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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남단 오키나와(沖繩) 나하(那覇)에는 옛 류큐왕국(琉球王國)의 왕성, 슈리성(首里城)이 남아 있다. 수많은 외세의 침입과 역사의 부침 속에서도 슈리성은 그 자리에 굳건히 남아 있다. 나는 120m 산 정상에 요새와 같이 들어선 슈리성의 여러 성문을 지나, 슈리성의 정전인 세이덴(正殿) 앞에 섰다.

세이덴을 들어서려면 난덴(南殿, なんでん)과 반도코로(番所, ばんどころ)를 거쳐야 한다. 세이덴 오른쪽에 2층 건물 1채, 1층 건물 1채가 연달아 이어져 있고, 이 중 1층 건물이 반도코로(番所)이다.

건물의 이름대로 반도코로는 왕궁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던 곳인데, 류큐 왕국 당시 슈리성에 입성하는 사람들을 접수하고 맞이하는 역할을 하였다. 현재 반도코로는 슈리성 방문객들을 위한 안내소로 사용되고 있다. 반도코로 옆의 난덴(南殿)은 일본 규슈(九州) 사쓰마(薩摩)에서 온 관리들을 접대하던 곳이다.

슈리성에 소중히 남은 유물들을 볼 수 있다.
▲ 난덴과 반도코로 슈리성에 소중히 남은 유물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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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선 아내와 함께 반도코로에 들어와서 신발을 벗었다. 세이덴 구역의 목조건물 내부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반도코로 입구에서 직원이 나눠주는 비닐봉투에 신발을 넣은 후 그 봉투를 들고 다니면서 관람을 하고, 건물 밖으로 나갈 때에야 신발을 신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봉투를 관람하는 내내 들고 다니려니 사진 찍는 것도 어렵고 손이 자유롭지 못해 불편하다.

여행자들이 세이덴 구역 안으로 들어서는 첫 번째 건물인 이 건물들은 현재 전시관이 되어 있고, 신년이나 계절별 축제 등 일본 전통의 행사들이 열린다. 반도코로와 난덴은 17세기 초에 단청을 입히지 않은 일본 전통 양식으로 지어져서 무척이나 소박해 보인다. 슈리성이 중국 건축양식과 일본 건축양식이 혼합되어 있는데, 이 난덴과 반도코로가 일본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그래서인지 이 건물 안에 들어서면 류큐왕국에 있던 내가 일본 내륙의 한 사찰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 든다.

난덴에 남은 미술 공예품 중에는 슈리성의 과거 모습을 보여주는 병풍이 있다.
▲ 슈리성 병풍 난덴에 남은 미술 공예품 중에는 슈리성의 과거 모습을 보여주는 병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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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코로과 난덴의 여러 방에는 왕조 시대의 슈리성 병풍, 금은 그릇, 풍경화 등 여러 미술 공예품이 전시되고 있다. 쇼엔왕(尚円王)의 어진(御眞)과 같은 류큐 왕국 역대 국왕의 어진과 같은 왕가의 유물들도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관에 잘 보존된 칠기, 염직물, 도기, 사미센(三味線)과 같은 악기 등은 중국, 일본, 동남아와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남겨진 류큐 고유문화의 꽃과 같은 유물들이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슈리성의 목조건물들이 하늘로 날아가 버렸음에도 이 꽃같은 유물들은 살아남아 류큐 왕국의 혼을 지키고 있다.

여러 복식과 유물을 복원하는 근거자료가 되었다.
▲ 쇼케이 왕의 어진 여러 복식과 유물을 복원하는 근거자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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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류큐 왕국의 유명 특산품인 큰 소라, 야코가이(夜光貝, やこうがい)의 자개를 발라내어 만든 류큐 칠기의 표면은 황금빛이 너무나 화려하다. 반도코로와 난덴은 왕가의 유물이 많은 관계로 사진 촬영이 불가능한 구역이라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류큐 왕조시대에 만들어진 왕의 미술공예품들이기에 류큐 국왕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왕에 대한 예의를 지킨다는 것은 류큐 왕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인가?

왕의 유물 중에 관람객들의 시선을 가장 잡아끄는 것은 왕의 신하가 왕을 따라다니며 받쳐 주었을 왕의 양산이다. 3폭으로 겹겹이 포개어진 커다란 비단 양산을 두께 굵은 나무 기둥이 지탱하며 서 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왕의 양산과 거의 동일하게 생긴 모습을 하고 있다. 비단에 놓여있는 자수(刺繡)는 왕의 양산답게 세밀하다. 이 노란색 거대 양산을 보던 한 일본인 관광객이 하는 말이 걸작이다.

