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수다, 영화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먼 옛날, 부산 시네마테크에서 독립영화워크숍을 수료했다. 거기서 만나 나와 절친이 된 여자 친구들은 나를 비롯하여 매일 '조증' 상태였다. 우리들은 매우 솔직했고 내숭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들이 모여 있으면, 하루 종일 거친 웃음을 뿜어 대며 조잘거리는 바람에, 영화 촬영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시네마테크의 블랙리스트에 오를 뻔했으나, 다행히 피해갔던 것 같다.

사람들이 우리들이 뇌를 거의 열어둔 것 같다고 해서 카메라 조리개가 확 열린 것을 뜻하는 'f2.8'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한 녀석이 우리의 대화를 한번 녹화해서 단편영화로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야, 그게 영화가 되겠어? 말도 안돼'

아뿔싸, 그런 영화가 세상으로 나왔다. 우린 그때 영화를 찍었어야 했었다.

3월 말 개봉한 독립영화 <씨, 베토벤(See, Beethoven)>

 영화 <씨, 베토벤> 포스터.

영화 <씨, 베토벤> 포스터. ⓒ 인디스토리

영화 <씨, 베토벤>은 3월 27일에 개봉했다. 연출은 박진순, 민복기 감독이 맡았다. 이 영화는 대학로 차이무 극단의 <씨, 베토벤>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특별한 각색 없이 최대한 연극 그대로 재연했다. 그래서 본 영화는 연극과 유사한 장치가 존재한다. 카메라와 조명이 위치 변경 없이 고정된 상태로 진행된다. 게다가 장소의 이동이 없다. 오직 대학가 인근에 위치한 낡은 커피숍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야기가 끝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여러 가지로 해석 될 수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베토벤 아저씨를 보다'라는 의미와 베토벤 아저씨의 사랑 이야기가 사람들에 거쳐 카핑(Copying)이 되는데 카핑의 머리말을 따 C Beethoven이라고 해석 할 수 도 있다.

30대의 리얼 토크

이 영화의 줄거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30대 미혼여성들의 수다'이다. 주요 인물은 보수적인 연애 관을 가진 '하진'(김소진 분), 솔직하고 자유연애주의자인 성은(공상아 분), 유부남과의 연애로 고민 중인 '영'(오유진 분)으로 이들은 17년 된 고교 동창생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세 명의 여자들의 수다가 영화 전체 맥을 이끌어간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여자들의 수다를 지켜보는 커피숍 주인과, 커피숍에 방문하는 5명의 남자손님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이야기 주제의 전환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이들의 대화는 어느 영화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대사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 실제로 어느 커피숍에서의 여자들의 수다를 고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우리의 일상대화가 매끄럽고 논리적으로 전개 되지 않듯, 이 영화는 우리의 실제대화와 완벽히 닮아 있다.

영화가 진행되는 90분 내내, 여자들의 대화의 내용은 횡설 수설 하고 대화의 주제가 이리저리 전환된다. 그래서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있는 것 보다, 커피숍 옆 테이블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몰래 엿듣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짜릿하다.

그리고 이들의 수다는 매우 노골적이고 가볍다. 이미 고등학교의 순수한 모습은 벗은 여자들의 발칙하고 야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첫 경험'은 언제였는지 혹은 저 남자와의 섹스는 어떤 느낌이었다는 둥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 영화에서 실제 30대들의 수다를 과장되지도 혹은 축소시키지도 않았다. 정말 리얼하게 재연했다.

진솔해 보이지만, 진솔하지 않는 그들의 대화

 영화 <씨, 베토벤> 스틸컷.

영화 <씨, 베토벤> 스틸컷. ⓒ 인디스토리


그녀들은 서로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다 풀어 내놓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각자 인물이 가지고 있는 무거운 짐과 상처는 17년이란 우정 앞에서도 드러내지 못한다. 되려 오늘 처음 이야기를 나눈 커피숍 사장에게 털어 놓을 뿐이다.

솔직해 보이지만 친구에게 털어 놓을 수 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현실을 떠오르게 만든다. 우리 삶에서의 친구관계를 잔인하게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들의 수다는 매우 흥겹다.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서 극적인 전환이 이루어진다. 힘든 고민이 있어 만나자고 제안한 '영'이 친구들로부터 공감과 힘을 얻고 싶어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이해 받지 못하고 되려 비난을 받게 되면서 이야기가 극적인 긴장감으로 전환된다. 어떠한 잘못을 해도 지지해줄 것 같은 친구들의 비난으로 그녀는 세상에 혼자 남겨둔 듯한 공허함과 분노를 느끼며 영화는 끝난다.

수다는 여자 인생의 전부다. 이 영화를 통해 남자들은 여자를 이해할 수 있고 여자들에겐 여자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을 것 같다. 화려하지도 웅대하지 않지만 자연스러운 일상을 느낄 수 있는 영화,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기를 희망한다.

씨, 베토벤 오유진 김소진 공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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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과거가 궁금한 빙하학자 (Paleoclimatologist/Glaciolog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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