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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TV에서 방영된 <테레즈 클레르의 삶>의 한 컷.
 Arte TV에서 방영된 <테레즈 클레르의 삶>의 한 컷.
ⓒ 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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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존재를 처음 접했던 건 매혹적인 영화 <보이지 않는 사람들(Les invisibles)>(감독 Sébastien Lifshitz, 2012년)에서였다. 동성애자들의 삶과 그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증언들이 투명한 영상을 통해 비춰졌다. 영화를 통해 인간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솔직하고 감동적인 사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영화에서 테레즈 클레르는 마술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인물이었다.

마술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80대의 테레즈 클레르

당시 이미 80대에 이르렀던 그녀에게선 즐거움이 체취처럼 풍겨 나왔다. 좌파란 세상을 삐딱하게 뒤집어보는 데 익숙한 인물들이 아니던가. 거리에서 정의를 외치고, 금지된 것들을 요구하면서 까칠한 정신으로 40여 년을 보낸 사람의 얼굴에 저토록 화사한 쾌락이 깃들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그렇게 나에게 포착되었다.

테레즈 클레르가 출연한 영화 <Les Invisibles(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포스터.
 테레즈 클레르가 출연한 영화 <Les Invisibles(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포스터.
ⓒ 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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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 클레르를 인터뷰하기로 마음먹고 연락처를 입수한 날, 전화기를 들기 직전, 어쩐지 잠시 뜸을 들이고 싶어져 동네 서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점 앞에서 한 은발의 여인과 마주친다. 그 사람은 나를 알 리 없는 테레즈 클레르였다. 멈출 수 없는 환희의 에너지에 사로잡힌 듯한, 영화에서 보았던 그 미소가 얼굴에 흘렀다.

우아하면서도 모던한 분위기의 옷을 입은 그녀가 나보다 한 발 앞서 서점으로 들어가 책을 한 권 주문한다. 86세에도 읽을 책을 주문해서 받는 이 여자(차마 '할머니'라는 표현을 쓸 수가 없다!).

눈부신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을 걸었다. 방금 전화하려고 수화기를 들다 내려놓고 서점에 왔는데 이렇게 만났다고. 인터뷰를 청하니 바로 자신의 다이어리를 펼쳐든다. 빈자리를 골라 거기에 내 이름과 연락처, 약속 장소를 직접 적는다.

그렇게 우리는 약속을 했고, 일 주일 뒤 '바바야가의 집'에서 서로를 마주했다. 만난 지 1분도 안 된 나를 자신의 수첩 한가운데로 초대한 그녀. 직관과 매력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테레즈 클레르.
 테레즈 클레르.
ⓒ 테레즈 클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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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의 정점―바바야가의 집

테레즈 클레르는 무척 바쁜 일정을 살고 있었다(아마도 44년 전부터 지금까지). 지난 주에는 퀘벡에 다녀왔고, 다음주에는 브르타뉴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거의 매일 언론과의 인터뷰, 세미나, 시청 관계자와의 만남 등의 약속이 빽빽이 잡혀 있다. 이 모두가 '바바야가의 집'(La Maison des babayagas ; 바바야가는 러시아 민화에 등장하는 마녀의 이름) 때문에 빚어진 즐거운(!) 소란이다. 테레즈가 세운 이 노인 공동체를 모델로 한 프로젝트들이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바바야가의 집은 여자 노인들을 위한 새로운 개념의 공동체다. 공간을 대표하는 디렉터나 운영, 행정을 맡아보는 인력이 따로 없고, 공동체를 구축하는 멤버들이 스스로 운영에 참여하는 '자치' 공간으로 '생태주의' '시민 참여' '연대'가 이 공간을 받드는 4개의 정신적 기둥이다. 21명의 여자 노인과 4명의 젊은이가 한 건물 안에 있는 각자의 공간에서 생활한다.

