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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특징 하나가 때때로 그 사람을 기억하게 한다. 도시나 마을도 마찬가지. 어처구니없는 기억 한 조각이나 사소한 풍경 하나가 그때를 불러낸다. 때론 부분이 전체보다 힘이 세다. 그런 조각들로 도시를 여행하려 한다. - 기자 말

여의도는 고층건물이 여러 개 있고, 금융가가 있어 '한국의 맨해튼'으로 불린다. 사진은 영화 '더 테러 라이브' 중에서.
 여의도는 고층건물이 여러 개 있고, 금융가가 있어 '한국의 맨해튼'으로 불린다. 사진은 영화 '더 테러 라이브' 중에서.
ⓒ 영화더테러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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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들은 자기 흔적을 오랫동안 세상에 남기고 싶어 한다. 권력이 강할수록 그 의지는 더욱 강해진다. 흔적을 드러내기에 좋은 수단이 바로 건축이다. 히틀러, 마오쩌둥, 김일성 등 20세기 대표 독재자들은 모두 눈에 띄는 건축물들을 세웠다. <거대건축이라는 욕망>(데얀 수딕, 작가정신)에 나온 내용이다. 독재자가 어디 최고권력자만을 뜻할까. 지방권력자, 기업가들도 모두 거대한 기념물을 세우지 않던가. 이 책을 읽자마자 떠오른 도시는 바로 서울 여의도였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주 석굴암, 천안 독립기념관, 속리산 법주사 등을 들른 버스는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수많은 볼거리들이 있었겠지만, 버스는 특별한 곳에 들어가질 않고 한 곳에 잠시 머물렀다. 그 때 아이들이 '와' 했던 기억이 난다. 잠시 뒤 버스는 머리를 돌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당시 버스가 머문 곳은 여의도광장이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넓게 펼쳐진 빈터는 처음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함이 모두를 압도했다. 하긴. 한 때 공항 활주로 자리를 고스란히 살려 광장으로 만들었으니. 폭 250미터에 끝에서 끝까지 길이가 1300미터에 이르는 광장이었다. 동서 500미터, 남북 800미터의 천안문광장에도 뒤지지 않고, 모스크바 붉은광장보다는 두 배나 컸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 처음 본 여의도광장(당시 이름은 5.16광장)은 엄청났다. 세계 어느 광장에도 뒤지지 않는 크기를 자랑했다. 사진은 영화 '갑자기 불꽃처럼'(1980) 중에서
 중학교 수학여행 때 처음 본 여의도광장(당시 이름은 5.16광장)은 엄청났다. 세계 어느 광장에도 뒤지지 않는 크기를 자랑했다. 사진은 영화 '갑자기 불꽃처럼'(1980) 중에서
ⓒ 영화갑자기불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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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 민간인 조종사인 안창남이 기념비행을 한 곳이 바로 여의도공항이었다. 비행구경을 위해 여의도에 5만 명이 모였고, 지방에서 보러 오는 사람을 위해 남대문역에서 임시열차를 운행할 정도로 안창남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애초부터 여의도는 높고 화려하게 비상하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큰 광장이 만들어진 데는 당시 최고권력자인 박정희의 의지가 컸다. 그렇게 큰 규모가 된 것이나 완공 당시 공원 이름엔 모두 박정희의 뜻이 반영됐다. 1971년 완공 당시 이름은 5·16광장이었다. 그 전까지 민족의광장, 통일의광장, 서울대광장, 여의도대광장 등 이름으로 불린 곳이었다. 5·16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지가 강력하게 드러난 이름이었다.

돌이켜보면 1970, 80년대 국민들은 크고 잘 사는 나라에 대한 콤플렉스가 컸고, 그만큼 크고 넓은 건축물에 대해선 더 환호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도 대국 반열에 올랐다는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의도는 열등감을 보상해 주고 우월감을 주는 실험장이었다. '최고' '최대'라는 건축물들이 잇따라 들어섰다.

