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아>는 <블랙 스완>으로 유명한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첫 블록버스터 영화로 개봉 전부터 화려한 캐스팅과 많은 제작비로 사람들의 기대를 모아왔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를 연상시키는 감독의 전작 <블랙 스완>은 어머니로 대표되는 순수예술의 억압과 그와 대비되는 동료 릴리, 그리고 그 사이에서 혼란과 갈등을 느끼다 파멸에 이르는 주인공의 모습을 탁월한 심리묘사를 통해 잘 묘사한 수작이다.

이제 그의 새로운 작품인 <노아>가 개봉했다. 그가 그리는 노아는 완벽한 존재가 아닌 불완전한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노아이고, 노아의 갈등과 고뇌를 어떻게 그려냈는지 기대되는 작품이다. 이런 류의 종교를 다룬 영화들이 개봉했을 때 일어나는 공통적인 현상은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내용이나 감독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기독교와 반기독교로 나뉘어서 소모적인 논쟁만을 벌인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내용을 다룬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 역시 동명으로 영화화 되어 국내에서도 많은 논란과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영화를 통해 작가나 감독은 종교를 폄하하거나 모독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배와 이를 둘러싼 살인과 음모를 통해 종교적 독선과 맹목적 신념의 위험성, 진실이라고 믿었던 이면에 감추어졌던 또 다른 진실, 정통과 이단 등의 현대사회의 중요한 문제점들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주제는 오늘날 전 세계의 현대문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들이며,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이나 매튜 펄의 <단테 클럽>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단순 종교 이야기가 아닌 현실세계 비추기

영화 <노아> 역시 단순히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어서 논란을 일으킨다거나, 종교를 비판하거나 모독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현실세계를 비추고 현재의 문제점을 성찰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영화를 편협하게 종교모독이라고 폄하하거나, 혹은 종교를 다루었다고 해서 배타적으로 보는 것은 이 영화 속의 중요한 메시지를 보지 못하고 놓쳐버리게 만드는 어리석은 태도일 것이다.

좋은 영화는 그것의 배경이 과거를 다루는 역사물이든 미래를 다루는 SF이든, 혹은 아예 다른 세계를 다루는 판타지영화이든 언제나 결국 현실의 문제점과 모순들을 비추고 중요한 질문들을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서 속 창세기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영화화한 <노아>를 통해 현실세계의 여러 문제점을 이야기하며 오늘날 고민해봐야 할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노아>는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의인 노아(러셀 크로우 역)에 관한 이야기이며 성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이다. 인간들의 오랜 악행과 타락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신은 큰 홍수를 내려서 모든 인간들을 없애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인간들 중에서 '의인'인 노아에게 커다란 방주를 만들어 죄 없는 동물들을 살리는 임무를 맡긴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그 임무를 잘 마치고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된다. 이러한 복잡하지 않은 서사에다가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성서와는 다른 설정들을 첨가하는데, 네피림(Nephilm)이라든가 일라(엠마 왓슨 역)를 등장시켜 노아의 인간적 고뇌와 가족 간의 갈등, 신과 인간의 관계 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노아 속 생태주의

영화는 아담과 하와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온순하게 생긴 뱀은 허물을 벗고 본 모습을 드러내고 아담과 하와는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이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선악과 장면은 모든 대극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이전에는 모든 것이 하나로 존재했던 세상에서, 인간들은 선과 악의 지식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인해 신과 인간, 빛과 어둠, 남자와 여자, 선과 악과 같이 두 가지의 대극으로 나뉘어진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바깥으로 쫓겨나는 것으로 비유되고 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 자신들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가린다. 선악과와 그것을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행동에 대해서는 여러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인류가 최초로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을 한 것이라는 점이다.

아담과 하와의 첫째 아들인 카인은 둘째 동생인 아벨을 질투심에 죽이게 되고, 그 죄로 카인은 추방당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널리 퍼져 도시를 이루고 세상을 오염시키고 타락시켰다. 한편, 아담과 하와의 셋째 아들인 셋은 홀로 의롭게 살았는데 그의 자손이 바로 노아이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성서에 나온 '의인'이라는 표현처럼 남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해치는 일 없이 조용히 은둔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 카인의 후손들이 약탈하고 난 폐허에서 홀로 살아남은 어린 여자아이 일라를 구해낸다. 배에 깊은 상처를 입은 일라는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노아는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는데, 그는 꿈 속에서 물 속에 잠겨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하고, 그가 밟은 땅은 피로 물들어 있다. 이 영화는 포스트휴머니즘 혹은 생태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데, 피로 물든 땅은 인간들로 인해 오염되고 파괴되어버린 자연과 인간 생태계, 혹은 홍수로 인해 죽어버리게 될 인간들의 운명을 상징한다.

생태주의는 지금까지의 인간의 생활태도이나 사고양식이 물리적뿐만 아니라 정신적 생태계까지 파괴한다고 경고한다. 자연과 인간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태계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생태주의에서 말하는 생태계의 범위는 자연생태계만이 아니라 인간생태계까지를 총칭한다.