각자가 차지하는 공간의 규모에 따라 200~400유로(약 30만~60만 원)에 해당하는 월세 시세의 절반에 해당하는 월세를 낸다(거의 모든 프랑스 노인들은 국민연금을 수혜하므로 이 정도의 부담은 가능하다). 모든 거주자가 일주일에 5~10시간씩 공동체의 운영을 위한 노동 시간을 제공한다. 각자의 공간에는 부엌과 화장실, 샤워실이 있고 세탁실만 공동으로 쓴다.

함께 일구는 텃밭이 있어 모여서 농사를 지을 수 있을 수 있다. 모두가 매일 만나 강연을 듣고, 서로가 살아오면서 축적한 지식과 지혜, 경험을 나눌 수 있는 민중 대학이 건물 1층에 마련되어 있다. 단, 이 민중 대학에는 이 공간의 입주자들뿐 아니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다.

바바야가의 집은 1995년 처음 테레즈 클레르의 머릿속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85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기까지, 양로원에 보내지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삶의 마지막을 평화롭게 누렸다. 하지만 그를 위해 딸인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희생은,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순간 그녀에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했다. 바로 그 순간, 결코 내 자식들에게 같은 경험을 물려주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자연스럽게 솟구쳤다.

그러나 어떻게! 현존하는 양로원은 무덤으로 가기 전, 아직 살아 있는 처치 곤란한 노인들을 집단 수용하는 공간이다. 거기에 궁색하지 않은 생존이 있을지언정, 살아 있는 자의 존엄과 자유, 죽는 순간까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은 감히 바라기 어렵다. 그곳의 노인들은 잠재적인 환자, 자립성이 없는 불완전한 존재로 취급 당한다. 그렇다고 해서 젊은 세대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늙은 부모를 돌보는 데 삶을 바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절실한 필요는 기적적인 상상력을 분출시킨다.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터져 나온 안도의 한숨에 화들짝 놀란 그녀는 어느 날, 집에 앉아, 흰 종이를 꺼내, 바바야가의 집에 대한 프로젝트를 신들린 듯 써나갔다. 새로운 질문은 그녀에게 언제나 용수철처럼 강력하게 솟구쳐 오르게 하는 에너지를 제공해왔다.

세상에 그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것을 창조해 내리라. 그녀는 폭풍처럼, 때로는 등불처럼, 노인들을 위한 새로운 유토피아 건설의 목표를 높이 세워들고 돌진해 왔다. 노인들이 삶의 주체가 되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살아 있는 연대의 주거 공간! 그것은 혁명적이면서 정치적인 프로젝트라고 그녀는 단언한다.

"2020년이 되면 프랑스에는 65세 이상의 인구가 1700만 명이 된다. 현재도 65세 이상의 인구가 25세 이하의 젊은이 수보다 더 많다."

의학의 발달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 시켰지만 우리는 여전히 수세기 전부터 가져왔던 노년에 대한 고루한 시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노년에 대한 완전히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 노년은 매우 감미롭고 아름다운 시기. 비로소 타인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 호젓한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사회는 그러한 노년의 삶을 위한 그 어떤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 테레즈는 말한다. 늙는다는 것은 사는 것의 연장일 뿐이라고.

여기저기 아픈 곳을 얘기하며 자식들에게 투정이나 부리다가 죽음이 찾아오는 날을 기다리는 대신,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프로젝트를 끊임없이 갖는 것,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온몸을 다해 투쟁하는 것, 마지막 순간까지 활기찬 시민으로 살다 가는 것"이 테레사의 꿈이며, 그녀가 '바바야가의 집'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다. 

