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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기를 아주 좋아했고, 먹는 것에 대해 어떤 '관점'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밥상 위의 동물을 그저 먹음직스러운 '고기 조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동물은 물론 우리 인간, 그리고 지구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연재기사에서 저는 채식주의만이 옳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고기를 먹기 전 반드시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고민하면서 '자기만의 관점'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 기자말

경숙씨는 얼마 전 우연히 유튜브에서 <농장에서 냉장고까지(Farm to Fridge)>라는 영상을 시청했다. 미국의 동물보호단체가 제작한 이 영상에는 농장동물이 고기가 될 때까지 겪는 끔찍한 고통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영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경숙씨는 그날부터 고기를 비롯한 동물성 식품을 모두 끊었다. 비건(동물성 식품을 전혀 먹지 않는 완전 채식주의자), 그것도 '순도 100%' 비건이 되기로 결심한 후로 그녀는 무엇을 먹든지 원재료부터 꼼꼼하게 살핀다. 동물성 성분은 단 0.01%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심 때문이다.

경숙씨는 극히 소량이라도 동물성 성분이 들어있다고 의심되면 먹지 않는다. 고기를 구웠던 불판에 구운 야채조차 "고기 기름이 묻었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경숙씨는 외식을 할 때는 채식 식당을 이용한다. 하지만 주변에 채식 식당이 없으면 일반 식당에 가서 완전 채식이 가능한지 물어본다. 예를 들어 된장찌개를 멸치국물이 아닌 맹물과 야채만으로 끓여줄 수 있는지 묻는 식이다. 이렇게 해주는 식당을 찾느라 많은 시간이 걸리곤 한다. 그녀와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까지 불편을 겪는 건 당연한 일이다.

친구들이 융통성을 가져보라고 말하지만 경숙씨는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그녀는 동물성 성분을 약간이라도 먹으면 채식주의자의 정체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비건이 아니면 채식주의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믿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김희진, 정일권, 이현우 역·난장이)에서 "공장식 농장에 가서 돼지들이 반쯤 눈 멀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오로지 도살을 위해 살찌워지는 광경을 보고 난 뒤에도 계속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 과연 있을까?"라고 묻고 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의 본문을 촬영한 사진.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김희진, 정일권, 이현우 역·난장이)에서 "공장식 농장에 가서 돼지들이 반쯤 눈 멀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오로지 도살을 위해 살찌워지는 광경을 보고 난 뒤에도 계속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 과연 있을까?"라고 묻고 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의 본문을 촬영한 사진.
ⓒ 조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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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국내외 동물보호단체들이 고기의 잔혹한 진실을 알리는 한편 채식주의를 운동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줄어들수록 농장동물의 고통도 줄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채식주의'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과거에 비하면 오늘날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동물권·동물복지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국내에도 채식주의자가 꽤 많아졌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동물을 먹으면 안 된다"는 전제에만 집착하여 중요한 것을 놓치곤 한다.  

나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동물성 성분조차 금기시하는 채식주의자들을 적지 않게 목격했다. 나는 실천에 최선을 다하는 그들의 의지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러나 '성분'이라는 지엽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매달리면 중요한 점을 놓칠 수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다.

'성분'만 중시하는 채식주의, 득보다 실이 많다

종교계를 비롯한 각계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가축 살처분 방지 및 제도개선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 27일 오전 광화문 광장에서 AI(조류독감)의 근본원인인 비인도적인 공장식, 케이지 사육 폐기와 복지사육 전면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및 퍼포먼스를 가졌다.
 종교계를 비롯한 각계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가축 살처분 방지 및 제도개선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 27일 오전 광화문 광장에서 AI(조류독감)의 근본원인인 비인도적인 공장식, 케이지 사육 폐기와 복지사육 전면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및 퍼포먼스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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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공장식 축산의 폐해와 농장동물의 고통에 공감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전부 채식주의자가 되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채식주의에 대해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의 목록'부터 떠올리고 '채식은 무리'라고 결론짓는다.

