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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만큼 석상(石像)에 민중의 얼굴이 잘 드러나 있는 곳도 또 있을까? 불교나 유교 같은 세련된 외부문화에 집착하지 않고 서투른 돌챙이(돌장이, 석공의 제주말)가 제주석상에 마음 가는 대로 얼굴을 새겨 놓았다.

비숙련 돌챙이가 거친 현무암에 무기교, 무계획적, 무작위로 얼굴을 새겨 놓았다. 힐링을 간절히 바라는 상처 입은 동자석이다(제주돌문화공원에 있는 동자석)
▲ 제주 동자석 비숙련 돌챙이가 거친 현무암에 무기교, 무계획적, 무작위로 얼굴을 새겨 놓았다. 힐링을 간절히 바라는 상처 입은 동자석이다(제주돌문화공원에 있는 동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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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 대로'는 무작위, 무기교, 무계획과 통한다. 인위적이고 기교를 부리거나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다. 개성 강하고 천부적 손재주를 갖고 있는 엘리트 석공이 아닌 무명의 돌장이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제주 사람들에게 민간신앙과 삶, 예술은 한 덩어리다. 그래서 석상 안에는 제주 사람들의 미적 취향이나 심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돌챙이도 제주사람, 민중의 한 사람이어서 막돌에 천연덕스럽게 칼을 갖다 대면 그대로 민중의 얼굴이 되고 민중의 자화상이 된다. 자연석을 돌덩이에 올려놓는다고 해서 제주의 얼굴, 민중의 자화상이 되지는 않는다.

얼굴모양 자연석인데 ‘서투른’ 돌챙이가 새긴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제주사람들의 얼굴, 민중의 얼굴은 아니다.(김영갑 갤러리에서 촬영)
▲ 얼굴모양 자연석 얼굴모양 자연석인데 ‘서투른’ 돌챙이가 새긴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제주사람들의 얼굴, 민중의 얼굴은 아니다.(김영갑 갤러리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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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민중의 얼굴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1700년대. 이즈음 육지에서는 민중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고 불교와 유교에 의해서 그동안 억눌려 왔던 민속신앙의 싹이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육지에서는 민중이 자신들의 얼굴이라 여기며 돌장승을 세웠고 제주에서는 돌하르방과 동자석을 만들었다. 민간신앙이 강하여 불교가 깊숙이 뿌리내리지 못한 제주여서 육지에서 불어오는 '장승바람'은 봇물 터지듯 퍼져 나갔다.

그동안 미숙련 석공으로 남아 있던 돌챙이들은 육지의 장승에서 힌트를 얻고 머릿속으로만 그려온 제주민중, 자신들의 얼굴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미숙련 석공'은 역설적으로 다양한 민중의 얼굴이 태어나게 되는 밑바탕이 된다. 어설프고 서투르고 기교를 부릴 줄 모르는 돌챙이들은 돌하르방과 동자석 등 여러 석상에 갖가지 자신들의 얼굴을 그려가기 시작한다.

돌하르방과 '친척들'

벙거지모자 쓰고 툭 튀어나온 눈에 한쪽어깨는 올라가고 꾸부정한 자세로 서있는 돌하르방, 가는 곳마다 눈에 띄어 엄청나게 많은 것 같지만 애초에 만들어진 건 총 48기, 제주목과 정의현, 대정현 성문 앞에 세워졌다.

장승이나 돌하르방 모두 경계수호 역할을 한다. 장승이 마을 주민의 주도로 마을 어귀에 세워져 신앙적 기능이 강한 반면 돌하르방은 관 주도로 성문 앞에 세워져 성 밖을 경계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관이 민간신앙을 포용한 케이스다.

이렇게 보면 방사탑 중에 인물상을 위에 올린 거욱대가 의미면에서 육지의 돌장승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둘 다 관이 아닌 민간이 주도하였고 마을을 수호하는 민간신앙적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돌하르방은 돌장승과 사촌뻘이고 거욱대 인물상은 돌장승과 이복동생뻘인 셈이다.