2013년에 개관한 여성노인 공동체 '바바야가의 집' 건물 전경.
 2013년에 개관한 여성노인 공동체 '바바야가의 집' 건물 전경.
ⓒ 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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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작 월 1000유로(약 150만 원)의 연금을 받는 일흔이 다 된 노인이 무슨 수로 세상에 존재하지도, 아무도 생각해본 적 없는 노인들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단 말인가? 미국에서였다면 당연히 부자들을 찾아 기부를 호소했을 테지만, 프랑스에서는 이럴 때 당연히 공공기관의 문을 두드린다. 하룻밤에 써내려간 바바야가의 집 프로젝트는 5년간 그녀의 책상서랍 속에 처박혀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와 같은 고민, 같은 어려움에 봉착했던 페미니스트 동지들을 만나 수다를 떨다가 결국 바바야가의 집 설립이 필요하다는 데 세 사람 모두 동의하게 된다. 그것이 2000년이었다. 머리를 맴돌던 일이 비로소 벌어지는 순간은 바로 뜻있는 동지를 만나는 순간이 아니던가. 셋은 바로 협회를 결성했고, 그때부터 회원을 모으고, 온갖 관공서를 찾아다니며 이 신념을 역설했다. 그러나 그 어떤 관공서도 이 무시무시한 혁명을, 더구나 여자들끼리만 모여서 벌이겠다는 모의를 선뜻 팔 벌려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다 결정적 순간이 다가왔다. 2003년의 폭염, 말 그대로 살인적이었던 더위로 무려 1만 7000명의 프랑스 노인들이 집에서 죽어갔다. 정부 관계자들은 모두 휴가를 떠나고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허둥대며 할 말을 찾던 그때, 테레즈는 처음으로 그들이 준비해온 '바바야가 프로젝트'라는 대안을 회심의 카드처럼 언론에 내놓았다.

인구학에 대한 박식한 과학적 통계를 제시하며, 늘어나는 노년층을 지금 이대로 방치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직무 유기를 지적했다. 그 내용이 신선하고 개혁적이어서 누구나 입을 벌렸다. 르몽드가 그녀들의 프로젝트를 대서특필했다. 그 후 셀 수 없이 많은 언론들이 바바야가 프로젝트를 대안으로 입 모아 말하기 시작했다.

공기관도 더 이상은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이윽고 테레즈가 40년째 살고 있는 파리 외곽 도시 몽트뢰유의 시장이 부지를 마련해 주었다. 건설비용 중 200만 유로는 30년 장기 상환으로 빌렸으며, 나머지 200만 유로는 도의회와 주택부가 대부분 마련해 주었다. 또 주택부 장관의 전폭적 지원으로 새로운 형태의 노인 공공주택에 대한 법적 지위도 신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이 한 장에 담겼던 공동체 공간에 대한 청사진이 25개의 독립된 주거공간이 함께 모여 있는 건물로 실현되기까지는 1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968년, 샤넬 정장을 내던지고 거리로

1927년, 테레즈 클레르는 파리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전형적인 가톨릭 부르주아 집안이었다. 다소 특별한 점이 있었다면 각별했던 부모님의 사이였다. 부모님의 침실에서는 언제나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조용해지다가 행복한 얼굴로 함께 나오셔서 즐거움이 맴도는 식탁에 마주앉곤 했다. 테레즈는 50년간 해로하시며 하루도 빠짐없이 사랑을 나누신 두 분이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가장 큰 자산이라고 말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테레즈는 모범생이 아니었다. 학교 공부에 전혀 관심도 재능도 보이지 않았지만 언제나 인기만은 최고였다. 엄마는 외모가 예뻤던 딸을 일찌감치 좋은 신랑에게 시집 보낼 궁리를 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린 엄마에게 결혼이야말로 딸의 행복을 보장하는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다. 부르주아 남편을 만나 결혼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스무 살. 기업가의 아내이자 네 아이의 엄마 노릇을 완벽하게 해내던 그녀는, 그러나 자신의 삶에 큰 허점이 있다는 사실에 점점 눈을 떠갔다.