여의도광장과 63빌딩, '최대' '최고'가 있었던 곳 여의도

1975년 여의도에 들어선 국회의사당은 단일 의사당 건물로 동양 최대였다. 국회의사당 완공 10년 뒤 이번엔 63빌딩이 만들어졌다. 1985년 완공될 당시 일본 도쿄 선샤인 60빌딩을 제치고 북아메리카를 빼면 가장 높은 건물이 됐다. TV를 통해 이 압도적인 건물을 본 사람들은 이런 걱정들을 쏟아냈다.

"넘어지지 않을까?" "비행기가 날다가 부딪치지 않을까?" "불이 나면 어떻게 대피하지?"

63빌딩엔 당시 일반영화관 스크린 10배 크기인 아이맥스 영화관이 들어섰다. 보통건물 8층 높이였다. 영화관에서 영화 <그랜드캐년>을 본 기억이 난다. 영화 개봉 시기를 살펴보니 1987년이었다.

1983년엔 여의도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국내 최대 백화점이었다. 그 즈음해서 여의도에 '한국의 맨해튼'이라는 별명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맨해튼은 뉴욕시에 속한 지역으로 고층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곳이다. 1983년엔 여의도 반도호텔이 맨하탄호텔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의도에 증권 금융가가 생기면서 '한국의 월스트리트'라는 별명도 생겼다. 월스트리트는 뉴욕 맨해튼에 있는 세계적인 증권 금융가다.

여의도와 맨해튼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강 가운데 있는 섬이라는 지역 특징, 높은 인구밀도, 고층건물이 많다는 특성까지. 따지고 보면 그런 곳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라는 미국, 그 중에서도 경제수도라 불리는 뉴욕, 그 중 핵심구역이 맨해튼이 아니던가. 비록 맨해튼이 되진 못하더라도 그 이미지는 빌려오고 싶었을 것이다. 

"이미 2백여 채의 빌딩이 들어선 수중도시 汝矣島(여의도)는 최근 들어 50여 채의 고층빌딩이 신축붐을 이뤄 이제 서울의 맨해턴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 경향신문(1984년 5월 21일)

권력자들은 건축물을 통해 자기 뜻과 의지를 드러내지만 그래서 건축물은 권력자와 종종 운명을 같이 하곤 한다. 5·16광장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비난을 받는다.

"군부정치의 유물인 5·16쿠데타는 온 국민이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는데도 아직도 아무 거리낌 없이 5·16광장이라고 표현"(경향신문, 1993년 3월 6일)

"민주당 이기택 대표는... 이번 국회대표연설에서 과거 5·16광장으로 불렸던 여의도광장을 '4·19광장'으로 개칭할 것을 제안할 방침"(동아일보, 1993년 4월 29일)

1995년 조순 전 부총리가 서울시장에 뽑히면서 여의도광장은 역사 뒤로 사라진다. 아스팔트를 모두 걷어내고 녹지공원으로 바꾸는 계획이 세워졌다. 2002년까지 우리나라 최고층이던 63빌딩 또한 이후 강남 도곡동과 부산 해운대, 인천 송도 등에 잇따라 대형건물이 세워지면서 1위 자리를 내준다.

여의도엔 웅장한 건축물들이 가득했지만, 한편 샛강처럼 앙증맞은 강이 흐르는 곳이었다.(오른쪽 물길이 샛강)
 여의도엔 웅장한 건축물들이 가득했지만, 한편 샛강처럼 앙증맞은 강이 흐르는 곳이었다.(오른쪽 물길이 샛강)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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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고 여의도 출퇴근, 새롭게 다가온 느리고 조용한 세상

2004년 새로 구한 직장은 사무실이 여의도였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했다. 거대한 광장, 63빌딩, 국회의사당으로 대변되던 여의도 모습이 새롭게 다가왔다. 눈높이와 속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타면 아무래도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좁더라도 자동차가 적게 다니고 여유있게 구경할 수 있는 길이 편하다. 그렇게 좁은 길, 뒷길을 다니다 찾은 곳이 샛강이다.

