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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니까르니까 가트는 시체 태우는 연기로 하루 종일 뿌옇다.(바라나시)
 마니까르니까 가트는 시체 태우는 연기로 하루 종일 뿌옇다.(바라나시)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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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 끝나는 곳에서 강이 열렸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화장터였다.
매캐한 냄새는 갠지스 강물 위로, 가트 주변으로 안개처럼 번져 나갔다.

타들어 가는 시체에서 떨어져 나온 재들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꽃잎처럼 눈물처럼. 샌드위치 같은 장작더미 사이로 죽은 자의 발이 삐죽이 드러나 있다. 세상을 향한 마지막 미련일까.

타닥타닥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들고, 타고 남은 시체는 풍덩!, 강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래야 윤회의 사슬을 끊고 영원한 안식에 든다고 그들은 믿는다.

가트에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거나 눈빛이 형형한 사두(떠돌이 수행자)들을 볼 수 있었다. 인생을 한 바퀴 살아, 더 이상의 미련도 욕심도 다 버린 사두들은 히말라야를 순례하거나 이곳 바라나시로 와서 수행을 하며 죽음을 기다린다고 한다.

사두의 세계에도 서열이 존재하고, 진짜 사두와 가짜 사두들이 말다툼을 하고, 가짜 사두들은 노골적으로 기부를 요구하기도 한다는데, 이방인으로서는 진짜든 가짜든 가름할 필요도 안목도 없다.

바라나시를 찾은 여행자들이, 연기 자욱한 화장터로 꾸역꾸역 모여드는 이유는 어쩌면, 죽음이 아니라 삶을 마주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삶과 분리되어 어딘가에 뚝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저 끝에서 얌전히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죽어가고 있다는 것,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지만 하루하루 죽음의 날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시바신의 도시 바라나시에서는 그렇게 경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짐승들의 배설물이 굴러다니는 골목길을 여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맨발로 걸어 다녔고,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는, 연료가 될 동물의 배설물과 함께 새하얀 빨래가 사이좋게 말라가고 있었다. 그들이 어머니 강이라고 부르는 강가(ganga 갠지스)에서는 하루 종일 시체가 태워지고 연기로 사라졌다.

인간과 동물, 빨래와 소똥, 진짜와 가짜, 삶과 죽음......
경계가 사라져 버린 곳. 경계가 허물어진 곳, 바라나시.

브라만과 불가촉천민, 힌두교와 이슬람교, 오른쪽과 왼쪽, 정(淨)과 부정(不淨)......
그렇게 오래도록 철저하게 편을 가르고 쌓아온 담과 벽이 언젠가는 허물어질 수 있을까. 그 모든 경계를 부수고 무너뜨리고 파괴하고 다시 새로워질 수 있을까.

그들이 왜, 그 많은 힌두신들 가운데에서도 하필 파괴의 신인 시바신을 그토록이나 좋아하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모든 걸 다 버리고 여생을 떠돌면서 수행을 한다는 사두의 세계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는데, 이방인으로서는 도무지 분별할 혜안이 없다. (바라나시)
 모든 걸 다 버리고 여생을 떠돌면서 수행을 한다는 사두의 세계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는데, 이방인으로서는 도무지 분별할 혜안이 없다. (바라나시)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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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3년 1월 한달 동안 인도를 여행했습니다.
델리→조드뿌르→아그라→카주라호→바라나시→아우랑가바드(아잔타 석굴)→뭄바이
우리 가족의 여정은 이러했지만, 제 여행기는 여행의 순서를 따르지 않습니다.
엽서 한 장 띄우는 마음으로 씁니다.



태그:#마니까르니까 가트, #버닝 가트(화장터), #사두, #바라나시, #인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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