"이 왕의 양산, 한국 드라마에서 봤잖아. TV에서 보던 것과 너무 똑같네"
"맞아. 차양같이 거대한 이 노란 양산. 한국 드라마에서 봤지"

그는 일본 내에서 절찬리에 상영되었던 우리나라의 사극을 열심히 시청했던 것 같다. 망해버린 왕국의 왕성 안에서 이국적인 문물들을 접하고 있던 나는 이 말 한마디에 갑자기 한국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것 같은 묘한 감상을 느끼게 되었다.

외국 여행은 그 나라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문화를 체험할 때에 여행의 맛이 배가되는데 외국에서 현지인이 한국을 느끼고 있으니 여행의 맛은 절하되는 느낌이다. 동시에 한류의 영향이 정말 자랑스럽기도 하다.

왕의 집무실인 다다미 방이 한적하기만 하다.
▲ 고쇼인 왕의 집무실인 다다미 방이 한적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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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로 정갈하게 복원된 왕의 공간은 계속 이어진다. 옛 모습 그대로 다다미방으로 복원된 고쇼인(御書院, こしょいん)은 류큐의 국왕이 일상적인 나랏일을 보던 공간이다. 현재로 보면 대통령 집무실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고쇼인 바로 옆에는 왕의 비서기관 신하들과 측근들이 대기하던 방이 연결되어 있다.

류큐의 국왕은 중국 황제가 보낸 책봉사(冊封使)나 류큐 왕국에 와 있던 일본 사쓰마(薩摩, さつま) 지역 관리를 이 고쇼인에 친히 불러 접대하기도 하였다. 류큐의 왕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강대국 사신을 직접 달래며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 일은 사대주의였으나 류큐의 생존에는 무척 중요했을 것이다.

고쇼인 옆의 사스노마(鎖之間)는 왕자들이 사용하던 공간으로서 조선시대 경복궁과 비교하면 세자가 머물던 동궁(東宮)과 같은 곳이다. 왕자의 방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다다미방 몇 채로 이루어져 있다. 류큐의 왕자는 이 작은 공간에서 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류큐 왕국의 관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으며, 자신이 주도하여 신하들과 회의를 하기도 하였다.

현재 왕자의 공간, 사스노마의 내부에는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 300엔을 내고 마실 수 있는 차의 모형물까지 전시해 두었다. 아무리 완전히 새롭게 복원한 왕궁이라지만 왕자의 방에서 관광객들에게 차를 파는 것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단지 답사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왕자의 공간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가도 좋은 이유가 하나 있다. 이 다다미 방에 앉아 있으면 슈리성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정원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석회암 괴석에 소철과 소나무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 쇼인 사스노마 정원 석회암 괴석에 소철과 소나무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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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인-사스노마 정원은 왕의 공간인 고쇼인, 왕자의 공간인 사스노마와 일체화되어 만들어진 중요한 공간이다. 슈리성에서 유일한 정원이자 왕궁 안에 특별히 만들어진 정원이다. 사스노마 정원은 축소 지향으로 만든 일본식 작은 정원이 아니라 실물 크기로 본격적으로 만든 정원이다. 남국의 소철과 키 작은 소나무, 류큐의 석회암 괴석이 자못 이국적이다.

고쇼인에 초대되어 정원의 절경을 감상한 중국 황제의 책봉사들은 이 정원을 칭송하는 시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국어로 번역해서 현대에 읽으니 어쩐지 하나마나한 소리 같다.

'해괴한 모습을 한 돌 사이에 뒤얽힌 소나무와 소철, 두 가지가 번갈아 심어져 있다.'

이 정원은 1990년대에 복원되었지만 왕의 정원에 남겨진 정갈한 정원석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담아 배치되어 있다. 일본의 정원 양식을 매우 닮은 이 정원은 류큐 왕국 당시에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정성껏 만들어 놓은 정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정원은 요새같은 왕성 안에 남향으로 지어져서 햇볕이 매우 따스하다.

