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드 배치 반대'를 외치며 분신해 20일 숨진 고 조영삼씨는 지난 2014년까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했습니다. 2001년 9월 시민기자로 가입한 조씨는 그동안 24편의 기사를 올렸습니다. 지난 2014년 4월 대법원 파기환송심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올린 기사에는 1995년 방북 후 18년 넘게 타향을 떠돌았던 '마지막 재독 망명인' 조영삼씨의 굴곡진 인생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먼 타향에서 '자유롭게 그리운 고향 땅을 밟을 날만 기다리며'(기자 소개글 가운데) 글을 썼을 그의 마지막 기사를 '다시 보는 오마이뉴스'로 싣습니다. [편집자말]
이 땅에서 자유인으로 산다는 것은

아침 안개 자욱하고 무르익은 봄날의 강변 가는 새로운 풀꽃들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길고 지난했던 국제 나그네의 여정을 내려놓고 내 나라 내 땅의 한 귀퉁이 미리벌 강변 가에 들풀 하나 되어 어설픈 뿌리를 내린 지도 어느덧 1년 하고도 4개월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기실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의 자유인'으로 살아가기엔 이 땅의 풍속도가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떨어져 살았던 거리만큼이나 아직은 낯설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반백 년 성상 동안 굳어버린 '싸가지 없는 버르장머리'가 어디 가겠습니까? 그냥 생긴 대로 살아야지요.

'저 사람의 생각이나 정견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의 생각이나 정견 때문에 탄압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면 나는 기꺼이 저 사람을 도울 것이다'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의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제가 20여 년 전 처음 이인모 노인을 만났을 때의 심정이 딱 그랬습니다. 당시 이인모 선생은 6·25전쟁 때 인민군 종군기자로 참가했다가 체포돼 34년의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처음 대면한 이인모 노인의 모습은 이랬습니다.

'두 다리는 한물 간 오징어 다리처럼 흐물거렸고, 한 쪽 눈은 꼬챙이에 찔린 동태 눈깔처럼 하얗게 변색되어 있었고, 오른 쪽 이마는 전쟁 와중에 포탄을 맞아 움푹 패인 구덩이처럼 커다란 분화구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자폐증을 앓고 있는 어린 아이처럼 말은 어눌'했습니다. 누가 곁에서 도움을 주지 않으면 간단한 씻기는 물론 단 한 걸음의 걸음마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종군기자로 북한에서 내려온 그는 당연히 남녘 땅엔 가족은 물론 일가붙이 하나 없었습니다. 해서 상당 기간 저는 노인의 손발이 되어 함께 생활을 했지요. 수백만이 희생된 동족상잔으로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분단된 현실에서 색안경을 끼고 본다면 저의 행위는 무모함 그 자체였는지도 모르지요.

보편적 정의와 인도주의는 영원할 것이다

1995년 8월 평양의 이인모 선생의 집을 방문해 이씨의 가족들과 현관에서 함께 찍은 사진. 뒷줄 가운데가 필자.
 1995년 8월 평양의 이인모 선생의 집을 방문해 이씨의 가족들과 현관에서 함께 찍은 사진. 뒷줄 가운데가 필자.
ⓒ 조영삼

관련사진보기


동포애적인 차원에서 북에 대해 친화적인 말 한 두 마디 건네고 '종북'으로 몰리는 세상에서 오갈 데 없는 인민군 종군기자 출신 노인의 손발이 되어 고락을 함께 했으니 색안경을 낀 사람들의 눈에는 '빨갱이도 상빨갱이'에 다름 아니겠지요. 분명히 명토박아 두건데 저는 보편적 정의와 인도주의를 이정표의 하나로 삼고 살아가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고자 하는 자유인'일 뿐입니다.

이른바 완벽하지 못한 인간들이 시대의 조류에 편승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사상이니 정견이니 이념 따위에 심취하거나 몰두하는 체질이 못 됩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의 선한 품성에 기인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진 인도주의의 신봉자일 따름이지요.

시대의 조류에 편승해 만들어진 이념 등은 조류가 변하면 변질되거나 사라지지만 사람의 착한 성품 중의 하나인 측은지심을 밑바닥에 깔고 자연스레 형성된 인도주의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인모 노인에게 다가간 것도 사상과 이념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측은지심에 근간을 둔 순수한 인도주의적 접근이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그 후에도 이인모 선생과의 인연으로 인생역전(?)의 계기를 여러 번 겪게 되는데요. 고향 사람들 얼굴을 먼 발치에서나마 보고 손이라도 흔들고 싶다는 노인의 애타는 바람을 외면할 수 없어 봉고차에 선생을 태우고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는 신라호텔에 데리고 갔다가 공무집행방해죄로 생애 첫 번째 전과 기록을 세웠습니다.

