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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은 마음의 혀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한 말이다. '펜'은 글의 대유다. 세르반테스의 이 말은, 마음으로 하는 말이 곧 글이라는 말이다. 글이 내면의 표현이라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글을 읽으면서 그 글을 쓴 사람을 읽는다. 그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인생을 꾸려가고 싶어하는지를 본다.

재작년에 이어 어깨동무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일기 이어쓰기와 비슷한 글쓰기 활동이다. 아이들은 바로 앞 친구가 쓴 글에서 열쇳말을 고른 후 그것을 제목으로 삼아 글 한 편을 쓴다. 그 어떤 주제와 내용도 가능하다. 형식도 자유롭다. 운문과 산문이 기본이지만, 희곡도 가능하다. 글이 부담스러우면 만화나 그림을 곁들여도 된다.

지난 3월 초, 각 반에 들어가서 어깨동무 글쓰기 활동을 소개했다. 아이들의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다. 왜 써야 하느냐, 안 쓰면 어떻게 되느냐, 쓰는 게 정말 힘들다 등등이었다. 조용히 있었지만 짜증 나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아이들도 많았다.

"어깨동무 글쓰기가 힘들고 귀찮다는 건 선생님도 알아. 하지만 이걸로 너희들 고통스럽게 하려는 건 절대 아니야.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까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난 단지 너희들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야. 어깨동무 글을 쓰려면 친구 글을 찬찬히 읽으면서 열쇳말을 골라야 하잖아. 그 과정에서 차분히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당연히 글을 쓰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더 깊이 하게 되고 말이야. 글읽기와 글쓰기가 힘든 세상이지 않니. 지금 우리는 넘친다 싶을 정도로 시각 매체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해. 하루에 스마트폰 만지작거리는 시간을 떠올려 보렴. 차분히 자기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가 쉽지 않지. 어깨동무 글이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반마다 제법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아이들은 여전히 귀찮다는 기색이었다. 공책 한 면 분량으로 쓰는 만만찮은 활동이다. 아이들의 싸늘한 반응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밀고 나갔다. 반별로 어깨동무 공책을 준비했다. 표지 안쪽에 글쓰기 방식을 포함한 주의사항을 적은 표를 붙였다. 첫 장에 내 글을 싣고, 각 반 1번이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게 했다. 글쓰기는 3월 둘째 주부터 시작되었다. 예정대로라면 반별로 1주일에 5명이 글을 쓰게 될 것이었다. 한 주에 30편의 글을 읽게 되는 양이다.

이번 주가 3주째였다. 아직 반별로 예닐곱 편에 지나지 않는다. 2학년 전체로 치면 40여 편이다. 대책 없이 '귀차니즘'을 보여준 아이들이었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수확인가. 처음 분량 조건으로 내세운 공책 한 면을 제대로 채운 아이들도 손꼽을 정도다. 살짝 실망감이 들었다.

그래도 좋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아예 글을 쓰지 않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몇 줄로나마 글을 써 내고 있다는 점이다. 민준(가명)이가 그런 아이들 중 하나다.

민준이는 처음부터 어깨동무 글쓰기에 아주 강하게 거부감을 보여 주었다. 수업 후에 따로 복도로 불러내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을 정도다. 민준이는 여전히 먼산바라기만 한 채 서 있었다. 민준이가 반복한 말은 딱 두 마디였다. "안 쓰면 안 돼요?"와 "안 쓰면 어떻게 돼요?". 모두 물음 형식을 빌렸지만 '안 쓰겠다'는 다짐이나 마찬가지였다.

민준이 반의 어깨동무 글쓰기는 다른 반보다 며칠이 뒤떨어졌다. 수일째 글쓰기 '파업'을 한 민준이 덕분이었다. 나는 아침마다 민준이를 찾아갔다. 한 면 채우기가 힘들면 절반이라도 채우라고 다독였다. 친구 글에서 열쇳말을 고르기 힘들면 자신이 직접 다른 단어를 골라 써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기를 며칠, 마침내 민준이에게서 공책을 건네받았다. 네 줄로 된 짧은 글이 담겨 있었다. 자신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네 줄이라도 어디냐 하는 마음으로 민준이 어깨를 다독였다. '글 쓰느라 고생했다'는 내 말에 민준이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민준이가 글을 써 냈다는 사실은 작은 뉴스거리였다. 우연히 민준이의 담임 선생님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셨다.

"민준이가 글을 썼어요?"

과장되게 말하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듯한 반문이었다. 평소 민준이가 어떤 태도를 보였으면 그랬을까. 그럼에도 민준이는 글을 써 왔다! 그것도 학생 신분인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잘 드러내는 내용으로 말이다.

그다음 수업 시간이었다. 민준이 반에 들어가 민준이 글을 짧게 논평해 주었다. 많지 않은 분량이었지만 자신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했다고 말해 주었다. 모두 놀랐다. 민준이의 담임 선생님이 보인 '민준이가 글을?'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민준이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칭찬을 받는 아이 특유의 겸손함과 흡족함이 얼굴에 서려 있었다. 글쓰기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던 며칠 전의 민준이와 전혀 달랐다. '고작 네 줄이냐?'며 타박을 했다면 민준이는 글쓰기에 대해 더욱 큰 반감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나는 민준이의 다음번 글이 기대되었다.

