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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민원을 냈으면 해결을 해줘야지. 공무원이 일을 그 따위로 해도 되요? 거기 과장 바꿔 봐요?"
"죄송합니다만, 과장님은 지금 자리에 안 계시고…."
"그럼, 거기 기관장 바꿔 봐요. 윗분한테 얘기해야겠어요."
"……"

전화기 너머 40대 여성 민원인 A씨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통화시간은 벌써 20분쯤 지나고 있었다. 귀가 따가웠다. 얼른 전화를 끊고 싶었다. 이걸 그냥, 확 그냥, 막 그냥! 내 속은 이미 활화산이었다. 하지만 A씨의 얘기를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민원인에 대한 공무원의 '기본'이니까.

세상은 넓고 민원은 많다는데... 날마다 민원 내는 사람들

어느 단계까지는 잠자코 민원인의 얘길 들으며 공감도 표시해야 한다. 연애할 때뿐만 아니라 민원업무에도 밀고 당기는 '밀당'이 필요한 것이다.
 어느 단계까지는 잠자코 민원인의 얘길 들으며 공감도 표시해야 한다. 연애할 때뿐만 아니라 민원업무에도 밀고 당기는 '밀당'이 필요한 것이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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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택건축분야의 위법·부당한 처분을 조사·상담하는 공무원이다. 민원업무는 법만 많이 안다고 다가 아니다. 공무원이 관계법령을 청산유수로 얘기한다고 민원인이 항상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단계까지는 잠자코 민원인의 얘길 들으며 공감도 표시해야 한다. 연애할 때뿐만 아니라 민원업무에도 밀고 당기는 '밀당'이 필요한 것이다. 가끔은 이런 '밀당'이 통하지 않는 일방통행 민원인 때문에 곤란한데, A씨가 그런 경우였다.

A씨는 경남 B시 00동에 신축공사 중인 다가구주택으로 인해 본인에게 일조권 등의 피해가 있으니 조치해 달라고 했다. A씨는 B시 외에도 경남도청, 감사원까지 같은 민원을 수십 차례 제출해 이미 위법사항이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A씨가 법원에 제기한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도 기각되었다.

A씨의 민원이 우리 기관에 접수된 때가 그즈음이었다. 나는 경남 B시의 민원현장까지 서울에서 먼 길을 일부러 출장을 갔다. A씨를 만나 건축주와 합의를 시키거나 최소한 관계법령 정도라도 이해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몇 시간째 대화는 평행선이었다. 작고 깡마른 체구인 A씨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사투리로 얼마나 빨리 말할 수 있는지 내게 보여주려는 것만 같았다.

"공사피해는 원래 이해당사자끼리 협의할 문제예요."
"B시에서 건축허가를 잘못해서 이러는 거 아입니꺼."
"그건 B시나 경남도청에 감사를 요구하세요."
"다 똑같은 사람들 아입니꺼? 제대로 좀 하이소."
"아 정말, 이럴 거면 차라리 법원에서 봅시다!"

건축주는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나로서는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출장을 다녀온 후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걸려오는 A씨의 전화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대낮 '돈 봉투 미수 사건'

날씨가 365일 내내 흐리기만 하지는 않듯이, 힘들게 하는 민원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봄날 포근한 햇살 같은 민원인도 더러 있다. 작년 가을 어느 평일 점심 시간, 우리 기관 정문 앞에서 중년의 민원인 K씨와 마주쳤다.

"저, 이거…"

K씨가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려 했다. 순간, 난 그것이  무엇인지 직감했다. '민원처리 답례로 감사인사를 하려나? 설마, 돈 봉투?' 예상대로 그는 꼬깃꼬깃 접힌 흰 봉투를 꺼내 주저하며 내게 건넸다.

"아이고, 저 이런 거 받으면 큰 일 나요…"
"제 마음의 표시예요. 얼마 안 되지만…"
"아, 예…. 그냥 마음으로만 받겠습니다."

나는 K씨가 건넨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돌려주었다. 봉투를 건네려는 민원인보다 내가 더 진땀을 빼야 했다. K씨는 서울 00동에서 작은 걸레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이다. 말이 좋아 사장이지 그는 천막과 벽돌로 지은 30년쯤 된 낡은 공장건물에서 일한다. 170cm가 조금 안 되게 보이는 키에 숱이 얼마 없는 곱슬머리, 검게 그을린 이마와 눈가에 보이는 굵은 주름, 작업복인 듯 체크무늬 상의와 무릎이 나온 헤진 청바지. 그의 첫인상이다.

관할 구청은 걸레 공장이 무단으로 증축됐다며 K씨에게 건축법상 이행강제금을 부과했다. 일종의 벌금이었다. K씨는 이의신청을 했고 법원은 K씨의 손을 들어주어 그 해 부과된 이행강제금은 취소되었다.

억울한 일은 그 다음부터였다. 소송 후 구청 담당자가 바뀌고 K씨에게 이행강제금이 다시 부과된 것이다. 그것도 몇 년씩이나. 구청의 후임자가 재판결과 등을 꼼꼼하게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영문도 모르는 K씨는 이행강제금 납부를 거부했고 급기야 그의 통장까지 압류됐다. K씨는 하루 한 갑씩 피우던 담배가 두 갑으로 늘었다. 거의 매일 구청을 드나들던 K씨는 우리 기관에 통장 압류만이라도 풀어달라며 민원을 접수했다.

이행강제금을 담당하는 구청의 전임자와 후임자를 모두 불러 K씨와 함께 사실여부를 따졌다. 화재 이후 공장건물이 무단으로 증축됐다는 구청의 주장이 사실인지 관할 소방서에 화재발생기록을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 기관은 K씨가 체납한 이행강제금을 모두 취소하도록 해당 구청장에게 시정권고를 했다. 구청은 권고대로 이행강제금 취소와 K씨의 통장압류를 해제하겠다는 수용의견을 우리 기관에 제출했다. 수년 동안 한 개인을 신용불량자로 내몰았던 이 어이없는 민원은 이렇게 일단락이 됐다. K씨가 우리 기관 앞으로 불쑥 나를 찾아온 건 그 즈음이었다.

대낮 '돈 봉투 미수사건' 일 주일 후 기관장님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K씨가 삐뚤빼뚤 적은 감사 편지였다. 그래, 내가 이 맛에 민원업무를 하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안전행정부 주최 2014년 공무원문예대전에 투고한 필자의 원고를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태그:#이행강제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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