타자에 대한 착취나 차별, 독재정치, 여성과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 등은 모두 인간생태계의 파괴를 가져오고 그 후유증은 아주 오래 지속된다고 말한다. 인간의 정신적 생태계의 파괴로 인해 결국 세계 2차 대전이나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같은 비극을 일어났다는 것이다.

과연 영화 <노아>에서 카인의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자연생태계는 오염되고 파괴되어 있으며,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다른 동물이나 심지어 다른 인간들까지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고, 인간을 물건처럼 매매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생태계 역시 붕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카인의 후손들이 남겨놓은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임신이 불가능한 일라는 그러한 인간생태계 파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오염되고 타락하여 희망(아이)을 가질 수 없는 인간들을 상징한다.

그런 일라가 임신이 가능하도록 고쳐주는 것은 노아의 조부 므두셀라이다. 므두셀라는 산딸기를 맛 본지 오래되었다며 산딸기를 찾아달라고 부탁하지만 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오직 일라 뿐이다. 그가 오랫동안 산딸기를 맛보지 못한 것은 이미 세상이 타락하고 오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오염되어버린, 노아의 꿈 속에서처럼 온통 피로 물들어버린 세상에서 산딸기는 쉽게 발견되지 않지만, 그는 결국 오랫동안 땅을 더듬으며 산딸기를 찾아낸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자그마한 희망을 상징하고 그것은 다시 일라에게로 이어진다.

이 장면에서 사람들이 오해하곤 하는 점은 므두셀라는 마법사라든가 반기독교적 존재가 아니다. 성서에서 등장하는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축복을 내리는데, 그 축복은 실제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성서에서 야곱은 형 에사우의 축복을 대신 받기 위해 아버지 야곱을 속이기까지 한다.

종교적 독선의 위험성

그리하여 노아가 건설하려고 하는 신세계를 상징하는 '방주'에서는 모든 동물들 한 쌍과 들어가게 되었으며, 인간도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건 한 쌍 (샘과 일라)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의 방주 안은 동물과 인간이 평등한 '생태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의 뜻이 모든 인간들을 사라지게 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라고 여겼던 노아는 일라가 임신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뇌에 휩싸이며 결국 손녀들이 태어나면 모두 죽이겠다고 공언한다. 영화 초반에 의인이었던 노아는 자신이 신에게 선택 받고 신의 의지를 행하는 대행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점차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힌다.

<장미의 이름>의 눈 먼 도서관장 호르헤나 <다빈치 코드>의 알비노 킬러나 <단테클럽>의 살인마는 스스로를 신의 대리인으로 생각하고 종교적 독선과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 아무런 거리낌없이 살인을 자행한다. 노아 역시 자신의 생각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둘째 아들 함(로건 레먼 역)이 데려온 죄 없는 짝이 죽도록 내버려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물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외면하고, 결국엔 고뇌 끝에 자신의 손녀들마저도 죽이려 한다.

함은 "모두가 죄인은 아니다. 그 중에는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고 말하지만 노아는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런 노아의 모습과 그의 고뇌를 통해 아무리 의인이라고 하더라도 맹목적인 신념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얼마나 위험한 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노아가 다른 소설 속 도서관장이나 알비노 킬러와 다른 점은 그들은 아무런 죄책감이나 거리낌 없이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신과 세상을 위하는 일이라고 여기며 기꺼이 살인을 자행하지만 노아는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갈등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노아는 결국 자신이 신의 뜻이라고 여겼던 일을 행하는 것을 포기한 채 손녀들을 죽이지 못하고 인류는 살아남게 된다. 물이 모두 빠진 뒤 노아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가족들을 멀리한 채 술에 취해서 나신으로 해변가에서 잠든다. 그런 노아에게 다가온 일라는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노아는 비로소 긴 방황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포스트 휴머니즘

영화의 또 중요한 한 축은 카인의 후예들의 왕인 두발 가인의 존재이다. 그는 근대적 휴머니즘을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중세의 신본주의적 사상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르네상스에서부터 이어져 온 근대적 휴머니즘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이성에 의한 무한한 진보를 믿었다.

흔히 우리는 휴머니즘은 인간을 위하는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이나 위험성에 대해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휴머니즘은 그 과정에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우월성과 지배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생태계의 파괴와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부작용도 가지고 왔다.

두발 가인은 인간은 우월한 존재이며 다른 자연이나 동물들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바로 근대적 휴머니즘적인 생각이다. 노아의 방주에 몰래 올라탄 두발 가인은 잠들어 있는 동물들을 먹으려 하고 그런 그에게 함은 "세상에서 한 쌍 밖에 남지 않는 동물들"이고 그들이 죽으면 그 종이 멸종한다고 말하지만, 그는 모든 생물들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며 거리낌 없이 다른 동물들을 먹어버린다. 반면에 이러한 근대적 휴머니즘의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포스트 휴머니즘은 인간과 동물을 동등한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 휴머니즘은 생태주의와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영화 내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또 하나 중요한 상징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한 뱀의 허물인데, 처음에 노아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을 때의 허물은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잘못을 상징한다. 그들은 항상 그 허물을 가지고 다니며 자신의 자손들에게 허물을 넘겨주며 죄를 기억하고 의롭게 살아야 할 것을 당부한다.

