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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세 여성의 대리기사가 "자신의 나이가 너무 많아보이냐"며 반문하고 있다. KBS<다큐멘터리 3일> 갈무리.
▲ 65세 여성 대리기사 65세 여성의 대리기사가 "자신의 나이가 너무 많아보이냐"며 반문하고 있다. KBS<다큐멘터리 3일>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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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KBS는 <다큐멘터리 3일> '집으로 가는 길-대리기사' 편을 방영했다. <다큐멘터리 3일>은 72시간 동안 특정 공간을 밀착해 찍은 영상을 50분으로 압축해 방영하는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다. '집으로 가는 길-대리기사'편은 3일이나 대리기사들을 쫓아다니면서 취재한 결과물이지만, 결과물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들의 현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해 대리기사들을 취재해 월 250만원 유혹에 속아... 제가 바보였습니다 기사를 썼다. 내가 취재하면서 본 대리기사들은 갑의 횡포에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슈퍼을'이었다. 회사에게 착취당하고 손님에게 치이는 약자들이었다.

허나 <다큐멘터리 3일>은 새벽까지 열심히 뛰어다니는 대리기사들의 '씩씩한' 모습만 담아냈다. 사업 실패 후 재취업이 힘들어 대리운전을 시작했다는 50대 가장의 씁쓸한 미소에서는 '내일의 희망'마저 담으려는 듯 보였다.

방송을 본 대리기사들의 반응 역시 비슷했다. 대리기사들의 인터넷 친목 커뮤니티에 올라온 시청 소감을 보면, 현실과 다른 방송 내용에 실망한 것으로 보였다.

- 술주정하는 손, 욕하는 손, 반말 하는 손, 이런 손은 안 나오더군요. 상황실에서 막말 하는 거, 콜 가지고 엿같이 구는 거, 이런 것도 안 나오구요. 그놈에 화이팅은 무슨. (줄임) 나 참 언론플레이에 놀아나는 더러운 기분.

- 우리 대리기사 현실에 전혀 맞지 않네요. 각본 있는 드라마.

- 활기찬 모습, 열심히 하는 모습. 아주 정확한 각본 아래 놓여 있는 팩트를 가장한 연극으로.

방송을 본 대리운전 기사들이 다음 카페 '[대리운전기사]밤이슬을 맞으며' 게시판에 다양한 댓글을 남겼다.
▲ 방송을 본 대리기사들의 반응 방송을 본 대리운전 기사들이 다음 카페 '[대리운전기사]밤이슬을 맞으며' 게시판에 다양한 댓글을 남겼다.
ⓒ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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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잡' 뛰는 65세 할머니에게 "당신이 청춘입니다"

이날 방송에는 대리기사로 일하는 65세 할머니가 출연했다. 낮에는 요양원 도우미로, 저녁에는 대리기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제작진은 할머니에게 "젊은이 못지않게 열심히 사신다"고 칭찬하며 내레이션으로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면 아직 청춘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외에도 경기가 좋지 않을 때 지병으로 퇴사한 60대 할아버지, 10년 동안 운영하던 학원이 문을 닫은 후 재취업의 기회를 놓친 40대 가장, 아픈 아이를 돌보기 위해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 없었던 40대 가장 등 다양한 사연을 가진 대리기사들이 출연했다.

대리운전은 운전면허만 있으면 누구나 시작할 수 있는, 진입장벽이 낮은 직업이다. 이들이 대리운전을 시작한 이유는 초기 자본이 적게 들고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리기사의 수는 정확한 파악이 힘들 정도로 계속 늘어나고 있다. 최근엔 노후가 막막한 노인들도 대리기사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들이 계속 일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취업의 기회가 적고, 가족이 아프기라도 하면 병원비까지 마련해야 한다. 이들에게 노후의 여유란 먼 얘기다. 허나 방송은 불안한 노후로 60세가 넘어서도 일하는 노인들을 '청춘보다 열심히 사는 노인'으로 포장했다.

심장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계속 대리기사로 일하는 60대 할아버지에게 "한 달에 300~400(만 원) 정도 버세요?"라고 묻는 제작진의 질문이 철없이 느껴졌던 이유다. 할아버지는 "새벽시간에 힘들게 일해도 한 달에 100만 원 정도 번다"고 답했다.

"방송에 나온 모습처럼만 일했으면 좋겠네요"

매일 10km 이상씩 걸어 15키로 정도가 빠졌다는 한 대리기사의 발언. KBS<다큐멘터리 3일> 화면 갈무리
▲ 10km이상씩 걷는다는 한 대리기사 매일 10km 이상씩 걸어 15키로 정도가 빠졌다는 한 대리기사의 발언. KBS<다큐멘터리 3일>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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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 나온 한 기사는 "하루에 10킬로미터 가량 걷는다"고 말했다. 허나 방송은 기사들이 1인당 3000원씩 내고 택시를 이용해 싸고 편하게 움직이며 회사에서 순환차량을 제공해 항상 편하게 퇴근할 수 있는 것처럼 내보냈다.

대리기사가 하루 10킬로미터 가까이 구두를 신고 걷는 이유는 회사의 강제적인 복장규정, 따르지 않을 경우 기사에게 가해지는 보복성 패널티, 버스가 다니지 않는 시각이면 택시비 지출의 부담 때문이다. 손님의 차를 목적지까지 운전한 후 집결지로 나오거나 퇴근하는 것은 기사 개인의 재량이다.

대리운전은 손님을 대하는 서비스업이다. 항상 손님이 기사에게 음료수를 건네거나 건강을 기원하는 것은 아니다. 방송은 손님과 기사 사이에 화기애애한 모습만 담아냈다. 방송을 본 한 대리기사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진상손님도 없고, 저기 나온 것처럼만 일하면 좋겠다"고 글을 남겼다.

문제를 봤으면 미화시키지 말고 담아내야

한 대리기사가 "중년남성은 재취업이 힘들기 때문에 대리기사를 많이 한다"고 말하고 있다.  KBS<다큐멘터리 3일> 화면 갈무리
▲ 재취업이 힘들다. 한 대리기사가 "중년남성은 재취업이 힘들기 때문에 대리기사를 많이 한다"고 말하고 있다. KBS<다큐멘터리 3일>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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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당시에는 기사가 많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같이 대리기사가 많지 않았으니까 일은 많았어도 그때가 일은 더 편했던 것 같다. 지금은 경쟁이 너무 심해서 고생을 많이 한다."

방송에 나온 대리기사는 과거를 회상하며 "지금은 일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어지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대리기사로 일하고 있다. 이들은 더 열심히 일하지만 그래도 먹고살기는 여전히 빠듯하다. 경쟁업체의 요금이 내려갈수록 기사들의 주머니도 함께 얇아지기 때문이다.

기자가 대리기사들을 취재할 당시 "이렇게 보도해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게 뭐냐"고 반문했던 한 기사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공영방송의 '수박 겉핥기식' 보도도 마찬가지다. 시청자들은 대리기사들의 '씩씩함'만으로 가득한 영상을 전체 대리기사의 삶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시청자가 보고 싶은 방송일 뿐 대리기사를 위한 방송은 아니다.

방송은 변진섭이 부른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를 배경음악으로 깔며 끝을 맺는다. 그들을 '사랑에 소외된 사람'으로 봐야 하는지 의문이 남는다. 대리기사는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일 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태그:#다큐멘터리 3일, #대리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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