육지의 돌장승은 관이 주도한 돌하르방보다 어쩌면 거욱대와 더 가까운 사이다(대정읍 방사탑)
▲ 방사탑 위에 세워진 인물상 육지의 돌장승은 관이 주도한 돌하르방보다 어쩌면 거욱대와 더 가까운 사이다(대정읍 방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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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제주에 왔다하면 하나씩 사갔던 '선물용 돌하르방'은 '제주목 스타일' 돌하르방이다. 옅은 미소를 띠고 있으나 그 미소는 냉소적이다. 무뚝뚝하고 골나있고 노여워하고 찌푸리고 근엄하고 입 꼬리가 처져 무섭게 생겼다. 지금 관덕정과 삼성혈 앞을 지키는 돌하르방이다.

예전 ‘선물용돌하르방’의 모델, ‘제주목스타일’돌하르방이다. 냉소적이고 무뚝뚝하고 근엄하고 입 꼬리가 쳐져 무섭게 생겼다
▲ 관덕정 앞 돌하르방(제주목돌하르방) 예전 ‘선물용돌하르방’의 모델, ‘제주목스타일’돌하르방이다. 냉소적이고 무뚝뚝하고 근엄하고 입 꼬리가 쳐져 무섭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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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오는 '캐릭터 돌하르방'은 키 작고 귀엽고 어린애 같고 천진무구하고 무던한 얼굴을 하고 있는 '대정현·정의현스타일' 돌하르방이다. 1970~1980년대 암울한 사회분위기에서 주로 '제주 스타일'이 나오다가 요즘 '대정 스타일'의 캐릭터가 대세인데, 살기가 좀 나아지긴 한 건가?

요즘 캐릭터돌하르방의 모델, ‘대정현스타일돌하르방’이다. 키 작고 귀엽고 천진무구하고 무던한 얼굴이다
▲ 대정 보성초교 돌하르방 요즘 캐릭터돌하르방의 모델, ‘대정현스타일돌하르방’이다. 키 작고 귀엽고 천진무구하고 무던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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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언제 다시 제주 스타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른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면 언제든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이중적 얼굴을 하는 것이 민중의 얼굴이다. 순한 듯 무서운 얼굴이 돌하르방의 얼굴이고 민중의 얼굴이다.

제주시 동과 서에 동자복·서자복이 있다. 고려의 얼굴이라 하나 추정일 뿐이다. 육지 미륵도 그렇지만 무속 또는 기복 민간신앙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다. 동자복의 경우 툭 튀어나온 두 눈에 벙거지 모자를 쓰고 살포시 미소를 띤 채 두 손을 가슴에 다소곳이 모으고 있다.

전체적 모양이 까다롭지 않고 부드럽고 소탈하게 보인다. 돌하르방을 만들 때 제주 돌챙이는 이 미륵을 머릿속에 그리며 만들었을 법하다. 돌하르방의 고조할아버지뻘 되는 미륵이다. 

홍수를 막아달라고 하늘에 비는 돌이 있다. 조천석(朝天石)이다. 제주시 산지천 경천암에 올라서 있던 농사신이다. 누가 모를까봐 가슴에 '조천'이라 쓴 이름표를 달고 있다. 눈과 코는 돌하르방과 흡사한데 벙거지 모자를 쓰지 않았다. 두 눈을 둥그레 뜨고 합죽한 입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데 하늘에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 진지하다. 돌하르방과 사촌뻘 되는 얼굴이다.

홍수를 막아달라고 하늘에 비는 돌로 제주시 산지천 경천암에 올라서있던 농사신이다. 제주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돌문화공원에서 촬영, 복제품)
▲ 조천석 홍수를 막아달라고 하늘에 비는 돌로 제주시 산지천 경천암에 올라서있던 농사신이다. 제주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돌문화공원에서 촬영, 복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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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가에서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는 동자석은 제주의 돌 문화를 대표한다. 몸과 머리만 있고 다리는 없다. 산자의 심부름꾼인 동자를 죽어서도 데리고 있으니 동자의 마음은 서럽다. 귀엽고 사랑스러워 몹쓸 사람들의 노리갯감이 되어 하나둘씩 무덤가에서 사라져 갔다.

