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거짓말> 포스터.

<우아한 거짓말> 포스터. ⓒ <우아한 거짓말>

아이들에겐 세상의 절반이 친구입니다. 친구가 없는 세상은 반쪽일 뿐입니다. 의미가 없습니다. 친구가 있어 웃음을 짓습니다. 친구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친구는, 적어도 10대 아이들에게는, 거의 절대적입니다.

어제 퇴근길이었습니다. 저녁 시간에 이웃 학교 여러 선생님과 영화 <우아한 거짓말>(감독 이한)을 보는 일정이 잡혀 있었습니다. 아내 퇴근 시간이 갑자기 늦춰지는 바람에 아이들을 저희 엄마 일터에 데려다 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차 안에서 초등학교 3학년짜리 딸이 조잘댑니다. 한아파트에 사는 친구 이야기였습니다.

"인희(가명)가 내 가방이 촌스럽대요."
"그래? 가방 어디가 촌스럽대?"
"그냥 촌스럽대요. 아빠, 아빠가 보기에 이게 촌스러워요?"

조수석에 앉은 큰딸 똥순이(큰딸 별명입니다)가 가방을 들어 제 얼굴 쪽으로 바짝 들이댑니다.

"글쎄, 난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인희는 그렇게 보였나 보지?"
"어디가 촌스러워요? 인희는 정말 이상해요."
"사람마다 보는 게 다르잖아."
"아니, 그래도 친구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똥순이 기분 많이 나빴어?"
"당연하지요."
"그럼 인희에게 이야기해야지. '인희야, 나 네가 한 말 때문에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넌 촌스러워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 하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 삐친다니까요. 그냥 절교하자고 그래요."

똥순이는 인희와 함께 등교합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지금은 서로 바로 옆 반에 있습니다. 아직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는 아닌 듯합니다. 하지만 교과서며 이런저런 준비물을 흉허물없이 빌려주고 빌려 쓰는 사이입니다.

'한창 그럴 때지'라는 한 마디... 무심함을 아프게 꼬집어

그런데 요사이 부쩍 뜬금없이 인희와 절교했다느니, 인희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느니 하는 말을 자주 합니다.

얼마 전에 인희가 일이 있다고 먼저 가서 똥순이 혼자 놀이터에 놀러 간 적이 있었나 봅니다. 그곳에서 다른 친구들을 만나 놀고 있었다지요. 그때 갑자기 놀이터로 온 인희가 화를 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왜 나랑 놀지 않고 다른 친구들이랑 노느냐면서 말이지요.

그 말을 전하며 큰딸 똥순이는 특유의 '나 참' 소리를 연신 내뱉었습니다. 그냥 가볍게 웃으며 들었습니다. '한창 그럴 때지' 하는 마음으로 말이지요.

그러다 문득 '한창 그럴 때지'라고 말할 때의 그 마음을 눈여겨봅니다. <우아한 거짓말>이 날카로운 표적을 날리는 대목입니다. '한창 그럴 때지'라는 한 마디는 무섭습니다. 그 말 속에 담겨 있을 법한 무(관)심함과 성의 없음은, 어떤 이에게는 죽음의 고통보다 더한 좌절과 절망의 고통을 안겨 줄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요컨대 <우아한 거짓말>은 '한창 그럴 때지'라고 말할 때의 그 무심함을 아프게 꼬집습니다.

영화 속 어린 '천지'(김향기 분)는 그 무심함의 희생양이 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뒤늦게 발견되는 천지의 유서는 '다섯 개의 봉인 실' 속에 꼭꼭 숨겨져 있었습니다.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의 속마음을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남겨 놓지 못한 것이지요. 평소 주변 사람들, 친구와 언니는 물론이고 심지어 자신을 낳아 준 엄마조차도 자신의 속마음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천지의 엄마 '현숙'(김희애 분)은 딸을 인정 많고 웃음 많은 착한 자식으로만 알았습니다. 늘 밝고 웃기만 하던 천지의 '우아한 거짓말'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천지에는, 마트에서 일을 하며 남편 없이 언니와 자신을 어렵게 키우는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있었겠지요.

오버를 싫어하는 쿨한 성격의 언니 '만지'(고아성 분)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천지가 만지에게 앞에서는 잘 해 주고 뒤에서 은근히 욕을 하고 골탕을 먹이는 친구에 대해 물었을 때, 만지의 결론적인 대답은 무심한 한 마디였습니다.

"그런 친구 사귀지 마."