샛강은 큰 강에서 갈라져 나와 섬을 이룬 뒤 다시 합쳐지는 강이다. 한강에서 떨어져 나와 여의도 옆을 슬그머니 흐르던 샛강을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샛강이란 말을 그 당시 처음 들었지만, 듣자마자 마음에 '쏙' 들었다. 이름이 참 예쁘다 싶었다.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인적이 드물었다. 비가 오는 어느 날 샛강 옆 풀숲에서 토끼가 숨어 있는 걸 봤다.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였다. 도심 한복판에서 보게 된 야생 토끼라니.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은 우리나라에선 처음 만들어진 생태공원이다. 인공공원이지만 사람 손이 거의 닿지 않은 듯 자연스러움이 신선했던 느낌이 뚜렷하다.

자전거를 타고 양화대교를 건너 여의도에 들어설 때마다 본 작은 백사장, 겨울에 살짝살짝 어는 살얼음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 외에도 터키 민속용품을 전시한 앙카라공원, 1896년 발행된 친목회 회보를 비롯 100여 년 동안 발행한 잡지를 보관하고 있는 잡지박물관도 여의도에서 찾은 작은 재미다.

자전거를 타고 여의도를 다니자 새로운 풍경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난 뒤 땀이 날 때면 이런 물길에 발을 담그면 더위가 '싹' 달아났다.
 자전거를 타고 여의도를 다니자 새로운 풍경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난 뒤 땀이 날 때면 이런 물길에 발을 담그면 더위가 '싹' 달아났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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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여의도를 다니다 주변 사람들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자전거를 타고 여의도를 찾는 인구가 느는 게 보였다. 안창남의 도시이던 여의도에 현대판 엄복동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엄복동은 해방 이전 자전거 챔피언으로 안창남과 함께 최고 스타였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라는 노래가 국민노래처럼 불릴 정도로 엄복동은 유명했다.

이제 여의도는 고층빌딩의 도시라기보다는 편안하고 샛강이 흐르는 도시로 다가왔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흥분이 가라앉은 탓도 있을 것이다. 국회의사당이나 63빌딩보다 더 높은 건물도 많이 봤고, 여의도백화점은 이제 큰 백화점 대열엔 끼지 못한다. 여의도백화점을 처음 봤을 때도 '한물 갔다'는 느낌이 강했다.

물론 내 생각이다. 언론에선 여전히 여의도를 '한국의 맨해튼'이라 부른다. 2011~2012년 29~55층 건물로 이뤄진 국제금융센터(IFC)가 문을 열었다. 55층 건물은 63빌딩보다 35m나 높다. 2013년 문을 연 전경련회관은 63빌딩과 높이가 비슷하다. 공사가 잠시 중단된 상태이긴 하지만 72층 높이 건물 또한 계획돼 있다. 이제 63빌딩은 여의도에서조차 2등이며, 곧 3위로 밀려날 운명이다.

그 와중에 여의도 사무실 공실률(건물에서 입주하지 않은 방 비율)이 20% 근처에 이르렀다는 뉴스가 들린다. 공실률은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여의도가 기어코 '한국의 맨해튼'이 될지, 언론에서만 부르는 '맨해튼'이 될지 이제 기로다.

그러나 설령 고층 빌딩숲을 완성한다 해도 여의도가 맨해튼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예술이나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맨해튼에선 수많은 예술가들이 탄생했고, 그들이 문화의 싹을 틔웠다. 이제 자전거부대들이 여의도를 드나들기 시작했으니 그들이 낮고, 느린 문화의 씨앗을 혹시 뿌리지 않을까. 안창남의 도시에서 엄복동의 도시로, 안창남과 엄복동이 공존하는 도시로 진화하는 꿈을 꾸어 본다.


태그:#여의도, #맨해튼, #자전거, #안창남, #엄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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