일탈의 벌레가 사과 속을 뚫고 들어갔던 것은 교회에서였다. 그녀가 다니던 교회에는 목사이자 동시에 노동자인 마르크스주의자 성직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통해서 그녀는 마르크스를 배웠고 억압, 착취, 계급 등 마르크스가 세상을 분석하는 기본적 도구를 습득했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듣고 있노라면, 그녀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아이를 낳아 기르고, 집안 살림과 식사를 준비하며, 밤에는 남편과 원하건 원하지 않건 섹스를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 어떤 보상도 사회적 인정도 없으며, 남편은 그녀가 살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로 취급한다.

목사들 앞에서 그녀는 때때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럴 때면 그토록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삶을 안타까워하던 목사들이, 여자들은 경우가 다르다며 말을 돌렸다.

"당신들은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들입니다."

그녀는 교회도 마르크스도 말하지 않은, 또 다른 계급투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은 가부장사회였고, 그 사회에서 남자는 자본가였으며 여자는 프롤레타리아 중에서도 최하층민이었다.

1965년, 그녀는 우연히 신문에서 '이제부터는' 결혼한 여자도 남편의 '허락 없이' 자신의 통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달음에 자신의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고, 가족수당 지급 기관에 편지를 썼다. '가정에서 자녀들을 위한 비용을 지출하는 주체는 나이므로, 이제부터는 내 통장에 수당을 보내달라.' 기적처럼 그 요구는 즉각 실현되어 그녀의 통장에 가족수당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안 남편은 노발대발했고, 둘 사이에는 점점 더 큰 긴장과 갈등이 차올라왔다.

68혁명의 광풍이 모든 구시대의 악습을 거부하고 깨부수며 반란의 정신들을 거리로 불러냈을 때, 그녀는 순식간에 그 물결에 합류했다. 낮에는 거리로, 대학으로, 토론과 집회 사이를 쏘다니고, 아이들이 학교를 마칠 시간이면 황급히 돌아와 과거의 전형적인 주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데올로기적 외도, 돌이킬 수 없는 일탈이 시작되었다.

자신과 같이 육체와 영혼이 온전히 사로잡혀 있던 여성들을 만났고 지금까지 살았던 곳이 감옥임을 깨달았다. 68혁명의 열기가 잦아들 무렵, 그녀는 몸져누워 병원에 몇 달간 입원했다. 그곳에서 자신이 얼마나 사회성이 발달한 인간인지를 발견했다. 그녀의 입원실은 병원의 모든 여자들이 모여드는 만남의 광장, 모든 일상의 주제들이 논의되는 아고라가 되어갔다. 그녀는 이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1969년 퇴원을 하면서 그녀는 이혼을 택했다. 청소년이 된 네 아이를 데리고. 자유를 품에 안았지만 가난이 엄습해왔다. 그러다 누군가의 대타로 갔던 쁘렝땅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서 그녀는 판매원으로서의 폭발적인 재능(!)을 발견한다. 모든 아이와 엄마들이 그녀 앞에서 홀린 듯 장난감을 사갔다.

그녀는 판매원으로 나선 첫날, 자신이 평생 굶어 죽지 않을 재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샤넬 정장, 하이힐, 과거 부르주아 가정의 귀부인을 상징하던 모든 물건들은 내다팔고 대신 바지와 플랫 구두로 갈아 신었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삶이 그녀 앞에 펼쳐졌다.

당신의 몸은 오로지 당신의 소유물이다

68혁명은 단지 1968년 단 몇 개월 동안 거리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었다. 그때 거리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이후 10여 년간 68혁명의 시절을 연장해가며 68혁명을 일상에 녹여내는 작업을 진행해갔다. 테레즈는 즉각 급진적인 페미니즘 그룹에 합류했다. 그들은 생식의 도구로 철저히 이용되는 여성의 몸이 오로지 그 자신의 것임을 선언하는 작업으로 운동 차원에서 '무료 낙태시술'을 택한다. 슬로건은 '아이? 우리가 원하면, 그리고 우리가 원할 때!'였다. 뜻을 같이 하는 의사들이 몇몇 활동가들에게 낙태시술법을 전수했고, 그녀의 집에서 낙태시술을 시행했다.

