로 늘리자.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세상보기에 대한 아이들의 불평 불만이 급감했다고 한다. 웬만한 일은 '이쯤이야!'하고 해내기 시작했다고. 2주 동안 길을 걸으며 얼굴이 까맣게 타서 돌아온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지기도 했다고 한다.

2주 동안 세상보기 다녀온 아이들... 눈빛도 달라져

도보여행을 준비하는 실상사 작은학교 아이들이 2주간 걸어갈 길을 지도에 표시하고 있다.
 도보여행을 준비하는 실상사 작은학교 아이들이 2주간 걸어갈 길을 지도에 표시하고 있다.
ⓒ 정혜선

관련사진보기


작은학교 세상보기에는 해마다 주제가 있다. 지리산에 있는 학교답게 지리산 둘레길 전구간을 걸어서 완주하기도 하고, 모둠 별로 걷고 싶은 길을 정해 10일간 자유여행을 한 다음 마지막에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와 종주능선을 타기도 한다.

올해의 주제는 '핵과 에너지'. 후쿠시마 이후 현재 대안 교육계가 가장 많은 힘을 쏟고 있는 분야다. 우리는 학교가 있는 전라북도 남원 산내에서 매일 20km 정도씩을 걸어서 동해안에 있는 월성원자력 발전소까지 가기로 했다. 한 모둠에 열 명 가량의 인원이 함께 움직이고, 모둠마다 경로는 약간씩 다르지만 모두가 공통으로 밀양을 통과한다.

실상사 작은학교가 위치한 전라북도 남원 산내에서 밀양을 지나 고리원전과 월성원전까지 걸어가는 루트
 실상사 작은학교가 위치한 전라북도 남원 산내에서 밀양을 지나 고리원전과 월성원전까지 걸어가는 루트
ⓒ 정혜선

관련사진보기


세상보기를 떠나기 전, 우리는 여행을 위한 공부를 한다. 세상보기는 실상사 작은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과목 중의 하나다. 여행에 필요한 지리와 역사 공부뿐만이 아니라 핵을 둘러싼 이슈를 공부하며 과학과 사회 과목이 하나의 주제 앞에서 서로 만나는 경험을 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걸어서 지날 이땅의 구석 구석이 지도상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찾아보고, 그 지역에 대해서 알아보기도 한다.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밀양일 것이다.

도보여행을 떠나기전 핵을 둘러싼 이슈들을 공부하고 있는 실상사 작은학교 학생의 모습
 도보여행을 떠나기전 핵을 둘러싼 이슈들을 공부하고 있는 실상사 작은학교 학생의 모습
ⓒ 정혜선

관련사진보기


밀양 송전탑 문제에 관해서 알게된 아이들은 내가 쓰는 전기가 원자력 발전소에서부터 전달되어 오는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동안 전기를 함부로 써왔던 습관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밀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저렇게 고생하고 계신데 내가 게임한다고 전기를 이렇게 팍팍 써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게임을 하루 아침에 끊거나 줄이기는 어렵겠지만,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전기가 어떻게 만들어져서 어떤 경로로 오는지 알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과정의 아이들 중에는 밀양 송전탑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시간이 날 때마다 현장을 방문해서 힘을 실어주는 활동을 하는 친구도 있다. 그 친구에게 밀양에 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달라고 했더니, 주저없이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밀양에서 하루나 이틀쯤 지내게 되면 우리가 스스로 밥을 지어먹고 머문 자리를 깨끗이 치우는 것은 기본이고, 농사일을 도와드려도 좋고 농성장 주변에 꽃밭을 만드는 일에 함께 해도 좋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현장에서 고생하고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드리는 것이라고 한다.

밀양 할아버지, 할머니 뵙고 그 고통 진심으로 듣기

여행 전날, 모둠 별로 공부한 것을 발표하고 여행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는 작은학교 아이들
 여행 전날, 모둠 별로 공부한 것을 발표하고 여행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는 작은학교 아이들
ⓒ 정혜선

관련사진보기


세상보기를 떠나기 하루 전날인 어제 15일에는 학교 구성원 모두가 강당에 모여서 모둠별로 여행 계획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동안 공부했던 핵에 관한 이슈들을 비롯하여 각 모둠이 통과하는 지역에 대한 이야기와 평화로운 에너지를 위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등등.

아이들이 지은 모둠 이름에는 저마다의 절박함이 담긴 사연이 있는데, 줄여서 '고등어'라고 불리는 '고등어를 먹고 싶다' 모둠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먹지 못하게 된 동해안산 등푸른 생선을 먹고 싶은 마음을 이름에 담았다. '마지막 잎새' 모둠은 오 헨리의 단편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한 마지막 잎새처럼  우리가 간직한 작은 희망 하나가 언젠가 전 세계를 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여행 전날 사전 계획 발표를 하고 있는 실상사작은학교 아이들. 오헨리 단편의 마지막 잎새처럼 작은 희망하나가 언젠가 세계를 구했으면 하는 희망을 담았다.
 여행 전날 사전 계획 발표를 하고 있는 실상사작은학교 아이들. 오헨리 단편의 마지막 잎새처럼 작은 희망하나가 언젠가 세계를 구했으면 하는 희망을 담았다.
ⓒ 정혜선

관련사진보기


실상사 작은학교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여행을 앞두고 사전계획발표를 하고 있다.
 실상사 작은학교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여행을 앞두고 사전계획발표를 하고 있다.
ⓒ 정혜선

관련사진보기


여행 계획 발표 마지막에 아이들은 한 명 한 명 모두가 세상보기에 임하는 자신의 마음을 말한다. 2주간 함께 걷고 밥해 먹고 숙소를 구하는 쉽지 않은 여행을 앞둔 아이들은 자신만의 다짐이 필요하기도 하고 각오가 필요하기도 하다.

올해 세상보기에서는 또 어떤 일이 생길까하는 기대와 설렘도 빠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천을 오려 자기 배낭 뒤에 매달고 갈 문구도 적는다. '평화로운 에너지를 찾아서', '핵을 찾는 아이' 등등. '고등어' 모둠 소속의 한 교사는 아이들이 만들어 준 '찡찡거리지 않기!!'라는 말이 쓰여진 천 조각을 받아 가방에 붙였다.

4월 16일부터 4월 29일까지 이어지는 일정 동안 한창 혈기 왕성한 아이들과 먼길을 걸어야 하는, 결코 체력이 뛰어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출발 전날 잠 못들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올해로 대안학교 2년차 교사의 이번 세상보기에 임하는 각오는? "찡찡 거리지 않기!!"

긴 도보여행을 앞둔 실상사 작은학교 아이들과 교사의 다짐.
 긴 도보여행을 앞둔 실상사 작은학교 아이들과 교사의 다짐.
ⓒ 정혜선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정혜선님은 실상사 작은학교 교사입니다.



태그:#밀양, #핵, #후쿠시마, #실상사작은학교, #대안학교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