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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 명소 안산은 조선시대 무악(毋岳), 안현(안장 鞍, 고개 峴)이라고도 불리는 산으로 동봉과 서봉 두 봉우리로 이루어졌다. 산의 모양이 마치 말의 안장 즉 길마와 같이 생겨 '길마재'란 옛 이름도 있다. 해발 295.9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인왕산에서 서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무악재를 이루고 솟아있는 주변 전망이 좋은 산이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어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무악은 궁궐의 주산(主山)으로 주목되어, 백악(북악산)과 함께 왕이 기거할 궁궐을 품을 산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요즘 봄꽃 축제가 벌어지는 안산에 꽃구경을 갔다가 안산의 역사를 알게 되었다. 안산이 조선의 임금 인조를 살렸다는 흥미로운 내용이다.

1623년 숙부인 광해군을 폐위하고 반정(反正)을 일으켜 왕이 된 인조는 불운하게도 세 번이나 서울을 버리고 피난한다. 청나라가 침략하여 발생한 정묘호란, 병자호란 그리고 임금으로 즉위한 초기 1624년에 벌어진 '이괄의 난' 때문이었다.

반정 후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벼슬과 상을 주는 논공행상이 문제였다. 인조는 반정에 공이 큰 공신들인 정사공신 53명을 선정했다. 정사(靖社)란 반정을 성공시킴으로써 종묘사직을 바르게 세웠다는 의미다. 김류와 이귀 등은 1등 공신이 되고 이괄은 2등 공신이 되었다. 부임지인 평안도 영변에서 이 소식을 접한 이괄은 불만을 터트렸다.

사실 인조반정은 이괄의 과단성이 없었으면 성공하지 못했을 쿠데타였다. 반정군의 대장을 맡기로 한 김류는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거사 장소였던 연서역(지금의 은평구 역촌동)에 나타나지 않고 자신의 무관함을 보이기 위해 집에서 근신하고 있었다. 대장이 제때 나타나지 않자 반정군 진영은 동요했다. 바로 그 때 동요하던 군사들을 다잡아 대오를 안정시킨 인물이 이괄이었다. 이괄은 바로 병사를 이끌고 한성부를 수색하여 광해군을 체포한다.

이괄이 대신 대장을 맡아 군사를 움직이자 김류는 그제서야 뒤늦게 현장에 나타나 반정에 합류했다. 이 때문에 반정 성공 직후 '이괄이야 말로 병조판서감'이라는 칭송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미적거리며 눈치를 보았던 김류는 1등 공신이자 원훈(으뜸 元, 공훈 勳)이 되었는데 동요하던 군사들을 휘어잡고 공을 세운 자신은 겨우 2등 공신에 이름이 올라간 것이다.

항왜의 활약으로 승승장구한 이괄의 난 

300m가 채 안되는 낮은 산이지만 주변 풍광이 참 좋은 전망 좋은 안산.
 300m가 채 안되는 낮은 산이지만 주변 풍광이 참 좋은 전망 좋은 안산.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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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은 병조판서는커녕 평안도 지방에 오랑캐의 침입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평안도 영변의 궁벽진 변방으로 평안 병사 겸 부원수로 발령이 났다. 반정 전이나 별반 차이가 벼슬로서 이괄은 불만이 컸지만, 크게 마음에 두지 않고 평안도 안변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후금(후일 청나라) 침략에 대비하여 군사들을 단련시켰다.

당시 이괄은 산성에 들어가 벌이는 수성전에 역점을 두는 조선의 대(對)후금전략에 크게 반대했다. 후금의 군대들이 산성을 치지 않고 큰길 따라 한양으로 바로 진격한다면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는다는 크나큰 치명상이 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괄의 이런 예상은 3년 후 터진 후금의 침략, 정묘호란에서 정확히 벌어진다) 이괄은 이에 반대하여 역발상으로 적극적인 공격작전을 주장했다. 즉 후금부대를 정면에서 맞서자는 주장인데, 그는 거기에 맞추어 군사훈련을 혹독하게 실시한다.

그러자 중앙에 있는 조정대신들은 이런 이괄의 주장과 그 군사훈련이 자신들에게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인조에게 이괄은 역심이 있다는 무고를 여러 차례 올렸다. 더욱이 '이괄의 아들이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고, 자신을 옹호했던 이귀가 '이괄을 빨리 잡아들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는 소식도 날아들었다. 논공행상 때문에 이미 마음이 상했던 이괄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렸다. 결국 왕명을 받은 금부도사가 자신의 아들을 체포하기 위해 영변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이괄은 1624년 1월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당시 삼남에서 선발된 병력과 평안도 군병의 대부분이 이괄의 휘하에 있었다. 1만 3천명의 대군이었다.