68혁명을 즈음하여 페미니스트 그룹에서 만났던 여성들은 서로 금기시해 오던 영역인 '몸'과 '성'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거기서 모든 가임 여성들이 공유해온 가장 오래된 공포는 다가오지 않는 생리 날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피임약은 널리 보급되지 않았고, 여자들은 임신의 기쁨을 누리기보다 더 많은 시간을 '임신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말하지도, 활자화하지도 않았던가? 원하지 않는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낙태를 해야 하지만 여전히 불법이었으니, 그녀들은 엄청난 비용과 건강상의 위협이라는 두 가지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다.

세상의 여자들이 가장 많이 죽었던 순간은 출산 혹은 낙태 시술 때였다. 이 오랫동안 강요된 비밀을 모두가 공유하는 것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밤이고 아침이고, 많은 여자들이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그녀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그러면 같은 건물에 모여 살던 동지들은 각자 역할을 나누어, 또 한 명의 여자가 두려움과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돕는 작업에 착수했다.

다행스럽게도 테레즈가 했던 그 어떤 시술에서도 뜻하지 않은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연대의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던 당시 이웃들 중에 누구도 여전히 불법이던 낙태시술이 집에서 행해지는 사실에 대해 밀고하지 않았다. 1975년, 프랑스에서 낙태를 합법화하는 '베유 법'이 통과되자 페미니스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때부터 프랑스 여자들은 의료보험상의 모든 혜택을 누리며 안전한 환경에서 원하지 않는 임신을 거부할 권리를 획득했다.

테레즈와 그녀의 페미니스트 동지들이 당시 가장 열렬히 탐독했던 사상은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년)의 그것이었다. 그는 68혁명의 가장 뜨거운 이데올로그였고, 가장 핵심적으로 68혁명을 지배한 사상가였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접목하면서 양 진영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지난 시대의 모독된 다이너마이트는 68혁명에 와서 진정으로 부활했다.

그는 성과 정치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그 천기를 누설한 죄목을 뒤집어쓰고 좀처럼 주류 세계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성적 억압에 익숙한 대중은 독재를 원한다는 충격적 논리는 68세대들의 뇌관을 직통으로 건드린다. 여전히 테레즈는 이제 막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세포를 키우기 시작한 젊은이들에게 빌헬름 라이히의 책을 입문서처럼 권한다.

성과 몸에 대한 담론은 68혁명에 와서야 한여름 밤에 대지를 적시는 소나기처럼 온 세상을 흥건하게 적셨다. 비로소 우리는 몸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그 몸의 금기로부터 벗어나 작렬하는 환희를 맞이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몸이, 어느 한 남자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소유한 것이라는 이 단순명료한 사실을 여자들은 혁명을 거치며 비로소 깨달았다.

"몸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삶의 핵심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몸은 억압 당했고, 몸에 대한 사고와 말은 금지 당했다."

그녀의 동료, 친구들은 이러한 라이히의 주장을 통해 정치와 성을 밀접히 연결 짓는 사고를 철저히 구축한다.

당시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이 그러했든 테레즈도 동성애를 경험했다. 동성애를 경험하는 것, 이 또한 그들에게는 확고한 정치적 행위였다. 그것은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배타적인 지배를 거부하는 동시에 여성의 몸이 갖고 있는 모든 쾌락의 가능성을 완전히 열어젖히는 해방의 행위였다. 테레즈는 수많은 여성, 남성들과 함께 몸이 주는 기쁨을 아낌없이 누리며, 태양 같은 에너지를 축적하고, 가는 곳곳마다 폭풍 같은 에너지를 전하는 활동가의 삶을 멈추지 않았다.

정성어린 음식을 만들며 식탁에서 가족들이 둘러앉아 그것을 나누는 데서 큰 기쁨을 느끼던 그녀의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삶의 즐거움은 배로부터 온단다."

