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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월 6일(목)부터 다섯차례에 걸쳐 <오마이스쿨> 오프라인 강좌 <공격하는 국가,사냥꾼의 사회>를 여는 문화학자 엄기호 선생.
 오는 2월 6일(목)부터 다섯차례에 걸쳐 <오마이스쿨> 오프라인 강좌 <공격하는 국가,사냥꾼의 사회>를 여는 문화학자 엄기호 선생.
ⓒ 오마이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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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는 젊은 사회학자 엄기호의 최신작이다. 저자 엄기호는 <경향신문>이 지난해 10월에 선정한 '뉴파워라이터' 중 한 명이다. '곁'을 중시하는 그의 글쓰기가 많은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였던 것 같다.

'곁'의 문제는 책 <단속사회>에서도 중요한 화두로 제시된다. 저자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은 "'편'을 강요하고 '곁'을 밀치는 사회"에 대한 우울한 보고서다.

"지금 우리 곁에는 말을 듣는 사람은 점점 사라져가고 자기 말을 들어달라는 사람만 가득하다. 자기 말은 호소하고 싶은데 남의 말을 듣는 것은 힘들어지면서 사람들은 힐링이니 상담이니 하는 사적이고 상업적인 자리로 재빠르게 몰려갔다.

(중략) 힐링과 상담이 아닌 일상생활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곁이 사라진 자리를 편으로 메꾸며 악몽으로 만들어간다. 곁을 파괴하고 편을 강요하는 것, 이는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본문 7쪽)

이 책의 제목에 쓰인 '단속'이라는 말은 두 가지로 풀이된다. 같고 비슷한 것에는 끊임없이 접속하지만, 타인의 고통 같이 조금이라도 나와 다른 것은 철저히 차단하는 '단속(斷續)'이 그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주의를 기울여 자기를 다잡거나 살피는 '단속(團束)'이다.

저자는 이들 두 가지 의미를 종합해 타자와의 관계는 차단한 채 동일성에만 머무르며 자기 삶의 연속성조차 끊어져버린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단속'을 사용한다. 이를 통해 저자가 던지려는 질문은 '편만 남고 곁이 파괴된 사회를 과연 사회라고 할 수 있는가'다. 저자는 단속이라는 말로 한국사회가 '사회가 아닌 상태의 사회'라는 역설을 드러내려는 시도가 바로 이 책이라고 말한다.

인간관계, 이젠 소비된다

<단속사회> 책표지
 <단속사회> 책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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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이 사라져가는 사회를 향한 저자의 비판은 '관계의 단절'이나 '관계의 파편화'와 같은 말로 단절을 실존화해 해석하는 경향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개인화'라는 말이 한계가 많다고 주장한다. 늘 '관계'를 염두에 둔 채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과 경험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우리가 어떤 관계가 단절됐고, 그 단절의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오프라인에서는 단속하고 온라인에서는 접속하는 이들의 인간관계는 더 이상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저자는 대다수 사람들이 고통과 상처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더 드러내고 나아가 구경거리로 소비하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든다.

"일상의 공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반면,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낸다. 어떤 때엔 자신의 하루 전체, 그리고 짧게짧게 떠오르는 모든 생각까지도 SNS에 중계방송한다. 카카오톡 같은 문자서비스에는 24시간 접속해 있다."(본문 67~68쪽)

'관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의 참조그룹 개념을 통해 알아보자. 저자는 삶에 실제적인 조언과 충고를 주는 관계를 우정으로, 그런 관계의 망을 참조그룹으로 명명한다. 참조그룹이 빌려주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실제적 조언과 충고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그렇다면 참조그룹은 '나'와 다른 점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에게 더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다. 저자도 참조그룹의 특징으로 '같음/동일성'이 아니라 '다름/타자성'을 들고 있다. 그 '다름/타자성' 덕분에 '나'는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다른 조언과 충고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현인들이 충고와 조언을 아까지 않는 관계를 우정으로 불렀다고 말한다. 이런 우정을, 저자는 철학자 김영민의 말을 빌려 '서늘한 관계'로 묘사한다. 김영민은 심지어 우정을 동무(同無), 즉 같은 것이 없는 관계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단속사회는 사람의 성장이 불가능한 사회다. 왜 그런가.

