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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임인 덩샤오핑과 1982년 9월 13일 중앙고문위원회 첫회의를 하던 모습
▲ 보이보가 생전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중앙고문위 당시 주임인 덩샤오핑과 1982년 9월 13일 중앙고문위원회 첫회의를 하던 모습
ⓒ 중국정부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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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은 중국 8대 원로인 보이보(薄一波 1908~2007)의 부음(1월 15일)으로 시작됐다. 원래 이름은 '책에서 존재를 찾는다(서존書存)'였지만, 그는 '하나의 파도'라고 이름을 바꾸고 말 그대로 중국 공산 혁명에서 중요한 격랑의 하나가 됐다.

17살인 1926년에 공산당원이 된 그는 초반기 고향인 화북지역에서 혁명운동을 하다가 1949년 공산정권 수립 후에 재정부장, 국가건설위원회 주임, 국가경제위원회 주임, 국무원 부총리를 지내는 등 국가 장기 기획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역할은 '중앙고문위원회'다. 그는 1982년부터 10년 동안 덩샤오핑과 천윈을 보좌해 중앙고문위원회의 부주임으로 일했다. 문화대혁명 때 좌천한 경험 탓인지 그는 대표적인 보수파였다.

개혁개방 이후 조직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중국의 80~90년대를 대표하는 정치적 용어는 원로 정치였고, 그 뒤에는 8대 원로가 있었다. 8대 원로는 덩샤오핑을 비롯해 천윈(陳云), 펑전(彭眞), 양상쿤(楊尙昆), 보이보, 리셴녠(李先念) 완리(萬里), 쑹핑(宋平) 등을 말하는데, 이들의 터전이 바로 중앙고문위원회였다.

이 위원회는 장쩌민이 옥상옥을 없앤다는 이유로 2번 밖에 구성되지 않았지만, 덩샤오핑(1기 1982~1987)과 펑전(2기 1987~1992)이 주임을 맡았던 2기 동안에는 중국 공산당의 절대적인 흐름을 제어했고, 그 중심에는 두 번 모두 상무부주임을 맡았던 보이보의 역할이 지대했다.

이 시기 가장 큰 공은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성공적인 기초를 다졌다는 것이고, 가장 큰 과는 1989년 톈안먼 사태를 평화롭게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격랑 속에서 보이보는 개혁적인 성향을 보인 후야오방이나 자오쯔양과 대척점에서 보수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실질적인 내부 작업을 했다.

하지만 시간은 그를 비켜가지 못했고, 그 역시 100세를 1년 앞두고 사망했다. 그의 아들이 랴오닝성 서기를 하다가 재정부장을 거친 후 충칭시 당서기를 역임하면서 충칭모델을 만든 보시라이다.

보시라이가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충칭모델은 도농 간 빈부격차를 해소하면서 사회주의의 도덕성과 공동체 정신을 앞세운 신좌파 성향의 중국 발전 모델이다. 하지만 보시라이는 자신의 부패와 사생활 문제로 정치적으로 낙마했다. 

보이보 죽음 전후로 퍼진 에이즈 사건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소녕이 부모를 장사지낸후 있는 모습
▲ 에이즈의 가장 큰 피해지인 허난성 차이향촌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소녕이 부모를 장사지낸후 있는 모습
ⓒ 에이즈피해자인터넷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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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보 죽음을 전후해서 중국을 발칵 뒤집은 사건은 허난성을 중심으로 퍼진 에이즈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90년을 전후로 이 지역에 급속히 확산된 매혈에서 비롯됐다. 1년 수입이 500 위안에 불과하던 이 지역에서 매혈 한 번에 50위안 정도를 안겨줬다. 건강에 큰 지장이 없어서 매혈 문화는 크게 퍼졌다. 그런데 문제는 가장 기본적인 데서 벌어졌다.

