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새 둥지를 닮은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이 완공되며 베이징은 축제의 분위기였다
▲ 2008년은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기대로 시작됐다 새 둥지를 닮은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이 완공되며 베이징은 축제의 분위기였다
ⓒ 조창완

관련사진보기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는 8(八 발음 빠)이다. 이유는 발음이 '돈을 벌다'는 뜻의 빠차이(發財)의 앞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새해 인사도 '부자되세요'라는 뜻의 '꽁시파(빠)차이'(恭喜發財)를 가장 선호한다.

팔이 들어가는 밀레니엄의 첫 해에 베이징 올림픽이 예정되었으니 그 기대 또한 남달랐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에는 액이 낀다)라는 말이 적용되는 한 해가 될 것이라는 불안한 예측을 누군가는 하고 있었다.

그 불안한 예감은 1월 10일 후난성, 지앙쑤, 지앙시, 후베이성에 폭설이 쏟아지면서 가시화됐다. 이 지역은 북위 30도 정도 지역으로 고지대가 아니면 겨울에도 눈 보기가 힘든 지역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역에 30센티 이상 폭설이 쏟아졌고, 거기에 기온까지 떨어지면서 교통이 마비됐다. 1월31일 중국 정부는 이번 폭설로 60명이 사망하고, 176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밝히고, 혼란 속에서 춘지에(2월7일) 귀성을 포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쥐띠 해 설날이 며칠 지난 2월 11일 새벽 우리나라에서는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을 얼마 앞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반면에 취임 후에는 4대강 문제 등 물과 관련된 사건이 한국을 들썩이게 했다. 이 혼란 속에서 개인적으로도 10년 여의 중국 생활을 마치고 급히 귀국했다. 아무런 예정이 없었던 일이기에 별 생각도 없었다. 

험한 토굴로 인해 공산당은 샨베이를 장정의 종착지로 잡았고, 결국 성공했다. 이 길에는 많은 우리 애국지사들이 있었다
▲ 옌안 인근 샨베이 고원의 모습 험한 토굴로 인해 공산당은 샨베이를 장정의 종착지로 잡았고, 결국 성공했다. 이 길에는 많은 우리 애국지사들이 있었다
ⓒ 조창완

관련사진보기


그런 혼란 속에 있던 2월의 마지막날 베이징으로 전화를 했다. 중앙당학교 최용수 교수가 전해인 2007년 8월19일 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슴 속으로 끝없는 죄스러움이 밀려왔다. 내가 최 교수를 본 것은 두 번이다. 2005년 7월에 방송된 KBS스페셜 <나를 사로잡은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중국 코디를 맡으면서다.

그해 겨울 담당 PD인 양승동 선배 등과 베이징 서북에 위치한 최 교수의 집을 찾으면서다. 당시 최 교수님은 중앙당학교의 교수였다. 중국 공산당의 사료를 볼 수 있는 드문 관계자였고, 최 교수는 사재를 털어서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운동가들의 관련 기록을 찾아냈다.

유교철학을 전공했지만 조남기 장군의 조언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사료를 추적해 발굴했다. 그를 통해 김산은 물론이고 한락연, 양림, 이철부, 정율성 등 항일운동 지사들의 자료를 발굴해 세상에 알렸다. 김산의 장시 '한해 동지를 조문하며' 등을 한국에 처음 소개했고, 이런 뜻을 알았기에 김산의 아들인 고영광 등 중국에 남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그를 어르신으로 모셨다. 하지만 최 교수를 찾은 한국 학자들은  최 교수가 발굴한 자료를 마치자신이 찾은 자료인양 발표해 적잖은 섭섭함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나 역시 김산 다큐가 끝난 후 최 교수에게 연락한 목적은 김산에 관한 평전을 쓰기 위해서였다. 나는 최 교수에게 공동저자로 책을 발표하겠노라고 말했지만, 선뜻 믿음이 서지 않은 듯 확답을 주지 않았다. 다른 일정으로 인해 차일피일 미루다가 급하게 귀국하면서 그 일을 잊었는데, 다른 일로 연락해 최 교수의 부음을 들었다. 전화를 받는 사모님은 영결식에 한국에서 아무도 오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운 듯한 떨리는 목소리였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할 수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님 이덕남 여사 등과 통화로 감회를 청취해 뒤늦은 부고 기사를 쓰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다.

