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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된 영화 '암살'은 허구를 바탕으로 한 작품임에도 실존인물 2명의 존재가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백범 김구와 약산 김원봉이 그들입니다. 특히 약산은 일제가 백범보다 많은 현상금을 걸 정도로 독립운동사에서 비중있는 인물이었음에도 해방 이후 행적 때문에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사례입니다. 박일훈 기자가 작년에 쓴 기사가 약산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 이를 다시 게재합니다. - 편집자 말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최고액 현상금이 걸렸던 인물,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1930년대 이후 중국 내 독립운동의 양대산맥으로 불렸던 인물. 그는 바로 의열단장, 조선의용대장, 민족혁명당 총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직 등을 역임하며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았던 약산(若山) 김원봉(1898년 9월 28일~1958년 11월) 선생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5주년을 맞이하면서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 받고 있음에도, 남에서는 월북한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북에서는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된 그의 흔적을 찾기란 여전히 쉽지가 않다. 그래서 기자는 약산 김원봉이 나고 자랐던 경상남도 밀양을 직접 찾아가 그의 삶의 발자취를 차근차근 따라가 보기로 했다.

밀양 남천강의 노을 약산 김원봉이 어린 시절을 보낸 밀양 남천강변
▲ 밀양 남천강의 노을 약산 김원봉이 어린 시절을 보낸 밀양 남천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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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향에서마저 잊힌 존재

경남 밀양역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그의 생가로 향하는 길, 밀양 시내를 아름답게 가로지르고 있는 남천강이 보였다. 어린 시절 김원봉은 남천강변에서 밤낮으로 축구를 하거나 냉수욕을 하면서 신체를 단련했고, 일제강점기 당시에 금지되었던 조선 역사서들을 읽으며 자라났다고 한다. 소년은 이곳에서 공부하고 노닐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산처럼 크고 높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며 약산(若山)이란 호를 지었으리라.

아름다운 남천강변을 뒤로하고 강 바로 지척에 있다는 김원봉 선생의 생가,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지도 애플리케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찾아간 곳엔 기대했던 김원봉의 생가가 아닌 한창 공사 중인 공사판이 있었다.

한참 동안 근처를 헤매면서 맴돌다 한 동네 어르신의 도움으로 작은 표석 하나를 겨우 찾아냈다. 공사판 옆에 외로이 서있는 자그마한 표석이 이곳에 약산 김원봉의 생가가 있었음을 쓸쓸히 말해주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잊힌 독립운동가이다 보니 애초부터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찾아갔음에도, 비 오는 날 황량한 공사판 구석에 덩그러니 서있는 표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유 모를 슬픔과 처량함이 느껴졌다.

약산 김원봉의 생가터 공사장 옆에 초라하게 놓여있는 표석. 이곳에 약산 김원봉의 생가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흔적이다.
▲ 약산 김원봉의 생가터 공사장 옆에 초라하게 놓여있는 표석. 이곳에 약산 김원봉의 생가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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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판 바로 뒤쪽은 평생 김원봉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또 다른 밀양의 독립운동가 윤세주(1901년 6월 24일~1942년 6월 3일) 선생의 생가터도 있었다. 표석뿐만 아니라 표지판까지 있다는 것이 표석만 덩그러니 있던 김원봉의 생가터보다는 조금 낫다면 낫겠다. 하지만 윤세주의 생가터도 김원봉의 생가터와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정확한 위치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초라했다.

기자가 이곳을 찾은 날에도 주차된 자동차들이 표석과 표지판을 가로막고 있어서, 동네 주민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다. 실제로 생가 근처를 지나가던 안재근(25)씨는 "밀양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계속 살아왔는데도 이곳에 독립운동가들의 생가터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석정 윤세주 생가터 석정 윤세주의 생가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표석이 주차된 자동차에 가려져있다.
▲ 석정 윤세주 생가터 석정 윤세주의 생가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표석이 주차된 자동차에 가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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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항일투쟁으로 독립운동사에 큰 획 남긴 민중의 영웅

지금은 비록 이렇게 잊혀진 존재가 되어 버렸지만 해방 당시만 해도 김원봉은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는 영웅이었다. 조국이 해방된 후 김원봉이 고향 밀양을 방문했을 때, 이 작은 소도시에 무려 10만여 명의 인파가 모여 그를 열렬히 환영했을 정도였단다. 작은 농촌도시의 시골소년이었던 김원봉, 그는 어떻게 무장 항일투쟁의 최전선에 나서게 된 것일까?