당시 반란군의 선봉에 섰던 부대는 항왜(降倭, 항복한 왜인)들이었는데, 임진왜란 시기 조선에 귀순했던 일본군과 그 후예들을 말한다. 검술이 뛰어나고 조총을 잘 다루는 데다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하는 용맹한 자들이었다. 이괄 휘하에는 133명의 항왜가 있었는데 그들이 선봉을 맡음으로써 반란군은 승승장구하며 진압군을 격파할수 있었다. 이괄의 반란군은 황주(黃州)에서 정충신과 남이흥이 이끄는 관군을 격파했는데, 이 전투에서도 항왜군이 큰 역할을 했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항왜군들이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자 관군이 이를 보고 있다 겁을 먹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바람에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관군을 패퇴시킨 반란군은 봉산으로 진군하여 지금의 예성강 상류인 마탄(馬灘)에서 관군을 또 무찔렀다. 거침없이 남하하는 반란군의 기세에 눌린 조정에서는 동래의 왜관에 사신을 보내 일본에 원병을 요청해 오자는 비상식적인 논의까지 나왔다. 이괄의 반란군이 항왜를 선봉으로 삼아 승세를 타고 저돌적으로 쳐들어오니, 교련시키지 못한 군졸로서는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항왜들을 앞세운 이괄의 반란군은 조정에서 일본에 원병을 청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을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떨쳤다.

임진왜란 당시 1593년 이후부터 투항하는 일본군이 많아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은 항왜를 살해했다가 1594년부터는 조선 조정이 항왜의 중요성을 깨닫고 항왜를 받아들이게 된다. 조선이 항왜를 받아들인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수의 일본군이 탈영하였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영에 목책을 설치하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무려 1만여 명의 일본군이 조선에 투항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수까지 합치면 항왜의 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항왜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김충선(金忠善, 일본 이름 사야가, 1571~1642) 이다. 사야가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부대의 선봉장으로, 500명의 병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땅에 상륙 이후 한 차례의 전투도 하지 않은 채 경상 좌병사 박진에게 투항의사를 밝히며 조선군으로 탈바꿈한다. 사야가와 그가 이끄는 500명의 병사들은 일본군에 대한 정보는 물론, 전술과 조총에 대한 장단점을 알려주게 된다.

그는 곽재우가 이끄는 정규군-의병 연합부대와 연계해 경상도 연안의 일본군을 격멸시키는 등 자신이 이끄는 병력과 의병을 합쳐서 일본군과 8차례 격전을 벌여 모두 승전하는 전공을 세운다. 이렇게 임진왜란은 물론, 이괄의 난,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조선 조정을 위해 많은 활약을 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준사'라고 불리는 용맹한 항왜가 출현한다.

도성을 버리고 떠난 인조의 첫 번째 파천 

부원수 정충신이 선점하여 이괄의 반란군을 무찌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안산의 봉수대.
 부원수 정충신이 선점하여 이괄의 반란군을 무찌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안산의 봉수대.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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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부대가 임진강까지 거칠 것이 없이 진격, 파주를 지나 도성으로 들어오자 인조 임금은 공산성이 있는 데다 금강이 흐르고 있어 방어하기에 편리하다는 이유로 서울을 버리고 공주로 파천하고 만다. 밤에 인조는 궁궐을 나섰다. 숭례문에 이르렀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승지 홍서봉이 하인을 시켜 자물쇠를 부수고 문을 열었다. 한강변 나루에 도착했지만 배가 없었다. 강 건너편에 몇 척의 배가 있었지만 사공을 불러도 오지 않았다.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무사 우상중이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는 헤엄쳐 건너가서 사공 한 사람을 베고 배를 저어 건너왔다.

배가 도착하자 수행원들이 서로 먼저 타려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위기의 순간에는 임금의 존재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법이다. 전라병사 이경직이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자 비로소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인조가 배에 올랐지만 배는 한참 동안 강물 가운데 떠 있어야 했다. 인조를 경호할 군사들이 강 건너에 상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겨울밤의 습기가 몹시 차가웠지만 황망한 와중에 장막도 준비하지 못했다. 배가 한강 가운데 이르렀을 때 도성 쪽에서는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지 약 3주일 만인 2월 11일, 왕실과 조정 대신들이 사라진 텅 빈 한양에 이괄의 반란군이 입성했다. 이 과정에서 한성에 있던 이괄의 부인과 장인 이방좌, 아우 이돈은 능지처참을 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반란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은 조선시대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괄은 경복궁의 옛 터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인조의 숙부인 흥안군(興安君)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흥안군은 일찍이 이괄로부터 언질을 받았기 때문에 인조를 수행하다가 중간에 도주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이괄이 승승장구 끝에 도성으로 들어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휘하로 몰려들었다. 수원부사 이흥립도 그 안에 끼어 있었다. 한번 배신하면 계속 배신한다고 했던가?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당일, 반정군이 창덕궁으로 진입하는 것을 방관하여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던 그였다. 그런 그가 이제 다시 이괄에게 붙은 것이다. 이괄은 지인들을 끌어 모아 조정을 꾸리기 시작했다. 반정 이후 세력을 잃거나 소외되었던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1624년 2월 조선에서는 또 다른 정권교체가 임박한 것처럼 보였다.

