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여의 기다림 끝에 역시나 단 3부작으로 단출하게 끝낸 영국 드라마 <셜록> 시즌3에서 가장 무시무시했던 장면은 셜록과 조력자 왓슨이 엄청난 폭탄이 설치된 지하철에 갇혔을 때도, 왓슨이 불더미에 휩싸여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도 아니었다. 시즌3의 백미는 마지막 회에서 모든 사건이 끝난 후, 지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에 등장한 모리아티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셜록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았던 모리아티가 다시 살아올 수 있을까? 시즌2 마지막에 왓슨이 보는 앞에서 떨어져 죽었던 셜록의 모습이 결국 적을 속이기 위한 셜록의 한 수였다는 걸 보여준 마당에, <셜록>의 시청자들은 모리아티의 환생(?)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게 되었다. 절대 악의 귀환. 결국 시즌3는 시즌4에 대한 기대감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셜록을 늘 모험에 빠뜨리는 절대 악 모리아티의 귀환만으로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가 마구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요즘 한국 드라마에서도 모리아티 못지않은 절대 악의 활약이 빈번하다.

이익 앞에 원칙도, 논리도, 자비도 없는 악인들

 SBS <별에서 온 그대>의 소시오패스 이재경(신성록 분).

SBS <별에서 온 그대>의 소시오패스 이재경(신성록 분). ⓒ SBS


셜록이 자신을 소시오패스라고 규정하면서 그 용어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는데 또 한 사람의 소시오패스가 우리 앞에 등장했다. 바로 지난 2월 종영한 SBS <별에서 온 그대>에서 신성록이 분한 이재경이다. 카카오톡 속 으르렁거리는 개 이모티콘을 닮았다 하여 '카톡개'란 별명으로 친근해졌지만, 극 중 그는 정말 화가 난 개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든 일에 으르렁거리며 물어뜯고자 한다.

그런데 이재경이 끝이 아니었다. 이제 종반부를 향해 가는 SBS <쓰리 데이즈>에서 또 한 사람의 절대 악이 등장한다. 바로 재신 그룹의 사장 김도진(최원영 분)이다. 자신의 길을 막으면 설사 그게 대통령이라도 장난감 머리를 메스로 베어버리듯이 가볍게 "죽여"라고 말하는 악의 화신이다.

그리고 거기에 새롭게 도전장을 내민 인물이 있다. 바로 KBS 2TV <골든 크로스>의 마이클 장(엄기준 분)이다. 이제 2회를 마친 <골든 크로스>에서 악의 중심으로 활약하는 인물은 경제 기획부 금융 정책국장 서동하(정보석 분)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은행과 은행 직원의 밥줄을 주무르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 젊은 여성을 능욕하고, 그녀의 배신에 분노하여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파렴치범이다.

그런데 그런 서동하를 말 한마디로 꼼짝 못 하게 하는 마이클 장은 다가올 이 드라마의 악의 실세로 보인다. "쌤"이라고 친근하게 부르지만, "내가 아직도 당신이 가르치던 과외 학생인 줄 아느냐"고 이죽거린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다 하지 못하면 재미없을 거라는 협박은 그가 누구보다 이 드라마에서 강력한 악의 포스를 지닐 것을 예견한다.

이렇게 드라마 속 절대 악으로 등장한 이재경, 김도진, 마이클 장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이들 모두가 자본을 휘두르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S&C 그룹의 후계자인 이재경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형마저 기꺼이 죽인 사람이다. 자신의 길에 방해되자 혈육조차 제거한 그에게 더 이상 무서울 사람은 없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이용하여 방해되는 사람은 거침없이 밟아버린다.

 <쓰리 데이즈>의 김도진(최원영 분). 손현주와 연기대결을 펼치는 자리에서 최원영의 연기력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SBS <쓰리 데이즈>의 재신그룹 회장 김도진(최원영 분). ⓒ sbs


이재경이 로맨틱 코미디 속 악역이라는 범주에 갇혀 첫 아내와, 내연녀, 범죄 행위를 목격한 사람을 제거하는 쪼잔한(?) 짓을 저지르는 것과 달리 <쓰리 데이즈>의 김도진은 가히 상상 이상이다. 합참의장을 사주하여 대통령의 경호실장으로 하여금 대통령을 암살하도록 종용하고, EMP탄 정도 터뜨리는 것은 예사다. 이익을 위해 다국적기업 팔콘의 개가 되었지만 수가 틀리면 팔콘의 하수인을 매수하고 국정원장, 여당 대표의 목숨도 쥐락펴락한다.