어린 시절부터 김원봉은 유난히 민족의식이 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밀양공립보통학교 재학시절에는 메이지 천황의 생일날에 동창들과 함께 일장기를 변소에 던져 버리기도 했다. 이후에도 항일사상을 가진 스승,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던 김원봉은 16살의 나이에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경성 중앙중학교로 편입한다. 19살이 되던 1916년부터는 중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면서 조국독립의 꿈을 키워갔다. 그러던 중 3·1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는 일제가 이 평화적인 혁명운동을 잔혹한 방법으로 진압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에 김원봉은 더 이상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실현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공감하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1919년,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한다. 그 후 의열단은 1920년부터 1926년까지 7년 동안 23차례에 걸쳐 도쿄왕궁과 각급 경찰서 등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제 육군대장 다나카 암살을 시도하는 등 크고 작은 암살 및 파괴활동을 해 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조국이 일제에 짓밟히며 억압받고 있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의열단은 무고한 불특정 다수를 살상하는 손쉬운 테러가 아니라 조선민중을 억압하는 인물과 시설에 대해서만 공격하는 어려운 길을 애써 택했다. 의열(義烈)이라는 말 그대로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은 조국독립이라는 의(義)를 위해 목숨을 걸고 맹렬히 활동했던 것이다.

동아일보에 등장한 의열단 의열단의 의거를 다룬 동아일보 기사. 왼쪽 하단에는 20대 초반의 앳된 모습을 한 의열단장 김원봉의 사진이 실려 있다.
▲ 동아일보에 등장한 의열단 의열단의 의거를 다룬 동아일보 기사. 왼쪽 하단에는 20대 초반의 앳된 모습을 한 의열단장 김원봉의 사진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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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에 이르러 김원봉은 개인적인 암살투쟁이라는 의열단의 한계를 극복하고, 항일군대를 양성해 조직적인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에 그는 우선 자기 자신의 역량부터 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의열단 단장이라는 신분에 연연하지 않고 의열단원 24명과 함께 황포군관학교에 생도로 입교한다.

이곳에서 김원봉은 민족해방운동 사상과 군사전략을 학습하고, 장제스와 저우 언라이 등 중국의 중요인사들과 친분을 갖게 된다. 이후 조선의용대와 민족혁명당을 이끌며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또, 한편으로는 황포군관학교 시절에 인연을 맺은 장제스의 지원을 받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 항일독립운동의 핵심인력으로 활약한 150여 명의 인재들을 직접 길러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시인으로 유명한 이육사 선생도 바로 이곳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배출됐다. 그러다 1940년대 초부터는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 활동했고, 1945년에 이르러 비로소 조국의 광복을 맞이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겪은 수모, 월북 그리고 숙청

광복의 기쁨도 잠시, 1947년 2월에 김원봉은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체포돼 갖은 수모를 당한다. 종로경찰서 형사로 있으면서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악랄하게 고문했던 노덕술. 그는 김원봉을 '빨갱이 두목'이라고 부르면서 뺨을 때리며 모욕했다. 의열단 동지였던 유석현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하고 풀려난 김원봉은 사흘을 꼬박 울며 "여기서는 왜놈 등살에 언제 죽을지 몰라"라며 한탄했다.

그러다 같은 해 7월 19일에는 김원봉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며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움직이던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평소 여운형을 따르던 김원봉에게 이 사건은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좌우합작운동에 헌신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김원봉은 친일파와 우익정치깡패들의 테러에 시달리게 되고, 계속해서 거처를 옮겨 다니는 신세가 된다. 이러한 신변의 위협이 계속되자 김원봉은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서울로 귀환하지 않고 월북하기에 이른다.

임시정부요인들과 김원봉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을 기념해 1945년 12월 3일에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에 서있는 사람이 약산 김원봉이다.
▲ 임시정부요인들과 김원봉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을 기념해 1945년 12월 3일에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에 서있는 사람이 약산 김원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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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후 김원봉은 국가검열성상, 노동상,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 등의 최고위직을 두루 역임한다. 그러나 납북된 조소앙, 안재홍 등과 함께 중립화를 통해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이루어내자는 '중립화 평화통일방안'을 주장하면서 김일성의 눈 밖에 나기 시작한다. 그러던 1958년 11월, 김일성이 중국 연안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했던 '연안파'를 대대적으로 제거할 때 김원봉 역시 이들과 함께 숙청 당한다.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김원봉의 최후에 대해선 여러 주장들이 있는데,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김원봉이 분에 못 이겨 스스로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 넣어 자살했다는 설이 현재로선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이렇게 숙청당한 김원봉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묻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민중들의 기억에서도 완전히 잊혀지게 됐다.