민준이 경우와는 다른 이유도 있다. 예상 밖의 '의젓한' 글을 만나고 있는 점도 내가 아이들에게 실망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현호(가명)가 그렇다. 현호는 나만 보면 먼저 손을 건넨다. 악수하기 위해서다. 3월 초, 복도에서 내가 우연히 건넨 악수를, 현호는 자신과 나 사이의 독특한 소통법으로 활용한다.

현호는 수업 시간에 그리 잘 집중하는 아이는 아니다. 머리를 파묻고 엎드려 자거나, 꾸벅꾸벅 졸 때가 자주 있다. 그래도 무언가를 해 보려는 마음은 분명 마음 한 쪽에 있다. 선생님들이 조금만 관심을 건네면 얼마든지 공부든 뭐든 힘차게 해 나갈 수 있는 아이로 보인다. 현호의 표정과 몸짓을 통한 직관적인 판단의 결과다.

무엇보다도, 현호가 어깨동무 글쓰기 공책에 써 놓은 글이 가장 뚜렷한 증거다. 현호는 특이하게도 글 제목에 '제곱'을 넣었다. 아래는 <1, 2, 3의 제곱>이라는 제목으로 쓰인 현호 글의 일부다.

청소년의 삶은 제곱과 같다 / 1의 제곱은 아무리 1을 곱하고 곱하여도 / 수는 변하지 않는다 // 하지만 1에다가 1을 더하고, 2를 더하고 / 3을 더하면 그의 제곱은 배가 되고 배가 된다 / 우리 모두는 1로 시작하여 거기에 무엇을 / 더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현호는 '공부'에 대한 내용으로 시를 끝맺었다. '우리가 하는 공부는 백지에 그려지는 물감과 같다'는 멋진 비유가 곁들여진 마무리였다.

다른 반에 들어가 현호 글을 소개했다.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만든 뒤 글을 들려 주었다. 모두 듣고 난 아이들의 반응이 무척이나 진지했다. 따로 이끌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박수를 친 아이들이 많았다. 또래 글이 주는 공감의 힘 때문이었으리라.

아이들이 쓴 많은 글이 괴발개발이다. 겉으로나마 정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그렇게 성의 없이 써 놓은 글에서 강한 섬광을 느낄 때가 있다. 거창하게 말하면 '돈오(頓悟; 깨달음)'의 순간이다. 삶을 향한 아이들의 정성을 깨닫는다. 내면을 뜨겁게 고민하는 의젓함을 본다. 모두 글의 길고 짧음과는 무관하다.

얼마 전, 성수(가명)가 써 온 글의 일부를 아이들과 함께 읽었다. 성수는 쉬는 시간에 우리 반에 가장 자주 오는 '단골 소님' 중 하나다. 그렇게 와서는 우리 반 친구들과 투닥거리며 야단스럽게 논다.

성수가 쓴 글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대한 독후감 형식의 글이었다. 성수는 글 말미에 헤세의 명언 세 가지를 적어 왔다. 그중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서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성수가 적어 온 헤세의 말은 나에게 또 다른 '돈오'의 경험을 안겨 주었다. 나는 다른 반 수업 시간에 성수 글을 소개했다. 헤세의 말을 칠판에 적어 놓고 아이들과 함께 그 의미를 따져 보았다. 적당한 소란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주고받았다. 가슴이 기분 좋게 차올랐다.

현대의 뇌 과학에 따르면, 사람은 시기별로 뇌 발달 부위가 다르다. 3~6세에는 인성을 관장하는 전두엽이 발달한다. 이 시기에 사랑을 받지 못하면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둔감한 '괴물'이 되기 쉽다. 6~12세에는 언어와 과학적 사고에 관여하는 측두엽과 두정엽이 크게 발달한다. 책읽기 등을 통해 언어 감각이나 논리력을 키우는 게 중요한 때다.

중2가 포함되는 12~15세에는 후두엽이 크게 발달한다. 후두엽은 인간의 감성을 담당하는 부위다. 감성은 이성에 대응한다. 오감으로 대상을 지각하고 느끼는 경험이 중요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꽉 짜인 학교 일정 속에서 그런 경험을 하기가 쉽지 않다.

이때 글쓰기는 감성을 기르는 좋은 수단이 된다. 글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소통의 힘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감성 능력이 길러진다. 내가 어깨동무 글을 통해 아이들을 만나고, 그 속에서 아이들의 천변만화하는 속내를 읽으려고 몸부림치는 까닭이다.

중2는 이른바 '중2병'에 걸린 '환자'들이 아니다. 북한 인민군도 무서워한다는 '괴물'들도 아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정의 변화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한창 그들만의 감성 훈련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른들이, 그들이 괴발새발 쓴 글과 함부로 내뱉은 되바라진 말을 통해 그들의 속내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섬세한 촉수를 가져야 하는 이유다. 아이들보다 속 좁은 어른이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중2, #글쓰기, #어깨동무 글, #중2병, #공감과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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