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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10월 31일 밤에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듯이, 3월 31일 밤에는 다음 날의 만우절 장난을 기획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내일이 만우절이구나', '내일은 속지 말아야지', '내일은 속여야지' 등등. 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3월 31일 밤을 정신없이 보내는 사람들은 다음 날 아침에 피해자가 되기 쉽다.

우리의 인식에 깊숙이 침투한 만우절은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 고유의 풍속이 아니다. 이것은 유럽 풍속이다. 우리 문화도 서양에 전파될 수 있고 서양 문화도 우리에게 전파될 수 있으니, 서양 풍속인 만우절이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서양 풍속을 따를 때도 최소한의 원칙은 있어야 한다. 유사한 풍속이 우리나라에 없거나 우리나라 풍속이 서양 풍속보다 못하다면, 서양 것을 따라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유사한 풍속이 있거나 우리나라 풍속이 서양 풍속보다 훌륭하다면, 굳이 서양 것에 경도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서양 만우절과 우리 고유의 만우절을 비교해보면, 우리가 왜 굳이 서양 만우절 때문에 소동을 벌어야 하는가 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첫눈 오는 날 남 속였던 고려시대 풍속

만우절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프랑스에서 정월 초하루가 바뀐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견해다. 1563년까지 프랑스에서는 지금의 3월 25일이 정월 초하루였다. 이 날 시작된 신년 축제가 끝나는 4월 1일에 사람들은 신년 선물을 교환했다.

그런데 1564년부터는 지금의 1월 1일이 정월 초하루가 됐다. 그래서 새해 선물도 1월에 주게 되었다. 그러자 짓궂은 사람들은 예전처럼 4월 1일에 신년 선물을 줘서 상대방을 착각에 빠뜨리곤 했다. 4월 1일이 신년 첫날인 것처럼 거짓말을 해서 상대방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이런 장난이 전 유럽에 퍼지면서 17세기 초에 만우절이 생겼다는 게 가장 일반적인 설명이다.

이처럼 서양 만우절은 처음에는, 선물을 주면서 거짓말을 하던 풍속이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선물도 주지 않고 골탕만 먹이는 풍속으로 바뀌었다. 그다지 유익할 게 없는 풍속으로 변한 것이다. 

유럽에서 만우절이 생기기 훨씬 전인 고려시대부터 한국에서는 유사한 풍속이 있었다. 세종 즉위년 10월 27일자(양력 1418년 11월 24일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첫눈이 오는 날에 남을 속이는 풍속이 생겼다. 이런 풍속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백성들 뿐 아니라, 왕족들도 만우절을 즐겼다?

눈 덮인 성균관 대성전(공자 사당).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소재.
 눈 덮인 성균관 대성전(공자 사당).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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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세종실록>에 묘사된 한국식 만우절을 이해하려면, 머릿속에 세 사람을 떠올려야 한다. 유럽식 만우절에는 두 명이 필요하지만, 한국식 만우절에는 세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A·B·C 세 사람을 등장시켜 놓고 한국식 만우절을 재구성해보자.

겨울이 되자 첫 눈이 내린다. A는 반가운 마음에 눈을 얼른 쓸어 담아 나무 상자에 담는다. 그러고는 B에게 "이거 C한테 좀 갖다 줘, 내가 주는 선물이라고 말해줘"라고 부탁한다. B는 상자를 들고 C의 집으로 간다. B는 C에게 "A가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라고 말한다.

만약 이때, C가 A의 속임수를 알아차리고 B한테 "너 이놈! 나를 속이려고?"라며 B를 붙든다면, A가 한턱을 내야 했다. 첫눈 오는 날에 남을 제대로 속이지 못한 죄로 벌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반면에, B가 건네는 나무 상자를 진짜 선물인 줄 알고 C가 "어! 그래?"라며 상자를 덥석 받아든다면, C가 한턱을 내야 했다. 첫눈 오는 줄도 모르고 남한테 속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왕족들도 이런 만우절을 즐겼다는 이야기가 위 날짜의 <세종실록>에 소개되어 있다. 1418년에 태종 이방원은 아들인 세종한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됐다. 당시, 태종의 형인 정종도 상왕이었다. 상왕이 둘이기 때문에, 태종은 그냥 상왕이라고 부르고 정종은 노상왕이라고 불렀다.

양력으로 그해 11월 24일 첫눈이 내렸다. 첫눈을 본 태종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형님인 정종에게 장난을 칠 계획을 구상한 것이다. 참고로, 당시 태종은 쉰두 살, 정종은 예순두 살이었다. 태종은 첫눈을 상자에 담은 뒤 환관(내시)인 최유에게 "이거 노상왕께 갖다 드리면서 몸에 좋은 음식이라고 말씀드려"라고 시켰다.