갸름한 얼굴에 머리는 다소곳이 뒤로 땋아 내린 참한 동자, 무엇에 삐쳤는지 뾰로통한 표정의 용암석에 새긴 대머리 동자, 시중 들다 지쳤는지 피곤한 기색에 슬퍼 보이는 동자, 모든 일에 매사 긍정적일 것 같은 현무암으로 만든 '돌쇠형' 동자, 옆에 키 작은 동자를 빈정거리기라도 하듯 씩 웃음 지으며 놀리는 동자가 있다.

갸름한 얼굴에 머리는 다소곳이 뒤로 땋아 내린 참한 동자석(제주돌문화공원에 있는 동자석)
▲ 제주 동자석 갸름한 얼굴에 머리는 다소곳이 뒤로 땋아 내린 참한 동자석(제주돌문화공원에 있는 동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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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질이 고운 조면암으로 만들어 도자기 피부를 자랑하는 이목구비 뚜렷한 '미스제주' 동자, 너무 어려 아무 일도 안 해도 되는 무사태평 서너 살배기 형제동자, 돌하르방을 닮으려는 듯 두 눈이 튀어나오고 제법 근엄하게 서 있는 동자, 힐링을 간절히 바라는 상처 입은 동자 등 생김새도 만 가지 표정도 가지각색이다. 돌하르방의 손자뻘 되는 얼굴이다.

너무 어려 아무 일도 안 해도 되는 무사태평 서너 살배기 ‘형제동자석’(제주돌문화공원에 있는 동자석)
▲ 제주 동자석 너무 어려 아무 일도 안 해도 되는 무사태평 서너 살배기 ‘형제동자석’(제주돌문화공원에 있는 동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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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족 같은 동회천마을 석상군

제주시 동회천마을에 다섯 석상이 있다. 막돌에 아무런 기교를 부리지 않고 돌 굴곡 따라 얼굴을 새긴 다섯 석상이다. 절 입장에서 보면 석불이고 미륵이고 마을제를 지낼 때는 석불열위지신(石佛列位之神)이고 마을사람들개개인에게는 민간신앙석이다. 마을사람들에게는 살강에 올라있는 잡기(雜器)마냥 늘 같이 하고 하나라도 없어지면 서운한 그런 존재다.

마을의 민간신앙석이다. 마을사람들에게는 살강에 올라있는 잡기(雜器)마냥 늘 같이하고 하나라도 없어지면 서운한 그런 존재다
▲ 동회천마을 석상군 마을의 민간신앙석이다. 마을사람들에게는 살강에 올라있는 잡기(雜器)마냥 늘 같이하고 하나라도 없어지면 서운한 그런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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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푹 팬 눈이 무섭지만 하관이 발달하여 믿음직해보이는 석상, 쌍꺼풀에 갸름한 석상, 양쪽으로 머리를 묶어 쌍계(雙紒)를 튼 몽실몽실 귀여운 석상, 재롱 피며 해맑게 웃는 석상, 호박씨 같은 눈에 양미간이 좁아 이국적으로 보이는 석상 등 한 줄로 늘어선 모양이 한 가족 같다.

제주의 얼굴은 거칠다. 벌레 먹은 듯 구멍 숭숭 난 거친 현무암 때문만은 아니다. 오기를 부린 걸까? 가끔 반질반질한 조면암에 새겨보지만 한번 거칠어진 얼굴은 나아지지 않는다. 현무암같은 삶이 배어 있는 얼굴이 조면암에 새긴다고 해서 도자기 피부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었을 거면 애당초 거칠지도 않았을 거다.

제주에서 이 석상만큼 방긋 웃는 석상을 본적이 없다. 제주사람들이 꿈꾼 얼굴은 아닐까?
▲ 동회천마을 석상 제주에서 이 석상만큼 방긋 웃는 석상을 본적이 없다. 제주사람들이 꿈꾼 얼굴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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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제주에서 회천마을의 함박웃음 짓는 석상만큼 방긋 웃는 석상을 본적이 없다. 돌하르방은 말할 것 없이 동자석에서도 본적이 없다. 모두 희미하고 옅은 숨죽인 미소만 있다. 이 석상은 제주사람들이 꿈꾼 얼굴은 아닐까? 돌하르방과 동자석을 포함하여 제주의 석상에서 한 줄 웃음은 언제나 두 줄 웃음이 될까?


태그:#돌하르방, #동자석, #조천석, #동회천마을 석상, #동자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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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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