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9개월 동안 남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쏭고호수 가는 길. 하늘 위 구름이 산 아래로까지 내려와 안개가 자욱하다.
 쏭고호수 가는 길. 하늘 위 구름이 산 아래로까지 내려와 안개가 자욱하다.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자니?"
"아니."
"…. 자?"
"아니…."

불면증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잠들지 못하는 밤. 정신은 명료하나 육신은 피곤한 밤. 그리하여 잠들지 못하고, 그렇다고 일어나 잠이 아닌 다른 일에 집중하지도 못하는 긴 밤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새벽 5시. 각자의 싱글 침대에 누운 더스틴과 나는 잠들지 않는 명료한 정신을 꺼뜨리려 눈물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자려고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정신의 꼬리들이 무의식까지 깊숙이 파고든다. 망가진 카세트 테이프처럼 피폐해진 내 머릿속에서, 그 속을 파고든 정신들이 오래 묵은 생각들을 줄지어 뽑아낸다.

자려고 누운 지는 6시간이 지났다. 한 시간 후면 3753m 고도의 쏭고호수(Tsomgo Lake)에 오른다. 3000m 이상이라면 고산병을 걱정해야 하는 높이다. 고산병이란 건 개인의 평소 체력과 관계없이 무작위로 찾아올 수 있다. 그나마 조심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전날 술을 먹지 않는 것과 일찍 잠이 들어 피로를 푸는 것. 우리는 하라는 대로 했다. 신나는 기분에 맥주 한잔 하고 싶었지만 참았고, 밤 11시에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다.

맥주를 마시지 않은 대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신 것이 화근이었다. 나중에야 들여다본 가이드북은, 갱톡에서 강하기로 유명한 커피를 파는 곳이라며 우리가 갔던 카페를 소개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말로, 혹시 다음날 쏭고호수에 오를 예정이라면 이곳 커피만큼은 피하라고 적혀 있었다.

30분 정도 눈을 붙였다. 말라서 눈물도 안 나오는 벌건 눈을 다시 떴다. 헝클어진 정신을 대충 주워담고, 쏭고호수로 가는 지프에 올랐다.

쏭고호수로 가는 여정의 일행은 총 10명. 지프에는 프랑스에서 온 부부와 아주머니 한 명, 영국과 미국에서 온 젊은 남자 두 명, 리투아니아에서 온 아저씨 한 명, 그리고 운전기사와 가이드 한 명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쏭고호수로 가는 여정의 일행은 총 10명. 지프에는 프랑스에서 온 부부와 아주머니 한 명, 영국과 미국에서 온 젊은 남자 두 명, 리투아니아에서 온 아저씨 한 명, 그리고 운전기사와 가이드 한 명씩이 자리 잡고 있었다.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쏭고호수 가는 길
 쏭고호수 가는 길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뭐 어쩔 수 없지'... 절벽 위를 천하태평하게 오르는 지프

오늘의 일행은 총 10명. 지프에는 프랑스에서 온 부부와 아주머니 한 명, 영국과 미국에서 온 젊은 남자 두 명, 리투아니아에서 온 아저씨 한 명, 그리고 운전기사와 가이드 한 명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쏭고호수까지는 40km. 차로 40km면 한 시간 안에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좁고 구불거리는 산길인 탓에 쏭고호수까지는 3시간 정도가 걸린다. 험상궂어 보이는 날씨가 우리를 도와줄 것 같지도 않다. 산 너머 거뭇한 먹구름이, 지프의 앞날을 암시했다.

지프 한 대가 지나가기에도 빠듯한 좁은 길. 반대편에서 덩치 큰 지프 하나가 등장했다. 이걸 어째. 혼자 마음을 졸이고 있는 찰나, 톱니바퀴가 구르듯 두 대의 지프가 서로의 몸을 엮으며 스쳐 지나간다. 바퀴가 반쯤 걸쳐 굴러가고 있는 길가 옆은 아득한 낭떠러지다.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해 줄 가드레일도 없다.

운전기사는 무사태평이다. 긴장한 건 나와 더스틴뿐인 것 같다. 이런 식이라면, 아슬아슬 절벽 위를 구르던 지프가 바퀴를 헛디뎌 굴러떨어지더라도, '뭐 어쩔 수 없지.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거 아니겠어?' 하고 가볍게 넘길 태세다.