최유는 상자를 들고 정종을 찾아갔다. 정종은 그 상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최유의 주인인 태종이 자기한테 만우절 장난을 치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정종은 최유가 다가오기 전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최유를 붙들어야만, 동생이 걸어 온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상왕이 붙잡으려 하면, 환관은 당연히 붙잡혀줘야 했다. 환관이 도망가는 것은 불경스런 행동이 되기 쉬웠다. 그런데 최유는 '감히' 달아났다. 장난으로 달아났던 것이다. 이 날만큼은 이런 장난이 용서됐던 것이다. 결국 정종은 최유를 놓치고 말았다.

이 경우, 누가 한턱을 냈을까? 태종의 속임수는 정종에게 들켰다. 그런 면에서 보면, 태종이 진 것이다. 하지만 정종은 최유를 잡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정종이 진 것이다. 이 경우에 누가 한턱을 냈는지는 알 수 없다.

첫눈 오는 날에 이런 장난을 한 것은 그만큼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기분 좋은 날이기 때문에 웬만한 거짓말 장난은 용납됐던 것이다. 옛날 사회가 농업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첫눈을 환영한 것과 첫눈 오는 날에 장난을 친 것이 다 이해될 것이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기뻐했던 선조들, 왜일까

농사하는 사람들. 서울 광화문광장 지하에 있는 ‘세종 이야기’에서 찍은 사진.
 농사하는 사람들. 서울 광화문광장 지하에 있는 ‘세종 이야기’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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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한국인들은 첫눈을 '새 눈' 즉 신설(新雪)이라고 불렀다. 신설이 내리면 백성들은 물론이고 정부에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축하 행사를 벌였다. 이것을 신설하례(新雪賀禮)라고 불렀다. 이 날 군주와 신하들은 시를 지으면서 첫눈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고려시대 문장가인 이규보(1168~1241)가 신년하례 때 왕에게 제출한 축하의 글이 조선시대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이규보는 "눈이 펄펄 내려 한 자나 쌓이는 길조를 보이고, 농토를 두루 적시어 땅을 소생시키니, 질풍처럼 달려가 펄펄 춤을 춥니다"라고 찬미했다.

이 글을 보면, 첫눈이 농토를 적시고 땅을 소생시키기 때문에 온 나라가 축하 행사를 벌였음을 의미한다. 겨울에 눈이 제대로 내리면 특히 보리농사가 잘됐기 때문에 온 나라가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농사에 꼭 필요한 첫눈이 내리면 온 나라가 축제를 벌이고, 그런 와중에 누군가가 장난으로 거짓말을 해도 다 용납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옛날 풍경이었다.

첫눈에 대한 기쁨 표현하는 한국식 만우절 풍속

이런 데서 느낄 수 있듯이, 한국식 만우절은 국가경제와 직결되는 첫눈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는 풍속이었다. 정월 초하루가 3월 25일에서 1월 1일로 변경된 것을 계기로 생겨난 유럽식 만우절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지금의 서양식 만우절에는 짓궂은 장난이 벌어지고 누군가가 골탕을 먹는다. 하지만 한국식 만우절에서는 그럴 일이 없었다. 첫눈을 선물로 착각한 상대방이 실망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큰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 또 첫눈 그 자체가 큰 선물이므로, 상자 속의 눈을 보고 불쾌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어느 모로 보나 한국식 만우절은 서양식 만우절보다 뜻있고 유쾌한 풍속이었다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4월 1일 만우절을 당장에 잊어버리고 첫눈 오는 날에 우리식 만우절을 즐겨보자는 것이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산재한 서양식 풍속을 다시 돌아보고, 우리 고유의 풍속을 외면하면서까지 서양식 풍속에 매몰될 필요가 있는지를 한 번쯤 생각해보자는 것이 이 글의 취지다.

구한말 개화기 때 정신없이 받아들이고, 해방 이후 미군이 던져주는 초콜릿과 함께 주워 들인 서양문화 속에는 제대로 검토해보지도 못하고 무분별하게 수용한 정체불명의 것들이 적지 않다. 서두에서 언급한 <잊혀진 계절>에는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라는 대목이 있다. 정체불명의 서양문화는 우리에게 '뜻 모를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이제는, 하나하나 차근차근 우리의 문화를 재점검할 때다.


태그:#만우절, #게릴라 칼럼, #첫눈, #신설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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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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