지금은 미국 하와이대 교수로 있는 백태웅씨 등과 함께 제가 서울구치소와 안양교도소에서 일제잔재 청산을 위한 소내민주화투쟁을 전개하던 시기를 전후로 이인모 노인은 분단 이후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그리워 하던 가족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이제 내 역할은 끝났다'는 심정으로 남은 징역 생활을 차분히 보냈습니다.

만기 출소 후 내 나라 내 땅에서 알게 모르게 쌓은 모든 인연들을 내려놓고 지구촌의 땅 끝 동네 아르헨티나로 떠나갔습니다. 아르헨티나엔 오래 전에 정착해 선박사업을 하던 형님가족이 살고 있었지요. 형님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업 도우미가 필요했고 저는 아르헨티나에서 돈을 좀 벌어 다시 내 나라 내 땅에 돌아와 보람된 일을 해 보고자 했습니다.

제가 '체 게바라의 고향'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하나하나 기반을 다지고 있을 때 이젠 더 이상 인연이 이어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이인모 선생으로부터 한 장의 엽서가 날아왔습니다. 우리에겐 금단의 땅인 평양에서 말이지요. 그 후로는 많은 사람들이 서울과 평양을 오고가곤 했지만 당시에는 언감생심 꿈에도 기대하기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물론 타국 땅이니까 가능했겠지요.

엽서의 내용인 즉슨, '남녘 땅에서 헤어질 때 작별인사도 못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또 한 번의 인생역전을 위한 장고에 들어갔습니다.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병든 노인네는 그렇지가 못하다. 내가 누구인가.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의 자유인 아닌가'하는 심정으로 자위하며 지구를 에돌고 돌아 이인모 노인을 만나러 북한에 갔습니다.

저는 보편적 정의와 휴머니즘을 신봉하는 자유인일 뿐입니다. 보편적 정의와 휴머니즘은 사람 사는 세상이면 지구촌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북한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히틀러 치하의 제 3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편적 정의와 휴머니즘의 범주에 입각해서 이인모 노인을 돌봐 주었고 또 방문을 했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천부인권보다 상위개념이다

독일인 동료와 함께한 필자(오른쪽)
 독일인 동료와 함께한 필자(오른쪽)
ⓒ 조영삼

관련사진보기


어설픈 변명 늘어놓지 말라고 다그치는 부류들도 있습니다. 그건 그들의 자유로운 생각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하나님도 통제 못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언감생심 또 다른 사람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나요? 만약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님이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었다면 '노아의 방주'도 없었을 것이고 '노아의 방주' 이후에는 지구상에 착한 사람들만 살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어쩌면 천부인권보다 상위개념일지도 모르겠네요.

따라서 저의 '변명 아닌 변명'에 반론을 재기하는 것에 토를 달 생각은 없습니다. 이 또한 그들의 자유로운 생각의 영역이니까요. 그리고 지구촌의 60억 인구 중에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별의별 별종들이 모여서 지구촌을 형성합니다. 모든 사람을 일률적으로 잴 수는 없습니다. 아마 저도 그 별종 중 한 사람일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론적인 접근법으로 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십여 년 전, 이인모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목, 안데스 산맥 산자락에서 몽고반점을 공유하는, 어쩌면 머언 옛날 한 가족이었을지도 모를 인디오들과 고락을 같이 하면서 헤겔의 변증법을 되새겼던 기억이 어렴풋 떠오릅니다. '정반합, 정반합, 정반합...' 반(反)을 인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 반(反)이 이전에는 정(正)이었던 것과 합쳐져서 다시 정(正)이 되고, 다시 그 정(正)은 반(反)과 필연적으로 만나고 부정되다가 다시 만나 합(合)이 된다.

역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상호간에 이질적인 것들의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변화 발전한다는 논리, 세상의 건설적 발전은 서로 다른 60억 개개인의 좌충우돌의 소용돌이 속에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와 분명 다르다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도 아니면 모'라는 이분법적 흑백논리의 프레임만 작동하는 사회에서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의 자유인'으로 살고자 하는 저 같은 별종은 설 자리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실제로 지금 저는 이러한 현상들을 황토가 그리워 20여 년 만에 돌아온 내 나라 내 땅에서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이른바 '왕따'를 당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북한은 그들의 체제에 대해 흔쾌하지 않은 태도를 견지하는 저를 그다지 좋은 기분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듯 합니다.

