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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밑바닥에서' 루까 役 윤경호(오른쪽)
 연극 '밑바닥에서' 루까 役 윤경호(오른쪽)
ⓒ 노오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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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람 푸슈킨은 말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또 다른 러시아 사람 막심 고리키는 이렇게 말했다. '희망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밑바닥은 영원한 밑바닥이야.'

죽지 못해 산다는 것만큼 권태롭고 우울한 말이 또 있을까. 이 '지질한 말 한마디'는 인류의 기원에서 종말까지 인과관계를 밝힐 수 없는 불가사의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연극 '밑바닥에서'는 죽지 못해 사는 남루한 인간들의 입을 빌려 토악질을 쏟아내는 고전(苦戰)에 관한 고전(古典)이다.

들쥐 소굴 같은 지하의 여관방, 밑바닥 인생을 사는 자들이 우글댄다. 이들은 기침과 가난, 술과 도박에 취해 하루하루를 소모한다. 내일도, 희망도 없는 지하실에 '루까'라는 노인이 찾아든다. 그는 절망에 중독된 사람들의 손과 마음을 어루만지며 희망을 전파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밑바닥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까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루까'는 돌연 떠나버리고, 그와 함께 희망의 빛도 자취를 감춘다. 사람들은 다시 절망을 찾아 밑바닥으로 유유히 가라앉는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듯 인간이 쓰러지는 데도 이유가 있다. 누군가는 날 때부터 '도둑놈의 씨'라는 저주에 걸려 빵을 훔치고, 누군가는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 살인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들은 속죄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채 밑바닥으로 내던져져 장렬하지 못한 최후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그 고통은 무뎌져 간다.

솟아날 구멍 없는 밑바닥을 가만히 응시하면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다. 죽을죄를 지었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삶'은 교묘히 제 빛깔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희망 또는 절망으로 변장해 사람들을 희롱한다. 하지만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간신히 밑바닥에 붙어사는 사람들에게도 삶을 영위할 권리는 있다.

'루까'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값비싼 희망을 종용하는 사기꾼이 아니라, 인간이 본능적으로 갈구하는 '더 나은 것'에 대한 욕망을 부화시키는 열(熱)과 같다. '배우'는 그 온도에 가장 먼저, 열렬히 반응하는 인물이다.

그는 사람들의 갈채를 받던 자신의 명대사를 기억해내고, 알코올중독을 청산하고자 '루까'가 추천한 병원으로 떠나려 한다. 여관 주인 내외의 폭력이 극에 달하는 순간 '루까'는 떠나버리고, '배우' 역시 새로운 인생을 찾아 밑바닥을 벗어나지만 결국 목을 맨다. 온도가 높을수록 알이 일찍 깨어나는 것은 아니며, 깨지기만 할 뿐이다. 열은 좀 더 오래 머물렀어야 했다.

연극 '밑바닥에서' 남작 役 박영필, 나스쨔 役 박채원, 나타샤 役 문진아(왼쪽부터)
 연극 '밑바닥에서' 남작 役 박영필, 나스쨔 役 박채원, 나타샤 役 문진아(왼쪽부터)
ⓒ 노오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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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는 금방이라도 밭은기침을 토해낼 듯한 음울함과 꼬질꼬질한 삶의 흔적이 묻어났다. 잿빛으로 통일감을 주되 명도와 질감을 달리해 지루함을 덜었다. 등장인물이 많고 등·퇴장이 잦은 것에 비해 다소 좁아 보이기는 하지만 효율적인 공간 분할과 동선 처리로 안정감을 주었다. 침대 밑에 굴러다니는 술병과 지저분한 그릇 등의 소도구 역시 정제되지 않은 공간으로서의 '밑바닥'을 한결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역량 있는 베테랑 배우들의 활약도 빛났다. 윤경호는 부드러운 힘을 가진, 하지만 어딘가 비밀을 감춘 듯한 '루까'로 분해 수많은 인물의 구심점을 담당했다. '싸친' 역의 조영규는 명민하고 파워풀한 연기력으로 '루까'가 떠난 뒤의 빈자리를 채웠다. '브부노프' 역의 류경환은 체념 끝의 실소를 역설적인 코미디로 이끌어내며 작품을 한층 리드미컬하게 만들었다. '끌레시치' 역의 정상훈은 밑바닥에 처박힌 인간의 나약함 그 자체를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나스쨔' 역의 박채원은 캐릭터에 걸맞은 허스키한 보이스와 놀라운 집중력으로 몰입도 높은 연기력을 선보였다. '나타샤' 역의 문진아는 순수함과 처절함을 넘나드는 폭넓은 기량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바실리사' 역 김혜진과 '페페르' 역 김지휘는 캐릭터의 무게에 비해 적잖은 실망감을 안겼다. 두 인물이 작품의 갈등 요소를 책임지는 큰 축인데도, 금방이라도 '쩍' 하고 갈라져야 할 것 같은 아슬아슬한 장면에서도 전혀 그 팽팽함이 전해지지 않았다. 특히 김혜진은 어색한 액팅과 다듬어지지 않은 발성으로 무대에 서는 배우로서의 준비가 덜 된 느낌이었다.

이젠 제법 대학로의 저명한 제작사로 성장한 김수로 프로젝트가 연극 '밑바닥에서'로 고전 시리즈의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유의미한 일이다. 현대적인 관점으로 고전을 재해석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미학을 재현하는 작업도 계속되어야 한다. 작품은 국내 다양한 창작자들의 손을 거쳐 무대에 올랐지만 원작의 명성에 비해 이렇다 할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김수로 프로젝트는 부지런히 쌓은 제작 노하우와 뛰어난 용인술로 대중이 기억할만한 고전의 원형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테이지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밑바닥에서, #김수로프로젝트, #연극, #대학로예술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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