무엇보다 무시무시한 건 그의 목적 자체가 '아빠'가 가르쳐 준 대로 손해 보는 짓은 하지 말라던 바로 그 유지를 실천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북한과 손을 잡고 남한을 위기에 빠뜨리고, 제2의 IMF와 같은 위기 상황을 이용하여 국가는 망하거나 말거나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한다.

아직은 신비에 가린 <골든 크로스>의 마이클 장은 대한민국 상위 1% 그룹의 핵심 멤버로 소개된다. 공식 홈피이지에 실린 그의 소개에 따르면 펀드 매니저로 이미 멕시코인들의 살점을 발라내어 자신의 이익을 챙긴 전례가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그 멕시코인의 살점을 발라내던 솜씨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바뀔 것임은 거의 확실시된다.

이미 <골든 크로스>는 그의 본격적인 활동 이전에 강주완이라는 한 가장이 협박에 못 이겨 딸의 살인범으로 자수하는 과정을 통해 철저히 짓밟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 배후에 선 마이클 장의 잠재적인 능력이야 두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누군가의 목숨, 가정, 직장쯤이 문제가 되지 않는 무한 이기주의를 그리고 있다.

 KBS 2TV <골든 크로스>의 마이클장(엄기준 분)

KBS 2TV <골든 크로스>의 마이클장(엄기준 분) ⓒ KBS


이재경, 김도진, 마이클 장의 공통점이 단지 자본을 움직이는 힘만은 아니다. 이재경으로 분한 신성록, 김도진으로 분한 최원영, 마이클 장으로 분한 엄기준을 보자. 모두 훤칠하고, 잘 생기고, 다른 사람들이 속사정을 의논하고, 나아가 자신들을 믿고 의지할 만큼 멀쩡하다. 심지어 매너까지 완벽하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한 그들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누군가의 목숨을 거둔다. 악의 축인 줄 알았던 이들이 그들의 말 한 마디에 몸서리를 친다. 이재경의 극 중 설명처럼 그들은 모두 소시오패스이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죄책감이나 두려움, 슬픔을 느끼지 못하고, 타인에 대한 동정심조차 없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이다.

김도진은 조립식 장난감의 팔과 다리를 싹둑 자르는 것과 실제 사람을 죽이는 것 사이에서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다. 장난감을 조립하거나 게임을 즐기는 마이클 장의 모습을 자주 비춰주는 것은 세상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듯한 이들의 심정을 단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연출적 장치이다.

이렇게 가장 멀쩡해 보이는 이들을 사실은 가장 반사회적인 인격 장애를 가진 인물로 그려낸 드라마적 묘사는 바로 우리 사회 자본주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가장 선의의 포장을 하지만 가장 추악하게 우리를 옭아매는 이 시대 자본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다. 드라마는 TV를 틀면 나오는 대기업의 이미지 광고 뒤에 <또 하나의 가족> 속 횡포를 부리는 자본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드라마 속 악인들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한때는 지역 유지가 최종 보스였는가 싶던 때가, 정치적 실권자가 모든 악의 축으로 규정 받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 드라마 속 절대 악은 무한 이기주의에 빠진 자본주의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 앞에서 원칙도, 논리도, 자비도 없다. 평범한 사람들은 체스판의 말 취급도 받지 못한다.

그리고 가장 멀쩡한 모습으로 가장 비이성적인 행동을 한다. 그 '번듯한 미친놈'이 더욱 공포스러운 이유이다. 그리고 그 공포는 바로 우리 삶의 공포로 전이된다. 모리아티는 영국 드라마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별에서 온 그대 쓰리 데이즈 골든 크로스 모리아티 엄기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