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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는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통제사회다
▲ <투명사회> 표지 투명사회는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통제사회다
ⓒ 이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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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매일 하면서도 찜찜한 이유

처음 접한 페이스북은 내게 '신세계'였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별다른 연고가 없는 곳으로 귀농하면서 이전의 사회적 관계들이 단절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할 즈음 페이스북은 답답한 가슴에 숨통을 틔워주었다.

이제는 거의 볼 수 없는 선·후배, 동료들과 다시 연락이 닿았다. 페이스북을 통한 그들과의 소통은 단절됐던 관계가 복원되는 것 같은 만족감을 주었다.

지금도 매일 페이스북을 하지만 주로는 '눈팅'만 하는 수준이다. 친구 관계로 맺어진 이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기보다는 소극적인 구경꾼에 머무르고 있는 셈이다. 가장 큰 이유는 흥미를 잃어버린 데 있다.

페이스북 친구들은 대부분 비슷한 정치적 성향과 정서적 공감대를 공유하고 있다. 많은 사안에서 견해 차이는커녕 의견이 비슷한 경우가 다반사다. 친구들의 사생활 포스팅에 가끔 댓글을 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좋아요'만 누르는 것에 그친다. 특별한 토론도 없고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비슷한 의견들에 찬동하며 자기 만족적인 소통에 머물다 보니 자연스럽게 흥미가 떨어진 것이다.

적극적인 소통으로 담론의 확대와 재생산에 기여하기 보다는 적당히 눈팅하는 것으로 때우는 것이 남의 생활이나 엿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것조차 형식적으로 느껴져 페이스북을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소셜미디어와 개인화된 검색엔진은 네트워크 내에 외부가 제거된 절대적인 인접 공간을 수립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에는 변화를 가능하게 할 어떤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디지털 이웃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체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린다. 인터넷은 친밀성의 영역, 혹은 아늑한 지대로 변모한다. 모든 먼 것이 제거된 가까움 역시 투명성의 한 가지 표현 형식이다. (74쪽)

현병철 교수(베를린 예술대학)는 신작 <투명사회>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서로에 대한 거리를 유지할 때 더 잘 어울리게 된다"며 "친밀성은 사람들 사이의 교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오직 정보 교환의 양과 속도로만 측정되는 커뮤니케이션의 대량화는 '긍정성'만을 증식하는 대신 '부정성'을 거부하는 특징을 보인다. 페이스북에 '싫어요' 버튼이 없는 것도 어떤 부정성도 허용하지 않는 '투명성'의 맥락으로 해석한다.

현병철은 "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 정립하고 관철한다. 그 점에서 진리는 부정성이다. 정보의 증가와 축적만으로 진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정보에는 방향, 즉 의미가 없다. 진리의 부정성이 결여됨으로 인해 긍정적인 것이 마구 증식하고 다량화 된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진리의 결핍, 존재의 결핍을 드러낼 뿐"(26~27쪽)이라고 비판한다.

투명사회는 통제사회 : 디지털 파놉티콘의 시대

현병철은 오늘날의 화두가 된 '투명성'의 확대가 더 나은 사회와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통제사회'를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제러미 밴덤이 설계한 원형 감옥 '파놉티콘'의 개념을 대입해, 오늘의 '통제사회'는 특수한 파놉티콘적 구조를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이른바 '디지털 파놉티콘'은 서로 격리되고 고립되어있는 벤담식 파놉티콘의 수감자들과는 반대로 주민들이 네트워크화되어 서로 맹렬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은 투명성을 보장하고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자신을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

오늘날처럼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사회에서는 신뢰에서 통제로의 시스템적 전환이 일어난다. 투명사회는 신뢰사회가 아니라 통제사회다. (중략) 전면적 커뮤니케이션과 전면적 네트워크화의 흐름속에서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 튀는 견해를 밝히는 것은 그 어느때보다 더 어려워졌다.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매끈하게 다듬고 평준화하는 작용을 하여, 결국 획일화를 초래하고 이질성을 제거한다. 투명성은 순응에 대한 강압을 낳고 이로써 지배 시스템을 안정시키는데 기여한다. (6쪽)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은 모든 것이 노출되는 '유리 인간'의 상태를 만들어낸다. 투명성을 부패와 정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그 영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한다. 현병철은 "다름과 낯섦의 부정성, 타자의 저항은 매끄러운 동일자의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지연시킨다"며  "투명성은 타자와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고 분석한다. 즉, 투명성이란 곧 시스템적 강제력, 획일적 사회의 전체주의적 특성이다.

투명성의 독재속에서는 주류를 벗어나는 의견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아이디어는 아예 입 밖으로 꺼내기도 어려워진다. 과감한 도전은 거의 시도되지 않는다. 투명성의 명령은 강력한 순응에의 강제를 낳는다. 사람들은 카메라의 지속적인 감시 속에 있을 때처럼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투명성의 명령에는 파놉티콘적 효과가 있다. 그것은 결국 커뮤니케이션의 획일화와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귀결된다. (141쪽)

제러미 밴담이 설계한 원형 감옥인 파놉티콘은 주위의 감방은 항상 밝고 중앙의 감시 공간은 늘 어두워 죄수는 간수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현병철은 오늘날의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은 디지털 파놉티콘적 특성을 보인다고 분석한다.
▲ 파놉티콘 제러미 밴담이 설계한 원형 감옥인 파놉티콘은 주위의 감방은 항상 밝고 중앙의 감시 공간은 늘 어두워 죄수는 간수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현병철은 오늘날의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은 디지털 파놉티콘적 특성을 보인다고 분석한다.
ⓒ 이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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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한의 자유와 커뮤니케이션의 확대가 평등을 확대하고 직접 민주주의의 획기적인 진전을 가져오는 것으로 귀결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병철은 투명사회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고 본다. 유리 인간들의 세상인 투명사회에서는 소비자의 취향이 시민적 책임감의 자리를 대신한다. 투표소와 시장, 폴리스(polis)와 경제가 하나가 되어버린 디지털 광장에서 정치는 쇼핑이 되고 유권자는 소비자처럼 행동한다. 취향에 따른 결정, 즉 '좋아요'는 소비자의 구호이지 시민의 구호가 아니다.

블로그, 트위터, 인터넷 카페, 미니홈피 등 커뮤니케이션 도구의 변화는 '1 대 1'의 소통 패턴을 '다수 대 다수'의 소통 패턴으로 전환시켰다. 촛불시위가 그러했던 것처럼 쌍방향적인 소통 패턴의 변화는 대중의 참여와 결집을 통한 오프라인 세계의 역동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인터넷의 순기능이다.

웹 2.0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소통의 시대에 대한 독창적이고 전복적 시각이 돋보이는 <투명사회>는 웹의 순기능을 옹호하는 주류 담론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투명사회>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변화가 선도하는 사회의 모습이 과연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에 대해 종합적으로 숙고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연구다.

덧붙이는 글 | <투명사회>(현병철/문학과지성사/2014년/12,000원)
이 글은 제 블로그 http://blog.yes24.com/xfile340 에도 게재했습니다.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2014)


태그:#투명사회, #SNS, #인터넷, #통제사회, #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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