쏭고호수로 이어지는 산길. 내 눈으로 보기에는 지프 한 대 지나가기에도 빠듯한 좁은 길이다.
 쏭고호수로 이어지는 산길. 내 눈으로 보기에는 지프 한 대 지나가기에도 빠듯한 좁은 길이다.
ⓒ Dusitn Burnett

관련사진보기


도로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흙길 한쪽으로, 사람들이 모여 길 공사를 하고 있다. 도로 공사라고 해서 거창할 건 없다. 짚으로 엮은 바구니와 망치, 맨손이 공사 도구의 전부다.
 도로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흙길 한쪽으로, 사람들이 모여 길 공사를 하고 있다. 도로 공사라고 해서 거창할 건 없다. 짚으로 엮은 바구니와 망치, 맨손이 공사 도구의 전부다.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도로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흙길 한쪽으로, 사람들이 모여 길 공사를 하고 있다. 도로 공사라고 해서 거창할 건 없다. 짚으로 엮은 바구니와 망치, 맨손이 공사 도구의 전부다. 한 무리가 바구니에 돌무더기를 담아 바닥에 부어내면, 다른 무리가 주저앉아 손 망치로 그 돌을 잘게 부순다. 사람들 등 뒤로 난 낭떠러지가 아찔하다. 저렇게 일하다 사고라도 나면 보상은 해 주나. 무사히 공사를 마칠 수 있길, 히말라야의 신에게 바랄 뿐이다.

지프가 높은 곳으로 오를수록, 산 위로 드리워진 먹구름에 가까워졌다. 이윽고 하얀 눈이 쏟아져 내렸다. 고도가 높은 산 중턱은 이미 내린 눈으로 꽁꽁 얼어 있다. 얼어서 미끄러운 그 길 위를, 우리를 태운 지프가 무심한 듯 태평하게 굴러간다. 창쪽에 앉은 더스틴이 바퀴 아래를 내려다봤다.

바퀴가 얼음에 살금살금 미끄러져 낭떠러지 주변을 아슬아슬하게 춤추고 있다. 이대로 지프에 앉아 있다간, 얼음 위를 춤추던 바퀴의 장단에 맞춰 저 아래로 굴러 떨어질지도 모른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지프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지금이다! 더스틴과 나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당장에 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고도가 높은 산 중턱은 이미 내린 눈으로 꽁꽁 얼어 있다. 얼어서 미끄러운 그 길 위를, 우리를 태운 지프가 무심한 듯 태평하게 굴러간다. 창쪽에 앉은 더스틴이 바퀴 아래를 내려다봤다. 바퀴가 얼음에 살금살금 미끄러져 낭떠러지 주변을 아슬아슬하게 춤추고 있다.
 고도가 높은 산 중턱은 이미 내린 눈으로 꽁꽁 얼어 있다. 얼어서 미끄러운 그 길 위를, 우리를 태운 지프가 무심한 듯 태평하게 굴러간다. 창쪽에 앉은 더스틴이 바퀴 아래를 내려다봤다. 바퀴가 얼음에 살금살금 미끄러져 낭떠러지 주변을 아슬아슬하게 춤추고 있다.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눈이 잔뜩 쌓인 도로.
 눈이 잔뜩 쌓인 도로.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위스키 한모금에 심장이 대범해졌다

다른 일행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지프에 꼿꼿이 앉아 쏭고호수까지 올랐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군. 다시는 저 지프에 오를 수 없다. 산을 걸어서 내려가는 일이 있어도, 내 목숨을 담보로 한 지프 여행에 다시는 가담할 수 없다. 화가 난 더스틴과 나는 두 눈썹을 치켜뜨고 고집스럽게 눈 내리는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말로만 듣던 털 많은 야크 한 마리가 우리 길을 막았다. 야크를 몰던 목동이 돈을 내면 야크를 타고 호수까지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미쳤니? 평평한 평지에서 잘 길든 낙타를 타고도 떨어지는 내가, 이 산꼭대기 눈길에서 저 거대한 야크를 타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 줄 알고. 꿈에만 그리던 야크와의 첫 대면이다만. 생명의 위기를 느끼는 지금은, 또 다른 위험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눈과 얼음이 뒤섞인 길을 야금야금 올라 호수에 다다랐다. 어느 책에선가 '시킴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칭찬했던 쏭고 호수다. 아름다움? 흥. 아름답기는커녕 하얗게 흩날리는 눈발에 가려 호수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꽁꽁 언 얼음 위로 눈이 잔뜩 쌓인 호수의 풍경은, 올라오면서 눈이 시리게 본 눈밭과 전혀 다를 게 없다.

