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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궁지 근처에만 오면 나는 괜히 찔린다. 궁궐 터 근처에 구(舊)강화군립 도서관이 있는데 그곳에 내가 빚진 게 있기 때문이다. 강화읍의 한 쪽 귀퉁이에 있는 그 도서관은 한때 내가 즐겨 찾던 곳이었다. 하지만 근 십 년 전부터 최근까지 발길을 딱 끊고 통 찾지 않았다. 책을 빌려서 보고는 반납하지 않은 게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책읽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별무소용인 곳이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놀이터다. 나 역시 한때는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도서관을 자주 찾았다. 하지만 근 십 년간 발을 딱 끊고 찾지를 않았는데 요즘은 하루 걸러 한 번씩은 도서관을 찾으니 결별을 했던 옛 연인을 다시 만나는 셈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요즘 나는 도서관과 다시 연애를 하고 있다.

도서관과 연애를 한다

강화도서관에 가게된 건 우연이었다. 2월이 막 시작된 어느 날 저녁에 아는 이들과 덕담을 나누며 저녁을 같이 먹는 자리가 있었다. 오랜만에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읍내에 나왔더니 마음이 설렜는지 모임이 끝나고도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내를 일렁이며 돌아다녔다. 

강화도서관의 모습입니다.
 강화도서관의 모습입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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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불타는 금요일 밤'이어서 그랬던 걸까, 강화읍 번화가의 도로변 주차장엔 차를 세울 빈자리가 별로 없었다. 간혹 빈 곳이 있었지만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차를 세울 수가 없이 빠듯했다. 운전이라면 그저 앞으로 달릴 줄만 알았지 주차는 영 젬병인 터라 차를 세울 때는 무조건 두 대가 설 수 있을 만큼 자리가 넉넉해야 주차를 시도한다. 그런데 남아 있는 자리들은 모두 차가 한 대 들어설 공간밖에 없었다. 그래서 빈자리를 찾아서 주춤주춤 나아갔다. 

그러다가 새로 지은 도서관 근처까지 가게 되었다. 강화읍사무소 근처에 새 도서관이 들어섰다는 이야기는 벌써 전에 들었지만 가보지는 않았다. 오래 전에 책을 빌렸다가 여태 반납하지 않았던지라 어차피 그곳에는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 도서관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참 희한하지, 그날 밤에는 어쩐 일인지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설마 구경하는 데야 별 일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게 기회가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우연하게 도서관에 가게 되었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내 속에 잠재되어 있던 욕망이 나를 그곳으로 이끈 것이 분명했다. 하여튼 나는 그 날 밤에 도서관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새로운 꿈을 만날 수 있었다.

새로 지은 강화도서관은 매우 좋았다. 마치 북 카페에라도 온 듯,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에 책상과 의자들도 편안해 보였다. 커다란 창으로는 강화의 남산이 건너다 보였다. 책을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산이 무연하게 맞아줄 것 같았다. 내 마음은 벌써 연초록으로 물이 든 남산을 그리고 있었다. 새잎이 돋는 봄날에 여기서 책을 보면 얼마나 낭만적일까.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강화도서관의 어린이 열람실입니다.
 강화도서관의 어린이 열람실입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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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도서관은 강화초등학교 뒤에 있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뒤에 있어서 애들과 함께 종종 들러 책을 봤다. 도시에서 살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강화로 이사를 오니 적적하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외롭기도 했는데, 도서관이 우리를 달래주었다.

도서관은 최고의 놀이터다

새 도서관 이층으로 올라가니 일반인 열람실이 있었다. 밤 아홉 시가 다 된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책을 보거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훑어보며 나도 그 무리에 끼었다는 생각에 스스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어떤 새로운 영역에 내가 진입을 한 것 같이 느껴졌다.

사서는 친절했다. 척 봐도 내가 처음 온 사람처럼 보였는지 "도서관에 처음 오셨어요?" 하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내가 물어보기 전에 먼저 말을 걸어줘서 고마웠다. 예전 도서관에는 가봤지만 새로 지은 곳은 처음이라고 하니 회원 등록을 권한다. 그래야 책 대출을 할 수 있고 또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책을 반납하지 않은 전력이 있는지라 선뜻 그러겠다고 응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했다.

독서 매경에 빠진 학생들의 모습이 예쁩니다.
 독서 매경에 빠진 학생들의 모습이 예쁩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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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 전 일이니 내가 책을 반납하지 않았다는 기록은 어쩌면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시 자료가 남아 있다면 오히려 잘 되었다. 우리 집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을 볼 때마다 약간의 죄의식을 느꼈는데, 이번 참에 책을 반납하고 빚을 탕감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신분증을 건네주었더니 옛날에 내가 빌려갔다가 반납하지 않은 책의 목록이 컴퓨터 화면에 뜨지 뭔가.

