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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장 예검비화 채욱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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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문제점은 오히려 금의위에 있습니다. 무극진경을 상대부가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의위에서 알게 되면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 계획을 틀어지게 만들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현 황상은 선제(先帝) 시절 서창의 폐해를 통감하시어, 서창을 폐하시고는 일부 인원을 동창에 흡수시켰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동창이 비대해지고, 그런 동창을 견제하기 위해 금의위와 도찰원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형국입니다. 게다가 금의위 지휘사 모빈(牟斌) 대감은 황상과 조정의 대소신료의 신임을 점차 넓혀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금의위와의 관계가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입니다. 겉으로는 우리의 명을 받고 협조를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누가 먼저 진경을 차지하느냐는 경쟁 관계로 될 가능성이 큽니다."

"현재 금의위에서 이 일과 관련하여 움직이는 인물은 누구라고 봅니까."

노량이 말했다.

"금릉부 총교위인 장반(掌班) 등무(鄧婺), 그 밑의 좌영반(左領班) 조복(曺馥), 우영반(右領班) 오근우(吳勤祐), 그 외 산서와 하남의 장반과 영반들이 움직인다면 우리 은화사의 요원의 무위와 맞수이거나 능가한다고 보면 됩니다."

"음, 단순히 진경의 행방을 쫓아 손에 넣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구려."

채욱이 가느다란 염소수염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니 될 수 있는 한 금의위에도 우리의 임무를 노출시키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럼 그 관조운인가 뭔가 하는 서생을 우리가 쫓는 이유를 금의위에 뭐라 얘기했소."

노량이 되물었다.

"그 자가 염효(鹽梟:암거래 소금 장사)와 결탁해 상계를 어지럽히고 상도(商道)를 희롱하므로 국법으로 다스려야 할 자로 해놨소이다."
"좋소, 금의위에 그자의 행방을 의뢰하고 용모파기를 작성해 중원에 널리 방(訪)합시다."

채욱이 마무리 짓듯 말했다.

금릉부 금의위 관청은 그다지 위압적이 않았다. 포청의 뒷담장과 연이어 붙어 있는 정원에 팔작지붕 전각(殿閣)이 세 채 열을 지어 있을 뿐인데, 그나마 중앙의 전각이 제법 위용이 있어 너비가 십여 장에 달했다. 그래도 후원에서 이어지는 연교장이 휑하니 뚫려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는 규모가 작다고 할 수는 없었다.

홍무제가 대명을 건국했던 시기에는 금의위가 황궁에서도 가장 노른자위라 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영락제 시절 정난의 변을 겪고 난 이후 금의위는 비록 불타버렸다 할지언정 황궁 터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영락제 시절 해체되는 수모까지 당했다가 훗날 선덕제에 이르러 다시 부활한 금의위이고 보니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기관의 열망은 그 어느 관부(官府)보다도 더 뜨거웠다.

연교장과 이어지는 맨 뒤쪽 전각엔 무위청(武喂廳)이란 현판이 전각의 규모에 비해 다소 크다 할 정도로 위엄 있게 걸려 있다. 무위청 안에는 크고 작은 방들이 스무 개가 넘었다. 중앙 회랑을 따라 방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방 마다 전각체로 무(武)자가 새겨진 창살이 넓은 창호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현판과 창살의 글자만 아니라면 이곳이 무와 관련된 관청이라고 여길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그 방들 중의 하나에 금의위 교위 복장을 한 삼십 중후반 어림의 무관이 어린 소년을 품에 감싸고 있는 여인을 앞에 두고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금의위 영반 조복은 필진진 모자를 앞에 두고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아이의 어미는 호락호락한 아녀자가 아니었다. 유서 깊은 고장 향반의 유세가 제 아무리 하늘을 찌른다한들 자신은 황궁에 소속된 금의위 영반이다. 일반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어지간한 관아의 나부랑이들은 오금이 저려 몸둘 바를 모르고, 영감입네 대감입네 하며 제법 휘황한 관복을 입은 벼슬아치라 할지라도 뼈 없는 동물처럼 허리가 굽어지기 일쑤인데, 눈앞의 여인은 마치 벼락 맞은 대추나무처럼 뻣뻣해 있다. 마음 같아서는 그까짓 기울대로 기운 관가장의 과부쯤이야 하고, 성질 급한 머슴 댓바람에 섬돌도 딛지 않고 신짝 날리듯, 앞뒤 자르고 다그치고 싶었지만 여인의 친가 쪽이 심중의 가시가 되어 박혀 있다.

