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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어땠냐고? 여기가 논밭 메워 만든 곳이여. 첨엔 안성시장 옆에 생긴 무허가 시장이었제. 이름 부를 것도 마땅찮아 새로 생겼다고 사람들이 '신 시장'이라 혔지. 따로 이름도 없었응게."

아내 김오금 씨는 스물 다섯 꽃 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평생 장사를 했다. 처음엔 창피해서 집과 떨어진 곳에서 장사를 했다고 했다. 지금이야 경우에 어긋나면 욕도하고, 싸움도 하는 시장 아줌마가 다 됐다고.
▲ 부부 아내 김오금 씨는 스물 다섯 꽃 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평생 장사를 했다. 처음엔 창피해서 집과 떨어진 곳에서 장사를 했다고 했다. 지금이야 경우에 어긋나면 욕도하고, 싸움도 하는 시장 아줌마가 다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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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호떡 장사 하는 게 창피했는가벼유"

안성중앙시장에서 40년째 한 자리서 상회(지금은 슈퍼)를 운영하는 윤판덕· 김오금 부부의 증언이다. 이들 부부가 결혼하자마자 차린 신혼집이자 생계유지 공간이 바로 지금의 가게다.

아내는 꽃다운 20대에 시집와서 장사 무경험자 남편과 호떡 장사를 시작했다. 호떡 하나에 20원 하던 시절, 그들은 리어카에 호떡 기계를 싣고 거리 무점포 장사를 나섰다.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 그럈지"란 이들 부부의 말에 무슨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할까.

이들 부부가 지금 가게 자리가 아닌 시내 변두리에서 호떡장사를 시작한 이유가 있다. "지금은 안 그럴텐디 그 시절은 창피혔어유. 그랴서 지인들 모르는 곳을 택했던 가벼"라며 웃는 아내 오금씨. 지금이야 도리에 어긋나게 하면 싸움도 하고 욕도 하지만, 그 시절은 그랬단다.

밤 12시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방범대원들과 밀고 당기기를 어지간히 했단다. 방범대원들이 단속 나오면 "이제 가려고 했다"며 대충 치우는 시늉을 하다가, 가고 나면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악착같이 팔았단다.

"그러다 한 번은 파출소로 붙들려가서 반성문도 썼제"라며 웃는 남편 판덕씨. 웬 반성문? 그 시절, 통행금지 시간을 넘겨 통행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파출소에 앉아 반성문을 쓰는 것을 말한다. 그러고 나면 훈방조치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노점 장사를 몇 달 하다가 지금의 자리에 점포를 얻었다. 점포라고 해야 천막을 쳐서 간신히 비를 피하는 정도 였다. 이름은 가정에서 필요한 식료품을 팔았다. 낮엔 점포에서 식료품을, 밤엔 리어카에서 호떡을 팔았다.

아내는 그 시절 갓난아이를 업고 장사를 했다. 오죽하면 안성시장에서 장사하던 부산 아줌마가 와서 보고는 "여그서 장사하는 기가. 새댁이 참말로 부지런해서 뭘 해도 묵고 살것다"라고 말해주었고, 40년 가까이 된 지금도 그 목소리가 잊어지지 않는다고 오금씨가 말한다.

"2평짜리 합판 방에 네 식구가 살았제"

5평 남짓한 가게 한쪽에 2평도 안 되는 크기의 방을 만들었다. 방이래야 합판을 가로 질러 만든 방이었다. 거기서 네 식구가 살았다. 다리를 뻗으면 뻗을 데가 마땅찮았다. 그 시절엔 안방 넓은 집이 그렇게 부러웠다고. 아이들이 기어다닐 곳조차 없어 마음이 아팠다고.

지금 윤판덕, 김오금 부부가 운영하고 있는 슈퍼 내부 모습이다. 슈퍼라기 보다 옛날 말로 상회가 맞아 보인다. 가정에서 필요한 웬만한 건 다 판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40년 가까이를 해왔다.
▲ 내부 지금 윤판덕, 김오금 부부가 운영하고 있는 슈퍼 내부 모습이다. 슈퍼라기 보다 옛날 말로 상회가 맞아 보인다. 가정에서 필요한 웬만한 건 다 판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40년 가까이를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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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허술해서 엄청 추웠어유. 그 시절은 어떻게 그리 추웠던지"라며 말하는 오금씨는 "지금은 호텔이여 호텔"이라며 웃는다.

"그런 시절에 부부생활은 어떻게 했냐"고 묻는 기자에게 "아, 그거야. 못 허고 살았제. 먹고 산다고 바빠서"라며 웃는 남편 옆에서 아내는 말없이 웃기만 한다. 기자도 덩달아 그냥 웃을 수밖에.

"40년 째 단골 중에 어느 날 보이지 않으면, 돌아가셨거나 요양원으로 간 거쥬"라는 오금씨는 "오래된 단골이 지금도 이사 갔다가 찾아와서는 여적지(아직까지)하느냐"며 놀란다고 했다.

생존 비결,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는 것

이들 부부와 비슷한 규모의 동종 상회들이 대여섯 개가 있었지만, 모두 어려워 문을 닫거나 이사를 갔다는 거다. 오로지 여기만 살아남았다. 그 비결이 뭘까.

"비결? 그거야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는 거"라며 남편이 말한다. 인근에선 여기를 만물상회라고 한다. 가정에서 필요한 생필품은 웬만하면 취급하니까. 거기는 요즘 말로 '슈퍼'라기 보다, 그 시절 말로 '상회'가 딱 어울리는 곳이다.

남편과 중앙시장 사람들이 함께 힘을 합해 10년 전엔 '안성중앙시장'이란 이름도 얻었다. 시장 사람들의 숙제였던 공중화장실과 휴게실도 마련했다. 남편은 안성 서인동 통장과 중앙시장 대표를 맡아 시장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그렇게 힘쓴 결과 초창기 열댓 곳이었던 점포가 지금은 점포 90곳, 무점포 30곳, 도합 120곳 정도의 안정된 전통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자신의 가게가 살려면 시장이 살아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 부부다.

전통시장인 안성중앙시장에서 40년 장사 해온 이들 부부가 지난 시절 고생한 건 다 잊었다며 환하게 웃고 있다.
▲ 윤판덕 김오금 부부 전통시장인 안성중앙시장에서 40년 장사 해온 이들 부부가 지난 시절 고생한 건 다 잊었다며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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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부부의 소원은 '그들의 건강과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 했다.  "지금은 그 시절 고생한 거 다 잊어 묵었어. 생각도 안 난당게"라며 웃던 이들 부부의 미소가 계속 이어지길 바래본다.

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는 지난 15일 윤판덕 김오금 부부가 40년 째 운영해오는 가게에서 진행됐다.



태그:#안성중앙시장, #전통시장, #상회, #안성시장, #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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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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