순간 사서를 보기에 민망해서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었다. 나는 반납하지 않은 책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반납하지 않은 책이 있었네요. 그 책들이 어디에 있을까?" 하며 모르는 척 내숭을 떨었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런 내게 사서는 "책을 잃어버렸으면 새 책을 사와서 채워 넣으셔도 됩니다"하며 오히려 담담하게 대했다.

만약 사서가 말을 신중하게 하지 않고 내가 창피함을 느끼도록 말을 했다면 나는 내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도서관에 발길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담당 사서의 사려 깊은 마음 덕분에 나는 그 이후로도 도서관을 멀리하지 않고 다시 찾아갈 수 있었다. 

블루오션, 강화도

그날 밤 도서관에 가게 된 것은 내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던 욕망이 작용을 했던 것 같다. 유홍준 선생님이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주>편을 읽다가 문득 강화를 소개해주는 책 중에도 이렇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책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강화도'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보았다. 강화도에 관해서 그동안 출간된 책은 많았지만 어린이용 도서가 태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또 역사기행을 안내해주는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강화의 곳곳에는 유적이 널려있다. 그뿐만 아니라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순후한 인심까지 있으니 강화는 어디에 내놔도 앞자리에 우뚝 설 재목감인데도 아직 가치가 제대로 매겨지지 않은 듯하다. 그야말로 강화는 저평가 기대주인 것이다.

강화도서관의 자료열람실 모습입니다.
 강화도서관의 자료열람실 모습입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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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다가 실제의 책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강화도서관'을 떠올렸고, 그날 밤 도서관을 다시 가게 되었다. 강화도서관이니 강화도에 괜한 책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책의 종류에는 어떤 게 있으며 또 어느 정도 있는지 등이 궁금해서 내 발길은 저절로 도서관 쪽으로 향했던 것 같다. 

2층 자료열람실의 문을 조심스레 밀고 들어서자 감개가 무량했다. 서가에 꽂혀있는 책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한 권 한 권의 책들은 글쓴이들이 고심을 하며 써낸 결과물들이니 어느 책인들 소중하지 않겠는가. '도서관은 나침판이고 또 사람을 만나고, 사람이 되는 곳'이라고 쓰여 있는 안내판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러나 강화도서관에는 강화에 대한 책들이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강화군과 강화문화원에서 발간한 자료집들은 많았지만 기성 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출판 홍수의 시대에도 강화는 아직 개척할 게 많은 '블루오션'이 분명했다.

도서관에서 새로운 길을 만났다

공전에 히트를 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도 강화 편은 없다. 또 김훈 작가는 <남한산성>이라는 책을 써서 우리에게 병자호란 때의 남한산성을 생각해 보도록 해준다. 인조가 그곳에서 45일간 버틴 것을 모티브로 작가는 그렇게 탄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그렇다면 몽골의 침략에 맞서 그보다 몇 백 배나 더 긴 시간을 견딘 강화도를 주제로 한 이야기는 왜 없단 말인가. 이야기 거리가 무궁무진한데도 강화는 아직 전인 미답지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화도서관의 자료열람실 한 쪽에는 편하게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는소파도 있습니다.
 강화도서관의 자료열람실 한 쪽에는 편하게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는소파도 있습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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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를 이야기한 책이 많지 않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내게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블루오션'인 강화도를 상장(上場)해 보자. 지금은 저평가 기대주이지만 상한가를 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내가 그 일에 미약하나마 보탬이 되어보자.

그날 밤 나는 도서관에서 오솔길을 하나 발견했다. 강화도라는 큰 산에 올라가보리라. 설혹 산의 정상까지 가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뭐 어떻겠는가. 산자락에 나있는 오솔길을 사부작사부작 걸으면서 한나절을 숲 속에서 노는 것도 참 재미있을 것이다.

도서관은 이제 나의 놀이터가 되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강화읍의 남산이 수굿이 지켜보고 있다. 산마루에 껑충하게 서있는 나무들도 잠잠히 내려다본다.

겨울의 끝자락에 찾았던 나의 오솔길에도 이제 막 새순이 돋아 오른다. 어린 애동나무가 자라서 거목이 되듯 나의 오솔길에 돋아난 새순들도 검푸르게 너풀댈 날이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나는 도서관에서 어정대며 놀고 있다. 


태그:#강화도, #강화도서관,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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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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