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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영화 <변호인>이 남긴 후유증 때문에 배우 송강호의 얼굴만 봐도 울컥했다. 단순히 정치적 성향이나 영화의 실존 인물인 노무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다. 한 인간이 상식 밖의 시대에서 외로이 맞서 싸웠던 기나긴 세월에 대한 존경과 수고로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작지만 소중한 자유에 대한 감사의 마음 등이 복합적으로 뒤엉켰기 때문이다.

물론 <변호인> 역시 극화된 일화를 첨가한 상업영화에 불과하다. 영화 역시 자막을 통해 실존 인물과 거리를 뒀다. 개인적으로는 자막, 제작사의 보도자료, 감독과 배우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꼭 그랬어야 했나'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아직까지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그분의 이야기를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영화 <변호인>은 제작부터 개봉까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다행히도 천만 영화의 반열에 올랐다. 관객 대다수는 영화 속 이야기에 공감했지만 다른 천만 영화만큼의 수다를 털어놓지는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이나 저서를 조용히 찾아 읽고, 인터넷에서 옛 동영상을 보면서 영화가 준 감동을 반추했다. <변호인>이 남긴 후유증은 그렇게 지나갔다.

두 달 가량의 시간이 흐르고, 한국 시각으로 지난 3월 3일 오전 10시.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다.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시상식으로 알려진 아카데미는 이날 최초로 흑인 감독의 작품에 작품상을 줬다. 스티브 맥퀸 감독의 영화 <노예 12년>이었다. <노예 12년> 역시 <변호인>과 같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이 영화는 <변호인>과 달리 자막으로 거리 두기를 하지 않았다. 영화는 'The film is based on a true story'란 자막과 함께 흑인 노예들의 고된 표정과 축 늘어진 몸을 보여줬다. 또 다른 후유증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영화 <노예 12년>의 한 장면

영화 <노예 12년>의 한 장면 ⓒ river road entertainment


1841년 미국. 당시 남부에는 노예제가 남아 있었지만 북부에서는 흑인이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뉴욕에 살던 흑인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포 분)은 다행히 자유인이었다. 그는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남부에 팔려간 흑인 노예와 달리 솔로몬은 가족과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 본 두 남자가 솔로몬에게 좋은 조건으로 공연을 제안하고, 솔로몬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신 밤, 솔로몬은 정신을 잃는다. 다음 날 아침. 철창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한 줄기의 햇살 아래 쇠사슬에 묶인 채 감금된 솔로몬이 보인다. 솔로몬은 그날 이후로 자유인이라는 신분과 직업, 가족 등 그에게 주어진 행복과 자유를 강제적으로 빼앗겼다. 무려 12년 동안.

영화는 시종일관 담담한 태도로 솔로몬, 아니 노예 플랫을 바라본다. 한순간의 실수로 돌아오기 힘든 강을 건넌 솔로몬은 억울하게도 동일한 피부색의 노예들과 섞여 버렸다. 마음씨 좋은 백인 귀족의 간택을 기다리는 상품처럼 진열된 노예들. 그 속에 '특별상품'처럼 고성능, 다기능의 스펙을 갖춘 플랫은 어느 순간 모든 상황에 순응하고 자신만의 특기인 바이올린을 한쪽 어깨에 올려 연주한다.

중절모에 양장을 입었던 자유인 솔로몬의 연주와 팔려가는 노예들의 울부짖음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플랫의 연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자가 자유와 풍요로운 기운으로 가득했다면, 후자에서는 생존에 대한 고독한 열의와 각박하고 비상식적인 세상에 대한 회의가 느껴진다. 자유인 신분을 회복하고자 했던 솔로몬의 적극적인 저항은 이 '생존 연주'를 통해 잠시 유보된다. 솔로몬은 그렇게 플랫의 삶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이후 영화는 자유인 솔로몬이 노예 플랫으로 순응하는 과정과 힘겨운 노예 생활에서 신분 회복의 기회를 갖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인간의 치열한 생존 본능에 주목한다. 과거와 현재를 불규칙하게 섞은 편집은 플랫과 솔로몬의 삶을 단적으로 대비하는 동시에, 플랫이 솔로몬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시도 그 시절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결연한 의지를 전달한다. 고달픈 현재에 툭툭 던져지는 과거의 잔영. 이는 플랫이 본래의 솔로몬으로 돌아가기 위해 12년의 노예 생활을 악착같이 참을 수 있었던 원동력인 셈이다.

 영화 <노예 12년>의 한 장면

영화 <노예 12년>의 한 장면 ⓒ river road entertainment


<노예 12년>은 '롱 테이크'와 '롱 쇼트' 촬영기법을 인상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롱 테이크는 솔로몬이 겪는 고통이나 감정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주인에게 저항한 솔로몬이 발끝을 겨우 바닥에 댄 채 나무에 매달려 있는 장면을 보자. 꼼지락거리는 솔로몬의 발과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으로 삶에 대한 생물의 기본적 욕구를 내비치는 이 장면은 끔찍하게 매달린 솔로몬 뒤편으로 무관심한, 혹은 무관심하도록 강요받은 노예의 동선을 담아내며 시간의 경과를 설명한다. 그 시간 동안 솔로몬의 발은 계속 꼼지락거리고, 나뭇잎 역시 바람의 방향대로 휘둘린다. 아무도 그를 돕지 않는 상황에서 물 한 모금이 그의 목을 축였을 때, 이 보기 힘든 롱 테이크도 끝이 난다.

솔로몬의 표정에 주목한 장면 역시 눈길을 사로잡는다. 노동요를 따라 부르며 끝내 울부짖는 장면과 결말쯤에 불현듯 등장하는 솔로몬의 표정은 그 어떤 연출 기법의 개입 없이 솔로몬의 감정을 읽고 느끼는 데 집중된다. 관객은 가만히 솔로몬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 슬픈 감정에 사로잡힌다.

이 영화에서 쓰인 롱 쇼트는 '노예'라는 단어에서 떠올릴 폭력성, 잔인함 등의 이미지를 벗기는 데 고의적으로 쓰이고 있다. 물론 강조가 필요한 장면에선 카메라가 가까이 들어가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장면에서는 거리를 두겠다는 것이 감독의 의도인 듯 보인다. 멀리서 담아낸 노예들의 모습은 주변의 대자연의 풍광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로워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사이를 비집고 주인의 서늘한 채찍질이 등장하면 대자연이 좋은 포장지에 불과했음을 알게 된다. 일반 사회와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그들만의 세계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그 잔인하고 더러운 속을 감추고 있다. 영화는 12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짚어내지 않지만, 심하게 단절된 모습에서 솔로몬이 플랫으로 보낸 시간은 충분히 짐작된다.

상식 밖의 시대. 남 일 같지 않다. 어찌 된 영문으로 솔로몬이 노예로 살게 되었는지, 그의 가족은 노예로 팔려간 가장 솔로몬을 왜 찾지 못했는지 등 물음표가 여전한 것은 아쉽다. 기회와 위기의 점층이 결말로 부드럽게 연결되지 못한 것 역시 아쉬움으로 남는다. 플랫은 다시 솔로몬으로, 자유인으로, 잃어버린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처음부터 노예로 살았던 흑인들은 그 후로도 얼마의 시간을 노예로 보냈을까. 자신을 죽여 달라고 애원하던 이의 음성이 귓가에 맴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종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jksoulfilm.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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