꿈에만 그리던 야크와의 첫 대면. 생명의 위기를 느끼는 지금은, 또 다른 위험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꿈에만 그리던 야크와의 첫 대면. 생명의 위기를 느끼는 지금은, 또 다른 위험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호숫가에 있는 휴게실에서 중국산 사발면 한 그릇으로 추위와 허기를 달랬다. 날씨는 어디 맛 좀 보라는 듯 갈수록 사나워지며 눈보라를 휘날렸다. 여기까지는 어찌하여 무사히 올라왔다만, 이 눈길을 뚫고 어떻게 다시 갱톡까지 내려가나.
 호숫가에 있는 휴게실에서 중국산 사발면 한 그릇으로 추위와 허기를 달랬다. 날씨는 어디 맛 좀 보라는 듯 갈수록 사나워지며 눈보라를 휘날렸다. 여기까지는 어찌하여 무사히 올라왔다만, 이 눈길을 뚫고 어떻게 다시 갱톡까지 내려가나.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머리가 아프다. 피로가 몰려온다. 장시간 생명의 위협을 받아서 그런지, 어젯밤 한숨도 못 자서 그런지, 높은 고도에 올라와서 그런지. 이유는 다분하다. 호숫가에 있는 휴게실에서 중국산 사발면 한 그릇으로 추위와 허기를 달랬다. 날씨는 어디 맛 좀 보라는 듯 갈수록 사나워지며 눈보라를 휘날렸다. 여기까지는 어찌하여 무사히 올라왔다만, 이 눈길을 뚫고 어떻게 다시 갱톡까지 내려가나.

"안 돼. 절대 못 타. 지프 미끄러지는 거 못 봤어? 걸어서 내려가."

더스틴은 완강했다. 저 눈빛이면 어떤 설득을 해도 고집을 꺾을 수 없다. 지프 바퀴에 달아놓은 스노 체인이 고장 났는지, 운전기사가 여분의 체인을 구해와 바퀴에 달았다. 저게 또 언제 망가질지 몰라. 그래, 걸어 내려가자. 생명을 위협하는 이 위험한 투어에 화가 난다! 심통 난 우리는 걸어 올라온 눈길을 다시 조금씩 내려갔다. 우리를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보라를 뚫고 20여 분을 걸었다. 춥다. 추워도 너무 춥다. 가지고 있는 모든 옷을 입었지만 3753m 고도에서 불어오는 눈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일단 화가 나서 걸어간다고 선언했지만, 지프로 3시간이 걸리는 길을 걸어가는 건 사실 불가능하지 않나. 우리를 뒤따라오던 지프가 우리 곁으로 와서 멈췄다. 우리는 못 이기는 척, 다시 아늑한 지프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눈이 안개인지, 안개가 눈인지. 쏭고호수로 오른 날의 날씨는 끔찍했다.
 눈이 안개인지, 안개가 눈인지. 쏭고호수로 오른 날의 날씨는 끔찍했다.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눈보라를 뚫고 30여 분을 내려갔다. 춥다. 추워도 너무 춥다. 가지고 있는 모든 옷을 입었지만 3,753m 고도에서 불어오는 눈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눈보라를 뚫고 30여 분을 내려갔다. 춥다. 추워도 너무 춥다. 가지고 있는 모든 옷을 입었지만 3,753m 고도에서 불어오는 눈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시킴은 맥주도 좋지만, 위스키가 아주 저렴하고 좋다고. 이 한 병이 고작 200루피(한화 약 4천 원)야. 어디 간도 떨리는데 한 모금씩 마시자고."

런던에서 온 마크가 쏭고호수 휴게실에서 산 300ml짜리 위스키병을 가슴팍에서 꺼냈다. 한 모금 마시더니 뒤에 앉은 톰에게 건넨다. 그다음은 앤 아줌마, 그다음은 조세프 아저씨. 더스틴과 나도 한 모금씩 들이켰다. 취기가 오른다. 취기가 오르니 추위도 조금 가신다. 쫄깃하던 심장도 살짝 대범해졌다. 바퀴가 낭떠러지와 함께 아슬아슬 춤을 추든 말든. 안 떨어지면 장땡이지. 떨어지면…. 뭐,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거 아니겠어?

"어. 저기 봐."

마크가 창문 밖을 가리켰다. 고도를 벗어났는지, 사납게 몰아치던 눈바람도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수 개의 산허리가 서로를 감싸고 늘어서 있다. 산허리 사이로, 저 너머에서 흘러온 구름이 푹신하게 내려앉았다. 그래. 이 정도 선물이라면 마음을 풀어주겠다. 우리에게 고난을 준 먹구름도, 눈보라도, 얼어붙어 그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은 쏭고호수도, 모두 용서할 수 있겠다.

무사히 해발 3753m 통과다. 낯섦에 수줍어하던 히말라야도 나도, 서로를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산 위에 눈 덮인 마을
 산 위에 눈 덮인 마을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고도를 벗어났는지, 사납게 몰아치던 눈바람도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수 개의 산허리가 서로를 감싸고 늘어서 있다. 산허리 사이로, 저 너머에서 흘러온 구름이 푹신하게 내려앉았다.
 고도를 벗어났는지, 사납게 몰아치던 눈바람도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수 개의 산허리가 서로를 감싸고 늘어서 있다. 산허리 사이로, 저 너머에서 흘러온 구름이 푹신하게 내려앉았다.
ⓒ Dustin Burnett

관련사진보기




태그:#쏭고호수, #짱구호수, #시킴, #갱톡, #인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