모자를 금의위 옥에 감금하고 난지 불과 반시진도 되지 않아 총교위 등장반이 조복을 불렀다. 등장반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 두꺼비 같은 입을 열렀다. 조영반, 필(弼) 대감 쪽에서 전언이 왔다네. 그리고는 가타부타 뒷말이 없었다. 알아서 그쪽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금릉의 수많은 세가 중 하필이면 필가 쪽의 여식이 이번 일에 연루가 됐다는 게 조복으로선 영 재수가 없었다. 복 없는 과부년 봉놋방에 들더라도 고자 옆에 눕는다더니 금의위 유세를 떨치기는커녕 다 잡은 고기를 놓아주라는 격이니 심사가 꼬일대로 꼬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관조운인가 하는 서생 놈을 잡기 위해선 그자의 형수이자 집안의 맏며느리인 과수댁을 잡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공자왈 맹자왈 하는 작자들은 집안의 법도니 뭐니 하며 가족의 서열이 무슨 코뚜레인 양 이리 끌면 이리 오고 저리 끌면 저리 가며 옴짝달싹 못하고 매달리는 치들이다. 따라서 방이다 수배다 하며 이리 날뛰고 저리 뒤쫓고 할 거 없이 그자의 계수와 조카만 잡아놓으면 누가 떠미는 것도 아닌데 제 발로 들어오게 돼 있다. 그런데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듯 향반의 유세로 은근히 압력을 가하는 것 아닌가. 왕년에 몸 담았던 강호의 섭리대로라면, 그까잇 명문세도가가 무슨 대수랴, 나를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오로지 나의 무공을 꺾을 수 있는 자. 나에게 명령을 내리겠다면 나와 일전을 불사하라. 이런 단순성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그런데 어쩌다 관(官)이라는 곳에 발을 딛고 보니, 그 명료한 단순성이 꼬일대로 꼬여 도대체 하란 말인지 하지 말란 말인지, 혹은 해놓고 모른 척 하란 건지 안 해놓고 한 척 하란 건지 도무지 요령부득일 때가 많았다. 그 와중에 눈칫밥 먹은 지 어언 팔 년, 이제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것을 놓고, 한 척 안 한 척 양쪽 다 능수능란하게 넘나들 경지가 되었다.

이번 경우도 그렇다. 황상의 핏줄이 태조 홍무제가 정한 줄기에서 살짝 방향을 틀어 영락제로 이어진 이후 강남의 세도가들에겐 기회보다는 견제가 더 많았다. 그렇다고 한들 대명의 뿌리인 금릉의 세도가들을 황궁이 아주 외면할 순 없었다. 중원의 구석에 자리잡은 황궁은 외세의 침변을 물리치고 내란의 변고를 잠재우기 위해선 매양 강남의 물적 토대에 의존해야 했다. 그래서 겉으론 견제이지만 물밑으론 항상 협조라는 이중의 행보가 오갔다.

조복이 생각컨대 이번 사건에서 핵심은 관조운에게 있지, 그의 형수인 필진진에게 있진 않았다. 필진진은 관조운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 따라서 윗사람들의 심기까지 거슬리며 일을 이런 식으로 끌고 갈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다하더라도 이 콧대 높은 여인을 호락호락 넘길 순 없었다. 미끼로 이용하진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그자에 대한 단서라도 캔 다음 보내주어야 한다.

"관조운의 죄명은 알고 있소?"

조복이 필진진을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릅니다. 저는 도련님이 죄를 지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
필진진은 싸늘하게 답을 한 다음 입술을 앙 다물었다.

"그 자는 소주의 염효와 결탁해 소금을 뒷거래하고는 그 이익금으로 불온한 무리들과 어울리며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소."

조복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등의 죄목을 씌우지 않고 불온한 무리 운운하며 두루뭉수리하게 표현했다. 훗날 무고죄로 되돌아 올 역풍을 염려에 두었기 때문이다. 불온한 무리, 하면 자연스레 역모가 연상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백이면 백, 자신은 무관하다며 별의별 얘기를 다 털어놓는 게 사람들이 무위청에서 하는 행동이다.

"증거가 있기 전까지 제 앞에서 허황된 이야기는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조영반님."
여인은 조복의 말을 받아치며 그의 관직까지 정확하게 짚어주는 침착함을 보여주었다. 

"소주의 염상 혁련지라고 알고 있소?"
"모릅니다."
"소주에서 제법 규모를 갖춘 염상인데 혼례도 치르지 않은 처자이오. 혼기에 찬 처자가 중원의 법도를 외면하고 오랑캐와 상거래를 하겠다고 나서는 등 수상쩍기 그지없소. 관조운이 그 처자와 함께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소."

"그건 저희 도련님의 일이지 우리 모자와는 상관없는 것 같소이다."

여인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대답했다.

"관가장을 이끌어가야 할 자가 수상쩍은 자와 어울리고 관에서 금지하고 있는 밀매에도 관여하고 있다면, 장차 관가장의 앞날이 어찌되겠소."

조복이 은근한 말투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분명히 말씀 드리는데 관가장의 적통은 지금 내 품 안에 있는 이 아이입니다. 조운 서방님은 관가장에서 뻗어나간 줄기이긴 하지만 뼈대는 아닙니다. 황차 관가장의 앞날은 저와 이 아이가 헤쳐나갈 일이니 외인이 관여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필진진의 대답에 조복은 할 말을 잊었다. 외인은 관조운을 말하는 것인지 조복 자신을 지칭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았지만 그 누구도 현 관가장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은 분명했다.

조복은 눈앞에 있는 여인 심계가 녹녹지 않았다 생각했다. 심문이나 협박으로 여인으로부터 얻어낼 것이 없었다. 그가 생각하더라도 관조운의 행방이나 계획을 이 여인이 알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이 여인을 이용할 수 있는 최대 가치는 인질였으나 그것이 좌절된 지금에는 방면을 하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내 줄 때 보내더라도 향후 관조운과 은밀한 연락을 취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마디는 해두어야 했다.

"아무래도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관가장은 저희의 눈 아래 두어야겠소."
"……"
"관조운의 소식이나 그로부터 통기가 있을 때 저희 금의위에 즉각 협조를 부탁드리오."

그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여인을 보자 조복의 속에서 가시가 돋았다. 그는 일어서서 방 밖을 향해 소리쳤다. 목소리가 가시풀처럼 뾰족했다. 

"누구 없느냐. 관가의 마님을 전송해 드려라."

덧붙이는 글 | 월, 목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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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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