왕과 왕자의 공간보다는 이 쇼인-사스노마 정원이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고 일본 정부에서 지정한 '가장 아름다운 경치'에 선정되는 등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지금 봐서는 인테리어 예쁜 가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석 정원같이 보이고 명승으로서의 가치도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조경 개념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이 정원의 괴석과 소나무의 배치양식이 매우 앞서가는 양식이었을 것이다.

과거 유구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슈리성을 완전하게 복원하였다.
▲ 세이덴 유구 과거 유구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슈리성을 완전하게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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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드디어 슈리성의 하이라이트인 정전, 세이덴(正殿) 내부로 들어섰다. 3층의 목조 구조인 세이덴은 환기 용도로 사용되는 3층을 제외하고 1층과 2층을 둘러볼 수 있다. 내가 먼저 들어선 곳은 1층 시챠구이(下庫理). 시챠구이는 왕이 정치 또는 제사의식을 관장하던 곳이었다. 시챠구이 안에는 왕이 정치의식, 축하연을 거행하며 앉던 우사스카(御差床)가 류큐왕국의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우사스카 양 옆에는 국왕의 아들과 손자가 앉던 히라우사스카(平御差床)가 함께 있다.

우사스카 앞에 사람들이 모여서 아래를 굽어보고 있길래 나도 그들을 따라 방의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거기에는 마루 바닥 아래를 볼 수 있도록 유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유리 아래를 살펴보니 슈리성 정전의 유구(遺構)가 보인다. 유구는 세이덴 건물을 받치고 있었을 석회암 기단이다.

현재의 세이덴은 슈리성 정전의 유구를 보호하기 위해 유구의 약 70cm 정도 위에 지어졌다. 복원 전 발굴조사를 한 결과에 의하면, 슈리성 세이덴은 14세기 말에 처음 지어진 후 전쟁과 화재에 의해 4번이나 불탄 후 같은 위치에 재건되었다. 현재 건물은 1992년에 복원된 것으로 오키나와 전투 이전인 18세기 초기 양식대로 지어졌다. 그러므로 유구를 제외하고 유구 위에 지어진 현재 세이덴의 휘황찬란한 방과 유물들은 모두 새롭게 복원된 것들이다. 류큐왕국 당시의 사진 자료와 문헌자료가 많이 남아 거의 과거와 같게 복원되었지만 그 시절 그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아쉽다.

작고 은밀한 동선은 마치 미로를 찾아가는 듯 하다.
▲ 세이덴 둘러보기 작고 은밀한 동선은 마치 미로를 찾아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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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발을 담은 비닐봉지를 든 채로 계속 왕궁의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내와 함께 새로 복원된 나무계단을 올라 2층의 우후구이(大庫理)에 들어섰다. 우후구이는 축하연 등 왕가의 행사가 치러지던 곳으로, 왕과 왕족, 여사제들이 이곳에서 의식을 거행했다.

이 2층 공간의 뒤쪽에서는 매일 아침마다 국왕과 궁녀가 국가와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일상적으로 이 우후구이는 왕비나 신분이 높은 궁녀들이 사용하였던 곳이다. 복원된 공간이지만 무언가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다.

2층의 우사스카에는 류큐 왕의 옥좌(玉座)가 자리를 잡고 있다. 옥좌의 팔걸이는 류큐의 왕을 상징하는 용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우사스카 앞의 좌우 앞쪽에도 정전 앞의 건물 앞에서 보았던 석제 용기둥과 같은 형태의 황금 용 기둥이 우뚝 서 있다. 왕이 정치적 의식을 주재하던 방 안, 온통 왕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황금색이 어우러져 방 안에서 화려하게 휘돌며 용솟음치고 있었다.

붉은색 나무 기둥 위에는 총천연색 구름을 뚫고 하늘을 향해 꿈틀거리는 황금 용이 있다. 용 한 마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고, 용 한 마리는 포효하듯 입을 벌리고 있다. 왕궁 도처에는 황금 용들이 여기저기에 포진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슈리성은 류큐 왕을 상징하는 여러 용이 살고 있다고 하겠는가?