반면 그 허물이 카인의 후예인 두발 가인에게로 넘어갔을 때는 스스로의 의지로 했던 '선택'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뱀의 허물은 노아의 둘째 아들인 함에게 이어지는데, 새로운 세대에게 이 허물은, 뱀이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나듯이 갇혀있던 허물을 벗고 스스로 선택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두발 가인은 자신의 짝을 죽게 내버려둬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는 함에게 아버지(노아)를 배신해서 남자(인간)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그리고 두발 가인이 노아를 죽이려고 하는 순간 함은 허물을 움켜쥔 채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노아를 살리고 두발 가인을 죽이는 것이었다. 근대적 휴머니즘 사상이 인간문명의 발전에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겠지만 반면에 그로 인한 부작용이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노아의 신세계에 두발가인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미국 건국신화

좋은 영화는 한 가지 관점이 아닌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듯이, <노아>를 카인의 후손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의 미국 건국신화와 서부개척시대에 대한 신랄한 패러디로 읽을 수도 있다.

초기의 미국학을 연구했던 학자들은 미국의 건국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에 비유하였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후대의 연구에 의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즉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새롭게 땅을 개척해야 했듯이, 미국은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새로운 대륙에서 새로운 에덴동산을 건국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새로운 낙원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두 가지의 큰 죄를 저질렀는데 그 중 하나는 바로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이다. 백인들이 유럽에서 건너오기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는 이미 수많은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는 것을 새로운 에덴동산을 만드는 것이라고 여기고 사명감을 지녔던 백인들에게 아메리카 원주민은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신세계 건설을 위해서는 제거되어야 할 타락한 이교도들에 불과했다.

과연, 영화 <노아>에서 노아는 마치 유럽에서 이주한 백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모두 학살하고 제거하여 신세계를 건설하려고 했던 것처럼, 이 세상이 이미 타락해서 돌이킬 수 없다고 여기고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여 신세계를 건설하고자 한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만들어 놓은 방주라는 신세계를 빼앗기 위해 달려드는 수많은 사람들은 마치 서부개척시대에 백인들의 집을 습격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연상시킨다. 백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죽이거나 몰아내 관리구역에서만 살아가게 만들었듯, 그들은 결국 무참히 학살당하거나 물 속에서 죽어가게 된다.

백인들의 또 하나의 용서받지 못할 죄는 바로 흑인들을 노예로 부려서 그들의 죽음과 희생으로 신세계를 건설했다는 점이다. 영화 <노아>에서 돌과 나무를 날라 노아의 신세계 건설을 도와주었고 죽는 순간까지도 쇠사슬을 들고 그를 지켜야 했던, 검은색 바위로 이루어진 네피림들은 미국 건국을 위해 이용당하고 착취당했던 흑인 노예들을 연상시킨다.

피 위에 건설된 신세계

때때로 신이 잔인한 것은 인간에게 답을 주지 않고, 결코 그 뜻을 온전하게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아가 받은 메시지는 애매모호한 꿈이었고, 그 꿈을 해석하고 앞으로 할 일을 정해야 하는 것은 노아이다. 일라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노아는 폭우가 쏟아지는 하늘에 대고 목이 터져라 외쳐보지만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다.

노아가 손녀들을 칼로 찌르려고 하는 순간,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신과 자신을 외면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했던 가족들 사이에서 노아는 기독교적 히어로가 아닌 홀로 내던져진 철저하게 고독한 한 명의 개인에 불과하다. 결국, 밖에서 울부짖으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할 것인지, 그리고 쌍둥이 손녀들을 죽일 것인지의 결정 앞에서 모든 선택과 책임은 온전히 노아 자신의 몫이다.

모든 일이 끝난 후 노아는 성서의 구절처럼 나신으로 포도주에 취해 잠이 든다. 그것이 자신이 신의 뜻이라고 여겼던 일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일수도 있고, 물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부끄러움일 수도 있고, 가족에 대한 미안함 일수도 있고, 혹은 전부 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이 애초에 만들지 않았으면 됐을 선악과를 만들어 아담과 하와에게 선택하게 했고, 노아에게도 스스로 선택하게 했듯이,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괴로운 선택을 해야만 한다. 다만 우리가 그 과정에서 부단히 경계해야 하는 것은 극단적이거나 편협한 사상에 빠지거나, 종교적 독선이나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노아의 신세계는 그의 꿈 속에서처럼 피 위에 건설된 신세계이다. 인간들 중 최초로 포도주를 만들고 마셨다고 전해지는 노아는 마치 피처럼 붉은 포도주를 마시며 취한다. 그는 마침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스스로의 결정에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방황을 끝내고 그들과 함께 땅을 일구고 살아간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몫일 것이다. 앞으로 펼쳐진 신세계를 어떻게 타락하지 않은 세계로 만들어나갈 것인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노아 신세계 러셀크로우 방주 대런 아로노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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