저는 보편적 정의를 신봉하는 사람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음은 평등사회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의 기본입니다. 북한은 고전적 지배계층인 지주나 관료계급을 대체하여 또 다른 지배계급인 당료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의 고위 당료계급이 헐벗고 굶주렸던 대다수의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헐벗고 굶주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삼대 세습도 당연 반대합니다. 화성에서 뚝 떨어진 별종국가라면 모를까 21세기 대명천지에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렇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겠지요. 731부대와 정신대 할머니로 대변되는 악랄했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북한의 이른바 혁명 1세대들이 항일무장독립투쟁을 전개했던 것말이지요. 헌데 이러한 일련의 일들 중심에 김일성 주석이 자리 잡고 있음에 저는 그의 공은 공대로 인정하고 과는 비판적 시각으로 보편적 정의에 입각해서 접근할 뿐입니다.

제가 20여 년 전 이인모 선생을 만나기 위해 북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주석의 시신을 참배한 것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간고했던 시기 목숨을 걸고 항일독립투쟁을 했던 것에 대해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로서 망자에게 취할 수 있는 기본적 예의가 아닐까요? 설왕설래의 말들은 전적으로 생각의 자유영역에 속하는 것이니 개의치 않습니다.

두 번째 왕따는 남쪽의 관계당국으로부터입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오랜 세월 전에 김일성 주석 시신 참배 문제 등으로 그리운 내나라 내 땅에 자진 귀국하자마자 '청계산 자락 국립호텔'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의 자유인'에겐 넘나들 수 있는 문제겠지만 그들에게는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덕분에 독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내공 쌓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또 다른 왕따는 '오서독스(정통)적'인 운동권 일부, '프로테스탄트적'인 진보진영 일부, 양 쪽에서 나왔습니다. 전자는 북한당국의 보편적 정의에 반하는 행태들을 제가 비판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이 땅에서 아직은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는 국보법 관련자인 저와 악수를 하다간 "앗, 뜨거!"하고 데일지 모른다는 피해의식 내지는 강박관념 때문 아닐까요?

분단된 이 땅에서 가련한 노인을 돌보지 말아야 했나요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34년간 굽히지 않고 버티다가 그 후유증으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불쌍하고 가련한 노인이 있었습니다(적어도 저에겐 그렇게 보였습니다). 이 세상 소풍 끝내고 언제 하늘나라로 갈지 모르는 그 노인의 마지막 희망은 북에 두고 온 그리운 가족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분단이 현재진행형인 이 땅에서는 그 가련한 노인을 돌봐주지 말았어야 옳았을까요? 나나 내 형제 자매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색안경을 낀 이들에게 역지사지의 발상의 전환을 기대하면 안 되는 일인가요? 이인모 선생과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와의 인연으로 인해 그 후 저의 인생해로는 이순의 나이에 근접해 가는 오늘까지 남들이 보기에 그리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아직도 이런저런 조각들이 현재진행형 중에 있습니다.

오는 4월 22일, 4심의 선고 공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3심제도인데 웬 4심이냐고요? 항소심에서 일부 무죄판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제가 20여 년 전에 이인모 선생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주석 시신을 참배한 것에 대해 '동방예의지국에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해서 무죄 판결이 나왔었는데, 그 판결에 대해 대법원에서 파기환송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어쩌면 또 다시 '청계산자락' 토굴 아닌 독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한 내공 더 쌓을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의 자유인에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겠습니까. 다만 늙은 아빠지만 제 딴엔 아빠가 박학다식(?)하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이제 '초딩' 4학년인 아들내미와 구순을 넘기신 부모님이 걸릴 뿐이지요.

그럼에도 복잡다난한 이 지구촌엔 이런저런 바보들이 꼭 있어야 할 양념은 아니더라도 빈 공간 듬성듬성 존재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리고 바보들의 바보스런 행위와 동작들을 그대로 봐 주어야지 바보들의 '순순한' 행위(순수한의 오기가 절대 아님)를 각색하고, 바보들의 눈높이를 통념적인 잣대로 맞추려 할 때 바보들의 의지완 무관하게 바보는 더 이상 바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불현듯 안도현 시인의 싯구가 생각납니다. 제목이 '너에게 묻는다' 였던가요?

연탄재 발로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세상 사람들아! 제발, 바보는 바보 그대로 보아주기 바란다. 빼지도 보태지도 말고..."

어느 덜 떨어진 바보의 절규였습니다. 끝!


태그:#바보들의 행진,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댓글2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