잡식이 주류인 사회에서 채식주의가 불편한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채식주의에 대해 "일상에서 수많은 동물을 구할 수 있다"는 긍정적 측면보다 "불편하다"는 부정적 측면만 지나치게 부각된 것도 사실이다. 이유 중에는 "동물을 먹으면 안 된다"는 전제만 강조된 탓도 있을 것이다.   

채식주의에서 중요한 건 채식만이 아니다. 실천이 나 하나에 머물지 않고 주위의 동참으로 이어지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더 많은 동물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숙씨의 방식은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약간의 동물성 성분도 허용하지 않는 그녀의 완벽주의는 주변 사람들에게 채식을 '대단히 어렵고 불편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고기 기름이 묻은 야채조차 거부하는 행동은 채식주의자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사람'이나 '괴짜'라는 인상을 줄 것이다. 소량의 동물성 성분을 고기 한 근과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은 잡식이 주류인 사회에서 공감을 얻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이런 융통성 없는 태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채식을 하지 않을 (또는 엄두도 내지 못할) 근거"가 된다. 미국의 동물보호 활동가인 브루스 프리드리히는 <카네기에게 배우는 효과적인 운동 전략>에 이렇게 썼다.

"알다시피 사람들이 채식주의자가 되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는 '불편하기 때문'이다. 주위를 보면 치즈나 아이스크림을 끊을 수 없어 채식주의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이 꼭 한두 명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이 채식주의자가 되도록 돕기보다는 오히려 일을 어렵게 만든다. 육식을 중단하되 치즈나 아이스크림은 먹어도 된다고 융통성을 발휘하기보다는 젖소가 어떤 고통에 시달리는지 아느냐며 설교를 늘어놓는다. 이것은 사람들이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게 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어떤 사람이 "삼겹살만은 도저히 끊을 자신이 없다"는 고민을 토로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사람에게 "그러면 채식주의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해야 할까? 현명한 사람이라면 가능한 것부터 실천하라고 격려할 것이다. 삼겹살은 먹어도 다른 고기를 먹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동물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먹을거리는 윤리문제이지만 광신도는 필요 없다."

실천윤리학의 거장으로서 동물해방론에 기초한 채식주의의 철학적 기틀을 확립한 피터 싱어는 득보다 실이 많은 '광신적' 채식주의를 경계했다. 성분에만 집착하여 대중성을 상실한 채식주의는 동참을 이끌어낼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식물의 죽음을 이유로 채식주의가 '위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채식주의는 아무것도 죽이지 않는 '절대선'이 아니다. 누구든 살생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다.
 어떤 사람들은 식물의 죽음을 이유로 채식주의가 '위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채식주의는 아무것도 죽이지 않는 '절대선'이 아니다. 누구든 살생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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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도 생명이고 고통을 느낄지도 모르잖아요.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면서 식물을 죽이는 건 위선이 아닌가요?"
"어패류는 생명이 아닌가요? 어패류를 먹는데, 채식주의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채식주의는 '위선'이라고 말한다. 나와 같은 '페스코' 채식주의자는 여전히 어패류를 먹는다고, '비건' 채식주의자는 식물을 먹는다는 이유로 위선자라는 말을 듣는다. 채식주의도 '죽음'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육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말은 대체로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이 아닐까 싶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김희진, 정일권, 이현우 역·난장이)에서 어떤 말이 실제로 진실이라 해도 그런 말을 하는 '동기'가 거짓인 경우를 가리켜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이라고 불렀다. 채식주의가 위선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식물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정말로 식물을 걱정한다면 더더욱 육식을 줄여야 한다. 현대의 육식이 채식에 비해 최소 열배의 식물을 파괴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날의 공장식 농장에서는 동물에게 곡물을 먹인다. 이렇게 얻는 단백질은 같은 양의 곡물을 인간이 직접 섭취해서 얻는 단백질보다 훨씬 적다. 다시 말해서 육식이 채식보다 훨씬 많은 식물을 죽인다. 이러한 점에서 식량 주권 운동가인 프랜시스 무어 라페는 공장식 농장을 '거꾸로 작동되는 단백질 공장'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앞서 언급한 책에서 브루스 프리드리히는 인간은 누구나 다른 생명의 희생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는 곡식을 베는 농기계나 농약으로 죽어가는 동물들을 언급하면서 "완전 채식주의자도 동물의 죽음을 야기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그는 채식주의는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지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채식주의가 그 무엇도 죽이지 않는 '절대선'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을 최소화하는 노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리고 무분별한 살생과 최소한의 살생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더 이상 채식주의가 위선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채식주의가 위선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경숙씨와 같은 극단적인 채식주의자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바로 "살생을 전혀 야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런 원칙에만 매달리면 종국에는 "암세포도 생명이니까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궤변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완벽하지 않을 바에는 무의미하다?"  