인조 임금을 살린 안산 

반란군은 안산을 기어 오르며 악전고투하다 결국 관군에게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반란군은 안산을 기어 오르며 악전고투하다 결국 관군에게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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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이 서울로 입성한 직후, 도원수 장만은 관군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 내달렸다. 반란군에게 도성을 내주고 국왕으로 하여금 파천 길에 오르게 만든 일차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장만은 부원수 정충신의 계책을 받아들여 안현(鞍峴, 지금의 서대문구 안산)을 장악하기 위해 달려갔다. 높은 고개를 차지하여 진을 친다면 도성을 내리누르게 될 것이고 관망하고 있는 도성 백성들도 관군 편으로 붙을 것이라고 생각, 또 반란군이 공격해 와도 지형의 이점 때문에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정충신은 가장 먼저 안현에 도착, 정상으로 달려 올라가 봉수대를 지키는 병사를 생포했다. 평상시처럼 봉화를 올리도록 하여 이괄의 진영에서 안현이 탈취된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 때마침 동풍이 크게 불어 이괄 진영은 관군이 안현으로 모여드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야 이괄은 관군이 안현을 접수한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줄곧 승승장구해온 터라 관군을 가볍게 보고 느긋했다. 반란 초반의 승리에 취해 관군이 안산을 장악하도록 방임했던 것이 결국 이괄의 궁극적인 패인이 되었다.

2월 11일 이괄은 항왜들을 이끌고 두 부대로 나눠 안현을 향해 진격했다. 아침 6시쯤부터 격전이 벌어졌다. 도성 백성들은 성이나 높은 곳에 올라가 싸움을 구경했다. 전황은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공격하는 반란군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화살과 총탄을 쏘아도 제대로 맞지 않았다. 오전 11시 바람마저 반란군 쪽으로 서북풍이 불었다 관군은 승기를 잡았다. 반란군 진영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많은 수가 안산을 향해 기어오르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

싸움을 구경하던 도성 백성들은 반란군이 수세에 몰리자 도망치지 못하도록 돈의문과 서소문을 닫아 버렸다. 관망하던 민심의 향배가 정해진 것이다. 퇴로가 막힌 반란군은 숭례문 쪽으로 향하거나 마포, 서강 방면으로 도주했다. 도성 백성의 집으로 숨어 들어간 자들도 있었다. 반란군은 패잔병이 되어 경기도 광주, 이천까지 달아났으나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자중지란이 일어났다. 반란군 가운데 기익헌 등이 이괄과 한명련 등 지휘부 아홉 명을 이미 살해해버린 것이다. 반란군은 결국 궤멸되었다. 이괄에 의해 추대된 선조의 왕자 흥안군은 신분을 숨기고 여염으로 숨어들어다가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돈화문에서 살해되었다.

상시가(傷時歌)에 담긴 민심

이맘때면 안산에 많이 피어나는 때깔 고운 예쁜 들꽃 '현호색'
 이맘때면 안산에 많이 피어나는 때깔 고운 예쁜 들꽃 '현호색'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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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2월 18일 공주를 출발하여 22일 서울로 귀환했다. 창경궁이 도성 백성들의 방화로 타버렸기 때문에 경덕궁으로 들어갔다. 광해군이 막대한 재정을 들여 신축한 궁궐이었다. 도성은 엉망이었다. '모든 재물이 바닥나서 열흘 먹을 저축도 없는 상황'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무엇보다 민심이 흉흉한 것이 심각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서울을 떠난 직후 임금을 원망한 도성 백성들은 궁궐과 관청에 들이닥쳐 불을 지르고 공사의 기물들을 약탈했다. 각 관청에 보관된 문서, 양곡, 무기류도 대거 약탈되었다. 백성들이 훔쳐간 조총의 수량이 워낙 많아 그것들을 쌀을 주고 도로 사들여야 할 형편이었다. 이괄의 반란이 남긴 후유증으로 민심은 수습되지 않았고 정국은 쉽게 안정되지 못했다.

광해군의 '난정'에 절망했던 백성들은 새 정권의 출범에 기대를 걸었었다. 인조와 서인 공신들 또한 집권 직후에는 '광해군대의 폐정을 바로잡겠다'는 구호를 내세웠지만 집권 이후 특히 공신들은 폐정을 바로잡기는커녕 광해군대에 자행되었던 비리를 반복했다. '다만 주인이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은 없다'는 냉소적인 민심은 도성에 떠돌던 노래 상시가(傷時歌, 시절을 한탄하는 노래)를 통해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아, 너희 훈신(공신)들이여 / 잘난 척하지 말라 / 그들의 집에 살고 그들의 토지를 차지하고 그들의 말을 타며 또 다시 그들의 일을 행하니 / 너희들과 그들이 / 돌아보건데 무엇이 다른가

과거 청산과 개혁, 민심수습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인조 정권은 이괄의 난을 겪은 지 3년 후인 1627년 후금(후일 청나라)의 침략(정묘호란)을 받게 된다.


태그:#안산, #이괄의 난, #항왜, #인조, #정묘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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