왕이 앉던 옥좌 주변은 왕을 상징하는 황금 용 천지이다.
▲ 옥좌 왕이 앉던 옥좌 주변은 왕을 상징하는 황금 용 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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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오동나무 씨앗 기름으로 발라진 세이덴 내부 벽은 화려하게 번쩍거린다. 그러나 세이덴의 방은 모두 복원된 제품이고, 오직 나무바닥 아래의 세이덴 유구만이 진품인 것이다. 세이덴 건물이 너무 반짝거리고 화려해서 옛 유산을 보는 감흥은 일어나지 않는다. 소중한 슈리성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던 오키나와 전투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옥좌 뒤편에 걸려있는 검붉은색 편액(扁額)에는 화려한, 너무나 화려한 황금색 한자가 각인되어 있다. 이 한자 편액들은 모두 류큐의 국왕이 슈리성에서 즉위식을 하거나 큰 의식이 있을 때에 중국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액자들이다. 이 편액들은 1996년과 2002년에 복원되어 정전 2층에 걸리게 된 것들이다. 이 편액들도 바로 어제 만들어 붙인 것처럼 반짝거려서 고풍스러운 맛은 없다. 편액의 밝게 빛나는 색상도 다시 수십년, 수백년의 세월이 지나면 세월이 바랜 은은한 색감을 풍길 것이다.

'중산세토(中山世土)'는 청나라의 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로부터 하사받은 편액이다. 오키나와 왕조가 만들어지기 전에 북산, 중산, 남산의 3 호족 중에서 중산이 중국의 지원을 받아 오키나와를 통일하였기에 '중산세토'는 중산이 다스리는 땅이라는 뜻이다. 청나라 5대 황제 옹정제(雍正帝)로부터 하사받은 편액, '집서구양(輯瑞球陽)'은 류큐가 영화롭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 편액들은 모두 역사에 남은 기록을 토대로 복원하였다. 편액 내용 모두가 중국에 조공을 하던 류큐 왕국의 생존을 위한 사대주의가 담겨 있다. 작은 섬나라로서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중국은 컸고, 이 편액들은 중국을 상대하기 위한 그들만의 생존방식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류큐의 왕이 세이덴 마당에 모인 신하들을 내려다보았다.
▲ 세이덴의 마당에 접한 방 이곳에서 류큐의 왕이 세이덴 마당에 모인 신하들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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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왕의 옥좌 앞 전면에는 슈리성의 우나(御庭)에 접한 작은 방이 있다. 정월 의식과 같은 의식이 진행될 때에 슈리 왕국의 왕은 이 방 의자에 앉아 우나에 줄을 선 여러 신하들의 알현을 받았다. 우나에 줄 맞춰 도열해 있던 신하들이 보기에 세이덴 2층의 왕은 상당히 높은 곳에 있어서 자연히 우러러 보였을 것이다. 궁전의 외양은 중국을 닮았으나 궁전의 내부는 이렇게 독특하고도 은밀한 공간이다.

너무나 인상적인 것은 붉은 미닫이문 뒤로 보이는 계단이다. 그 계단은 위층으로 올라가는 국왕 전용의 계단이다. 어찌나 경사가 급한지 경사가 정말 70도도 넘어 보인다. 이 계단이 실제로 사용된 계단이라고 하는데 왕이 이 계단을 오를 때는 계단 옆의 난간을 잡고 힘들여 올랐을 것 같다. 왜 이렇게도 경사 심한 계단을 만들었을까? 2층은 제사 등의 의식을 위한 공간이었고, 아마도 이 제사시설은 아무나 범접하기 어려운 신의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이덴 안의 계단도 좁고 왕의 공간도 아주 좁다. 규모는 작고 좁아서 왕이 불편했을 듯 하고 신하들이 무릎 꿇고 모여 있었을 공간도 좁아 보인다. 작은 섬나라의 왕궁인 만큼 궁궐은 작지만 비밀의 궁같이 미로를 찾아가는 듯한 신비감과 묘한 매력이 있다.

나는 세이덴의 3층까지 올라가고 싶었지만 3층 입구는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아 두었다. 3층을 설명하는 설명문을 보니 3층은 환풍을 위한 시설로, 그 모습이 마치 끝없이 이어진 긴 다락방 같이 생겼다.

세이덴에서 보면 나하 시내가 한눈에 펼쳐진다.
▲ 세이덴에서의 전망 세이덴에서 보면 나하 시내가 한눈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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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의 은밀한 신비감 속으로 들어가서 혼자 앉아 있으면 19세기 말에 사라진 류큐 왕국의 숨결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세이덴에서 내려다보면 중국을 향해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세이덴의 슬픈 역사도 함께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300편이 있습니다.



태그:#일본여행, #오키나와, #나하, #슈리성, #세이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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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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