북에서는 국제간첩, 남에서는 빨갱이가 된 약산 김원봉

남과 북으로 갈라진 조국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중립화 평화통일방안을 주장하다 국제간첩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북에서 숙청 당한 김원봉. 그렇다면 남에서는 김원봉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남쪽에 남겨진 김원봉의 가족들은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빨갱이 집안'이라며 손가락질 받았다. 특히 한국전쟁 때는 김원봉의 형제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월북한 김원봉처럼 북한에 동조할 우려가 크다는 이유로 밀양의 한 산골짜기에서 총살 당했다. 김원봉의 아버지는 간신히 총살은 면했지만 외딴 곳에 유폐되었다가 전쟁 통에 굶어 죽었다.

김원봉 가족들의 수난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김원봉의 다섯째 동생인 김봉철씨는 1960년 4·19혁명으로 장면 정부가 들어서자 네 형제의 유골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렀다. 그리고 밀양 피학살자조사대책위원회에 참여해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책임자들을 처벌하고 유족들에게 피해를 보상해줄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1년 뒤 5·16이 일어나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김봉철은 밀양 피학살자조사대책위원회에서 북한을 찬양하고 이롭게 하는 활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돼 1심에서 무기징역을, 2심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화병이 난 그는 술로 세월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린 일곱 자녀들은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거리에서 동냥을 하거나 구두를 닦으며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지난 2010년에서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 형제에 대한 재심이 열렸고, 오래 전 원심을 파기하는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연설 중인 김원봉 1946년 2월 민족주의 민주전선 회의장에서 연설하는 약산 김원봉
▲ 연설 중인 김원봉 1946년 2월 민족주의 민주전선 회의장에서 연설하는 약산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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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원봉에 대한 복권은 여전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김원봉은 월북한 북한최고위층이었다는 이유로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었다. 그러다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던 지난 2005년에 이르러서야 김원봉에 대한 건국훈장추서 논의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는 김원봉의 경우에는 자발적인 월북자인데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장관급 이상의 고위직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서훈할 수 없다며 논의를 일축시켰다.

이후 2007년에 김원봉의 막내여동생인 김학봉씨가 김원봉의 독립운동활동에 관한 공적자료를 정부에 제출하며 다시금 건국훈장을 수여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정부는 2005년과 같은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김원봉의 고향친구이자 독립운동 동지였던 윤세주는 1982년에, 김원봉의 부인이었던 박차정도 1995년에 뒤늦게나마 건국훈장을 받았음에도 김원봉은 여전히 외면 받고 있는 것이다.

산처럼 크고 높은 그 이름 약산, 이제는 기억할 때

일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김원봉은 정말 골수 사회주의자에, 대한민국을 저버리고 월북한 변절자일까? 혹자들은 김원봉이 세운 의열단 강령이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하고 기업을 국유화해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켜 평등의 경제제도를 확립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그가 명백한 사회주의자였다는 비판을 가한다.

하지만 이보다는 사회주의가 민족해방운동과 결합되던 당시 정세를 읽은 김원봉이 우리민족을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줄 새로운 혁명의 방식 중 하나로 사회주의적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1925년에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하고, 중국 내 독립운동 당시에도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김원봉의 행적을 떠올려보면 그가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는 의견은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역만리 타국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 조국독립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라면 좌우이념을 넘나드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한명의 독립운동가였을 뿐이다.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의 약산 1940년에 조선의용대에서 선전용으로 제작한 영상에 등장한 김원봉
▲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의 약산 1940년에 조선의용대에서 선전용으로 제작한 영상에 등장한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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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등진 '자발적 월북자'이기 때문에 그의 독립운동 공로를 서훈할 수 없다는 정부의 입장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김원봉은 독립운동시절 그의 비서였던 사마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북한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수가 없다"는 생각을 피력하기도 했다.

즉,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던 여운형의 피살 이후 친일파와 정치깡패들의 위협이 날로 더해갔고, 때문에 김원봉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월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강제적으로 월북하게 된 김원봉의 상황과 시대적 맥락을 무시한 채 그를 무조건 자발적 월북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조금 억지스러운 논리가 아닐까? 해방 후 선택한 이념에 따라 뜨거운 조국애와 용기를 가졌던 한 인물의 독립운동 공로가 아예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는 현실. 우리는 일제식민지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진정한 독립은 이루지 못한 채,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독립운동가 김원봉. 하지만 현재 그를 기억하는 기념사업회나 관련단체가 하나도 없어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와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등의 항일운동기념단체들이 대신 그의 독립운동 서훈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조국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살았던, 그러나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산처럼 크고 높았던 그의 삶을 이제라도 우리 모두가 기억해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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