천지의 엄마와 언니가 왜 그런 태도를 갖게 되었을까요. 단지 천지의 '우아한 거짓말' 때문이었을까요. 아마 많은 부분이 그랬을 겁니다.

마트 두부 매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의 어린 조카에게 현숙이 한 말을 떠올립니다. 중학생인 그 아이는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 심한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현숙은 그에게 5만 원을 쥐여주며 자신의 힘든 현실을 엄마에게 꼭 이야기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횡한 어린 표정을 짓던 현숙의 머리에는 자신에게 늘 밝은 모습만 보여 주었던 천지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다시 이렇게 물어봅니다. 천지는 왜 '우아한 거짓말'을 했을까요. 왜 엄마와 언니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내보이지 않은 걸까요. 거기에는 혹시 자신의 진실을 말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이 자리 잡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천지가 그런 생각을 했을 개연성은 무척 커 보입니다. 천지는 몇 번이나 엄마와 언니에게 신호를 보냈습니다. 자신이 지금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으며, 진짜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듣고 싶어한다는 메시지를 말이지요.

그것은, 천지와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외로움 속에서 거짓말을 일삼던 천지의 절친 '화연'(김유정 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천지의 죽음으로 충격에 빠져 있던 화연은 학교에 가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반 아이들의 싸늘한 시선 때문이었습니다. 화연은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학교에 안 가면 안 되냐고 엄마에게 호소합니다.

엄마는 일언지하에 학교에 가라고 말합니다. 간절하게 호소하던 화연은 차갑기 그지 없는 표정을 짓지요. 그뒤로 화연은 그 누구도 의지할 데 없는 절망 속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기 시작합니다. 만지가 손을 내밀어 줄 때까지 말이지요.

그를 지켜주지 못한 가족들의 애끓는 모습을 보며...

작고 여린 열네 살 소녀였던 천지의 죽음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 할까요. 새로 이사 간 아파트의 옆집남자 '추상박'(유아인 분)은 천지에 관한 일을 묻는 만지에게 말합니다. 가족들 간에는 못할 얘기가 많다고, 그리고 그런 것 때문에 가족은 끝까지 끈끈하게 이어지는 거라고.

그렇습니다. 가족들 간에는 못할 이야기가 분명 많습니다. 가족들은 그 누구나 서로에게 해서는 안 되는, 할 수 없는 말을 한 가득 안고 살아갑니다. 그것들을 꺼내면 분명 모두가 고통스러워질 것입니다. 다른 가족이 그 모든 것을 안다고 한들 뾰족한 수가 없다면 더욱 그렇겠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연출을 맡은 이한 감독은 "가까운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고 싶어지는, 그런 영화가 되었으면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가족들에게는 누구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는 것, 그것을 알아서 해결해 주지는 못할지라도 늘 관심 어린 시선으로 보듬고 안아주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요.

'바퀴벌레 가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학자 엄기호 선생의 최근작 <단속사회>(창비, 2014)에서 만난 말입니다.

대다수의 학생이 부모나 교사에게는 절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 머물지만 서로 완전히 단절되어 있으며 어쩌면 무관한 관계에 가깝다. 이 때문에 '바퀴벌레 가족'이라는 말도 나왔다. 이는 저녁에 자식들이 거실에 모여 있다가 부모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나면 일제히 자기 방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풍자한 표현이다. (68쪽)

'바퀴벌레 가족'에서와 같은 노골성이 없다면 문제가 없을까요. 일상 속의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의 평온한 얼굴 뒤에 숨은 절망의 그림자를 놓치고 있는 건 생각해 봅니다. 큰딸 똥순이의 간절한 호소를 '한창 그럴 때지'라는 무심함으로 평범하게 넘기려 했던 나를 돌아봅니다.

똥순이에게는 세상의 절반인 친구의 한 마디를 제가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지 않나 해서 말이지요. 똥순이는 나름대로 큰 용기를 내어 이야기했는지 모를텐테 말이지요. '우아한 거짓말' 속에서 살다 간 천지와, 그를 지켜주지 못한 가족들의 애끓는 모습을 보며 얻은 깨달음입니다. 다가오는 주말에 가족이나 친구끼리 삼삼오오 손을 잡고 <우아한 거짓말>을 보며 그런 마음을 가져보고 싶지 않으신지요. 진정으로 '우아한' 시간이 되리라 장담합니다.

덧붙이는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우아한 거짓말> 이한 감독 친구 가족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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