"동물의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면 그 어떤 실천도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사람이 살면서 평생 쓰레기를 배출할 수밖에 없으니 애초에 줄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
 "동물의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면 그 어떤 실천도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사람이 살면서 평생 쓰레기를 배출할 수밖에 없으니 애초에 줄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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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코트를 위해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동물만 불쌍합니까? 먹을거리로 희생되는 동물은 불쌍하지 않아요? 이것저것 따지면 세상에 입을 것, 먹을 것 하나도 없죠."

모피반대 운동에 대한 가장 흔한 반론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물의 고통을 완전히 피할 수 없다는 이유로 충분히 줄일 수 있는 고통까지 합리화한다.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지 못할 바에는 그 어떤 실천도 무의미하다"는 사고방식이다.  

과연 그럴까? 세상에 산적한 모순과 부조리를 해결하려는 인류의 노력이, 그리고 각자의 삶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노력이 오로지 저 멀리 있는 '완전무결한 상태'만을 위한 것일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할 바에는 그 어떤 노력도 필요없는 걸까?

어느 부부가 있다.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던 남편은 결혼할 당시 아내에게 모든 것을 헌신하기로 맹세했다. 아내가 집안일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조차 원치 않았던 그는 직장에 다니면서도 가사를 도맡다시피 했다. 그러나 회사업무가 많아지고 야근이 늘어나면서 점점 아내를 위한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졌다. 그러자 불만이 쌓인 아내가 어느 날 이렇게 외쳤다.

"당신,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지? 우리 이혼해!"   

남편은 정말로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그렇지 않다. 완벽하게 헌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남편의 사랑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동물을 위한 실천도 다르지 않다. 채식주의는 완벽을 추구하는 욕망이 아니라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려는 실천이다. 잡식이 주류인 사회에서 채식주의자는 본인의 의지는 물론 사회구조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급식 때문에, 회식 때문에, 또는 그밖의 피치 못할 이유로 고기를 완전히 끊지 못한 채식주의자들의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없다. 가능한 만큼 최선을 다해 지금까지 수많은 생명을 구해온 그들의 노력이 헛되다고 말할 수 없다.

부부에게 겉으로 보이는 헌신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향한 진심이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무의미하다고 말하지 말자.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격려해주자. 동물과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는 마음을 지지해주자. 인간에게 모든 걸 빼앗기면서도 항의조차 못하는 동물들을 위해 우리 인간이 그 정도 마음은 써볼 수 있지 않을까?

(*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1. 알러지를 비롯하여 건강상의 이유로 채식을 하는 사람들에게 성분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이 기사의 논의는 건강·종교가 아닌 윤리적 채식에 한합니다.

2. 브루스 프리드리히의 <카네기에게 배우는 효과적인 운동 전략>은 <동물과 인간이 공존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들>(피터 싱어 저·시대의창)에 수록된 글입니다.

3. 영상 <농장에서 냉장고까지(Farm to Fridge)>은 유튜브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잔인하므로 임산부·심약자의 주의를 요합니다).



태그:#동물권, #채식, #식물, #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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