장군의 고향인 왕청문에 중국이 세운 석상. 동북항일 운동의 가장 뛰어난 인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름조차 낯설다
▲ 동북항일연군을 이끈 양세봉장군 석상 장군의 고향인 왕청문에 중국이 세운 석상. 동북항일 운동의 가장 뛰어난 인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름조차 낯설다
ⓒ 조창완

관련사진보기


중국을 다니면서 가장 놀랐던 것 가운데 하나는 중국에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위대한 족적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피카소로 불린 한락연, 중국 근대 작곡의 대가 정율성, 중국 유일의 영화 황제 김염은 물론이고 중국 군대에서 포병을 만든 무정 등은 중국인들에게 더 알려진 우리 선조들이다.

또 동북항일운동의 중심인 양세봉, 조선족자치주를 만든 주덕해, 중국 혁명 가운데 위대한 족적을 남긴 양림, 윤세주 등도 널리 알려진 항일운동가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 역사에서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배제됐기 때문이다. 이런 사라진 항일 영웅들을 발굴하고 알린 이가 최용수 교수 같은 동포 학자들이었지만 조국은 이런 노력조차 제대로 평가하거나 대우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고향에서 이 기도를 하기 위해 오체투지로 온 수많은 이들이 모인다
▲ 포탈라궁을 보면서 아침 기도를 올리는 티벳사람들 고향에서 이 기도를 하기 위해 오체투지로 온 수많은 이들이 모인다
ⓒ 조창완

관련사진보기


6월 4일이 중국에서 금기된 날짜라면, 티벳 지역인 시장에서는 3월10일이 금기된 날짜다. 1959년 달라이 라마의 피신을 이끈 라싸 시위가 있었고, 이후에도 가장 미묘한 날이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이 세계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리는 이해는 티벳 사람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더 절실한 해가 될 수 있었다.

3월10일 전후로 티벳의 중심 도시 라싸는 물론이고 쓰촨, 윈난, 칭하이 등 티벳 지역에서 광범위한 시위가 벌어졌다. 승려들의 분신, 한족과 장족간의 민족 갈등 등이 첨예하게 진행됐고, 상황에 따라 철도가 멈추기도 했다.

체질적으로 고지대를 싫어하는 한족들이 첨범하지 않았던 해발 2500미터 이상에 주로 거주하던 티벳인들은 달라이 라마의 피신 이후 정체 없는 생활을 했다. 사원을 중심으로 티벳 문화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해를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올림픽을 치르는 상황에서 중국으로서도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았다.

3월 22일 치러진 대만 총통 선거에서 마잉지우(馬英九) 국민당 주석이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후난성 헝산(衡山)이 조적인 마 총통으로 인해 양안관계는 성공적으로 연착륙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아울러 이날 그리스에서 베이징 올림픽 성화가 채화되어 세계를 도는 긴 장정이 시작됐다. 물론 이 성화가 유래없는 반대인파에 수난을 당할 것을 예측하는 이들도 많지 않았다.

베이징 올림픽 성화가 파리에 도착하던 4월 7일부터 성화 문제는 불거지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의 발상지 답게 프랑스인들은 티벳 독립에 대한 적극적 지지를 표명했다. 4월8일에는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보이콧 의사를 보이는 등 이 문제가 쉽게 넘어가지 않을 징조를 보이기도 했다. 성화는 4월27일에 한국에 도착했는데, 성화의 보호역을 맡은 이들은 이미 한국에 5만 명에 육박하던 중국 유학생들이었다. 반대단체와 중국 유학생이 맞붙은 현장에는 보도블록은 물론이고 시너까지 등장해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혼돈 속에서 성화를 한국을 지나갔다.

이빙 부자의 공을 기려서 만든 사당. 이해 지진으로 많은 부분이 파손됐다.
▲ 두지앙의 얼왕먀오 이빙 부자의 공을 기려서 만든 사당. 이해 지진으로 많은 부분이 파손됐다.
ⓒ 조창완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이런 징조는 우울한 한 해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5월12일 중국 쓰촨성 원추안(汶川)을 진앙으로 한 리히터 진도 8.6의 강진이 발생했다. 사망자 69000명, 행불자 1만 8000명의 이 지진은 1976년 탕산대지진의 악몽을 떠올리는 참극이었다.