그러면 테레사는 한마디 덧붙였다.

"삶의 즐거움은 배 아래로부터 오지!"

어머니는 그런 테레사를 보며 눈을 찡그리면서도, 그녀의 말을 부인하지는 않으셨다!

질문의 노마드를 멈추지 마라

"침실과 거리가 나의 유일한 대학이었다."

어쩌면 이 말은 테레즈를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장일 것이다. 학교 제도에 오래 길들지 않은 그녀에게서는 언제나 경계 없는 상상력과 끝도 없는 새로운 프로젝트들이 솟아났고, 그것을 추진해내는 불같은 에너지가 있었다. 학교에서 거의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그녀였지만, 그녀와 얘기하고 있노라면 세상 그 누구 못지 않은 단단한 지성과 엄청난 문화적 소양을 지닌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활동가 생활이 내게 준 선물이지. 대학은 굳은 지식을 전하는 곳이야. 거기서 배운 지식이 사람들을 해방시키기보다 사람들을 그 지식 속에 가두는 경우가 더 많아. 하지만 운동가는 자신이 꾸는 꿈과 현실에서 마주하는 문제들로 인해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하고 방법을 모색하게 되지. 토론하고 선언하고 실천해 나가면서 온전히 우리에게 피와 살이 되는 지식과 지혜들을 삶 속에서 얻고, 그것은 우리를 더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해방의 열쇠를 제공하지. (…) 그러니 질문하길 멈추지 말 것. 질문의 노마드(유목)로 계속 살아가는 것. 그것이 활동가의 첫 번째 사명이야."

2008년 6월 11일, 리베라시옹 지에 실린 테레즈 클레르. '강한 불꽃, 테레즈 클레르'라고 그녀를 소개하고 있다.
 2008년 6월 11일, 리베라시옹 지에 실린 테레즈 클레르. '강한 불꽃, 테레즈 클레르'라고 그녀를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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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는 마흔한 살에 이혼한 후, 단 한 순간도 페미니스트 활동가의 삶을 멈추지 않았다.

집회와 세미나, 서명 운동, 선언, 때로는 더 직접적인 행동들…. 그녀는 타고난 웅변가였고, 태양처럼 또렷한 존재감으로 자신이 참여한 모든 운동에 훈훈한 열기를 제공했다.

백화점에서 옷을 팔고, 때로는 좋은 바느질 솜씨로 바바야가라는 상호를 내걸고 옷을 만들어 팔기도 했지만 그녀의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운동이 있었다.

언뜻 그녀의 입에서 "활동가의 삶은 내 연금을 높여주지 않지"라는 말이 지나갔다. 나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바로 그렇다. 오히려 반대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내가 단호하게 경계를 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활동가의 삶은 내 모든 시간을 다 잠식하지 않나? 더구나 당신은 네 명의 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다. 어떻게, 당신은 이토록 줄기차게 활동가의 삶을 살아올 수 있었나? 그 끊임없이 가동되는 모터의 역할을 한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나직한 미소로 대답했다.

"한 손에는 성서, 또 한 손에는 <자본론>. 이게 아주 괜찮은 시스템이었어. 나는 지금 무신론자지만, 활동가로서의 기본적인 태도를 모두 성서에서 배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 '일어나라, 그리고 진군하라.' 거기다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지. '그리고 널 옭아매고 있는 사슬을 끊어라.' 운동을 통해서 나는 지식과 우정, 사랑, 정치,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발견했어.

그것은 내 삶의 방식이고, 호흡하는 방식이었어. 나를 움직인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정의' 그리고 '사랑'이야. 정의롭지 않은 일이 눈앞에서 계속 벌어진다면, 그것을 멈추기 위해 어떤 순간에라도 일어나는 것,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그것을 중단할 순
없지.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랑이거든."



태그:#목수정, #생활좌파, #테레즈 클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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