"낯설고 모르는 것과 부딪치고 만나며 경험을 확장하고 갱신하고 통합하며 자신의 삶의 서사적 주체가 되려는 그런 성장은 불가능해졌다. 그대신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면 미친 듯이 자기를 소진해가고 그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무기력하게 널브러지는 것을 무한 반복하게 된다."(본문 32쪽)

'곁'이 쓸모없어진 사회

저자는 단속사회의 사람들이 남을 믿지 않고 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를 단속하면서도, 어딘가에서는 다른 이들과 끊임없이 접속해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그러다가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벼락같이 연결을 차단하는 모습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말을 하고 안 하고는 곧 '관계 맺음'을 전제한다. 말을 함으로써 우리는 관계를 맺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을 통해 관계를 차단한다. ··· 이렇게 차단된 시공간에서는 표정 하나에 이르기까지 단단히 옷깃을 여미고 절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상처를 말하는 방식, 즉 누구에게 말하고 어디에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가다."(본문 71쪽)

'곁'이 쓸모없어져 버린 사회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서늘하다. 저자는 대표적으로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상대로 한 민사소송과 손해배상을 예로 든다. 저자가 소개하는 사례들은 우리 눈을 의심케 한다.

2003년 10월, 35미터 높이의 크레인 위에서 129일간 농성하다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은 기본급 105만 원에 수당을 포함한 급여액 160만 원 중 70여만 원을 가압류당해 세금과 융자상환금 등을 제하고 남은 13만 원으로 아이 셋을 키웠다.

또 다른 노동자는 13억 원의 가압류가 떨어진 것도 모자라 입사 당시 신원보증을 섰던 아버지와 숙부의 집, 심지어 조모의 집과 선산까지 가압류당했다. 고등학교 은사의 집을 가압류당한 노동자도 있다고 한다.

"민사소송과 손해배상은 이처럼 파업에 동참한 노동자들을 강제로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거나 그러리라 위협하는 것이 더 이상의 목적이 아니다. 이제는 노조와 노동자를 경제적으로 파산시키는 것이 주목적이다. 좀 더 궁극적인 목적은 노동자들의 시장능력을 완전히 박탈함으로써 생계를 파괴하고 생계를 기반으로 묶인 가족과 친척 등 사회적 관계 역시 파탄으로 몰아가는 것이다."(본문 215쪽)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의 껍데기까지 발가벗기는 국가폭력에 대해서도 저자는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저자에 따르면, 격리는 국가가 그 사회에 존재하는 모순과 적대를 법의 이름으로 은폐하고 제거하는 고전적인 방법이다. 내부의 적을 제거하는 훌륭한 통치술이 바로 격리다.

이것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질서를 위협하는 '무질서' 유발자로 여기고 이들을 사회로부터 도려내 격리할 때 질서가 지켜지고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논리다. 저자는 파업에 대한 탄압에서부터 부랑자에 대한 처벌까지를 아우르는 논리가 바로 이 '질서'와 '무질서'의 대립이라고 본다. 파업 때마다 '무질서와 폭력 행위 엄벌'을 되뇌는 경찰의 스테레오 타입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장 그리고 경청

그 모든 고통에 대면하고, 곁이 사라져가는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성장이다. 저자는 '빗장 건 사회'(gated society)에서는 사람이 초조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자신만이 뒤떨어지고 뒤떨어지는 것 같다는 불안감이 늘 초조함을 부추긴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렇게 초조함이 지배적인 감정상태가 된 사회에서 개인들이 자신을 멈추게 하는 다름/차이와 철저히 차단하려 하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성장이 불가능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신이 질서라고 믿는 한계 바깥에 더 큰 질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낯선/모르는 것'과의 만남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 … 배움을 통한 성장은 기존의 질서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던 질서를 발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본문 240~241쪽)

그러기 위해서 저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경청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경청은 우정의 소산이다. 그 경청을 통해 우리는 자기도 모르던 자기의 삶, 즉 자기 삶에 내재되어 있는 타자성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그러한 타자성을 깨달음으로써 나와 너는 그 타자성을 공유한 사람으로서 공통의 운명이 된다고 말한다.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았으면서도 다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툼을 벌이는 부모와 자식, 실랑이를 벌이는 교사와 학생 사이가 그렇지 않을까. "엄마가 무슨 말 하려는지 잘 알거든, 그러니 내 말 들어봐"라고 말하는 자식과, "나도 네가 하고 싶어하는 말이 무엇인지 다 알아, 그러니까 엄마 말 들어"라고 말하는 엄마를 떠올려 보라.

저자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다 안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우리가 듣지 않고 생각하기를 멈출 때 우리는 또 다른 나인 줄 알았던 친구에서 적대하는 남인 '개새끼'가 된다고 꼬집는다. 저자의 말처럼, 친구과 개새끼가 한 끗 차이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경청에 힘써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단속사회>(엄기호 지음 / 창비 / 2014.3.14. / 306쪽 / 1만5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지음, 창비(2014)


태그:#<단속사회>, #엄기호, #다름/타자성, #성장, #경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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