마을 전체가 사라진 지역도 많았고, 수천 년된 문화재들도 붕괴됐다. 특히 2300년의 역사를 가진 두지앙위앤(都江堰)은 진앙지에서 가까워 가장 큰 피해를 봤다. 두지앙위앤은 BC256년 이곳에 온 이빙이 아들과 공을 들여 쌓은 수리시설이다. 두지앙위앤의 상류인 민지앙은 수천미터에 달하는 설산이 많은 데 반해 강폭은 적어 여름에는 홍수가 많은 곳이었다.

그런 상황을 깨달은 이빙 부자는 '깊은 곳은 사구를 만들고, 낮은 곳은 제방을 만든다'(深淘灘, 低作堰)는 원칙하에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했다. 일정한 수위가 넘어가면 물을 여러 갈래로 분산하는 방식으로 민강의 거센 물줄기는 농업용수 등으로 오히려 유용한 작용을 하게 돼어, 그 이후부터 청두 등 부근 지역은 하늘의 마을(天府)이라 불릴 만큼 살기좋은 곳이 됐다.

하지만 축복스러운 행사가 있기전 이 지역민들에게 최악의 재앙을 내렸다. 지진의 원인으로는 삼협댐 등이 조심스럽게 오갔다. 저수량 393억 입방미터의 거대한 수조가 생기고, 대칭점에 있는 지각이 융기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였는데, 무시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중국은 삼협댐에서 생산하는 거대한 전기를 포기할 수는 없을 것도 필연적인 상황이기도 했다.

중국의 소프트파워를 자랑하는 개막식과 화려한 불꽃놀이
▲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불꽃놀이 중국의 소프트파워를 자랑하는 개막식과 화려한 불꽃놀이
ⓒ 조창완

관련사진보기


지진 희생자 가족의 슬픈 울음은 끝나지 않았을 지라도 베이징 올림픽은 멈출수 없었다. 8월8일 8시 8분 베이징에서 개막식이 거행됐다. 장이모가 1000억 원을 들여 연출한 이 개막식의 기본 내용은 '위대한 중국'이었다. 중국의 4대 발명품인 화약, 나침판, 항해술, 인쇄술을 테마로 한 이 개막식은 지나치게 자화자찬 중심이었다. 스케일이나 매스게임에는 만족했을지 몰라도 세계 양대 헤게모니로 성장하고 푼 중국의 소프트파워를 보여주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호기있는 개막식과 달리 중국의 시스템은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9월 말에는 멜라닌 분유파동이 일었다. 6명의 아이가 죽고, 수많은 아이들이 위기에 빠졌다. 멜라닌은 우유에서도 검출됐는데, 이번 사건에 연루된 기업들은 나 역시 중국에 있을 때 가장 애용하던 브랜드였다. 아이들도 평소에 먹었던 우유였다.

중국도 문제였지만 그해 9월 중순 미국에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시작됐다. 굳건하리라 생각했던 기축통화를 가진 미국의 위기는 세계를 경악시켰다. 양대 헤게모니고 뭐고 믿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조계창 기자는 옌지서 이곳으로 가는 길이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취재길이었다
▲ 중국서 북한으로 넘어가는 투먼 변경 조계창 기자는 옌지서 이곳으로 가는 길이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취재길이었다
ⓒ 조창완

관련사진보기


다사다난한 이 해의 마지막 달이 시작된지 얼마 안 된 12월 3일 나는 가슴을 찢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곧 귀국을 앞둔 <연합뉴스> 조계창 선양특파원이 사고로 인해 숨졌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며칠이 순식간에 가고 나는 <연합뉴스> 사무실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그의 영정을 봐야했다. 제수씨와 내용도 모르는 두 아이가 있었다. 특파원으로 가기 전 나를 찾아와 이런저런 것들을 묻고, 파견된 후에는 기자정신에 철저한 모습으로 공정한 중국 동북과 북한 소식을 전하던 그가 귀임을 몇일 안두고 그런 모습으로 돌아올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고 일주일 전에 있었던 통화에서 "조 선배 언제 중국 와요. 못 오면 서울가서 소주해요"라고 호기 있게 말하던 그가 서른 여섯, 피지도 못하고 갔다는 것이 한스러웠다.

귀임을 한 주 남긴 시점에 옌지에서 투먼으로 가는 언 땅을 위험한 중국 빵차에 맡겼던 열혈기자인 후배는 그렇게 가버렸다. 그해 두 번째 부음 기사는 그래서 더욱 비감했다. 나는 그를 기억하며 '잘 가거라, 너는 진짜 훌륭한 기자였다' 추도 기사로 그를 회억했다.

덧붙이는 글 | 연재기사 10회



태그:#베이징올림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