의학에 상식이 없던 매혈센터들이 주사기 한 대로 수많은 피를 뽑으면서 에이즈가 순식간에 확산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2006년 11월 중국 내 에이즈 감염자는 18만 명가량이라 밝혔지만, 세계보건기구 등 국제기구는 중국 내 감염자가 65만 명이라 밝혔다.

이런 상황은 이 지역 출신 작가 옌롄커(閻連科)의 <딩씨마을의 꿈>을 통해서 잘 나타난다. <딩씨마을의 꿈(丁庄梦)>은 그의 고향 허난성에 벌어진 에이즈 사건이라는 당대 중국 문제에 가장 예민하게 접근한 소설이다.

80년대부터 매혈이 유행하면서 딩좡 사람들도 그 대열에 합류한다. 그런데 그들이 몰지각하게 사용한 매혈 바늘에는 에이즈 균이 숨어 있었다. 마을은 차츰 에이즈 환자로 들어차기 시작하고, 서서히 죽음의 문턱이 다가온다.

매혈을 주도하던 가족과 그 피해자들, 이런 속에서도 본심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분투가 눈물겹게 그려져 있다. 이 사건은 2000년 초부터 베이징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확산됐다. 베이징이나 톈진 유학생들 역시 2000년 초부터 에이즈균 주사를 든 허난 사람들이 무차별로 사람들을 찌르고 다닌다는 말에 공포감에 떨고 있었다.

2월에는 한국에서 처참한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2월 11일 새벽 전남 여수시 화장동에 있는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불이 나 9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당했다. 그중에는 중국 동포를 포함한 중국 국적인이 8명 사망, 16명 부상당했다. 한중 수교를 전후해 들어오기 시작한 중국 동포들의 코리아드림은 산산이 산화해 버리고 만 것이다.

필자에게도 이 사건은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중국에 있으면서 취재나 여행을 위해 동포들이 주로 거주하던 동북지역을 다녔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지만, 현지에 남아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다수였다. 또 수교 이후 급속히 한국행이 많아지면서 동포들이 중심으로 살았던 중국 동포 자치 지역들은 하나하나 무너지기 시작해 옌볜조선족자치주 역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조선족 자치주를 설계한 주덕해 연변조선족자치주 주덕해 주장의 기념비. 연변대 뒷산에 있는데 갈수록 위축되는 자치주를 보면서 씁쓸해 할 것이다.
▲ 조선족 자치주를 설계한 주덕해 초대 주장의 기념비 조선족 자치주를 설계한 주덕해 연변조선족자치주 주덕해 주장의 기념비. 연변대 뒷산에 있는데 갈수록 위축되는 자치주를 보면서 씁쓸해 할 것이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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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4일에는 저지앙성 시진핑 당서기가 상하이 당서기로 임명됐다. 전임 당서기 천량위(陳良宇)가 사회보장기금 유용 등 부패사건으로 낙마하자, 그 자리를 차기 지도자 중 하나인 시진핑으로 세운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우선 상하이 당서기는 여전히 태상황 같은 역할을 하던 장쩌민 전 주석의 후광이 발휘되는 자리로 장 전 주석의 동의가 암묵적으로 필요했다. 시진핑이 거기로 갔다는 것은 장쩌민계도 시진핑을 상하이방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시진핑은 아버지 시중쉰이 전인대 부위원장을 지낸 태자당의 일원이다. 이 때문에 시진핑은 태자당이면서 상하이방의 일원이 된 것이다. 시진핑은 젊은 시절 하방 당시 공청단에 가입했고, 칭화대를 다녔기 때문에 정치적 스펙트럼이 당시 정권의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요소와 코드를 맞추는 격이었다. 이후 시진핑은 리커창이나 보시라이와 권력투쟁을 벌일 것이라는 다양한 추측이 오갔지만, 2013년에 장쩌민의 권력까지 승계받는 절대적 지도자로 등극해 그런 추측이 공상소설임을 증명했다.

3월 30일에는 랴오닝성 따리엔에서 멀지 않은 창싱다오에서 STX그룹의 중국 조선소 기공식이 열렸다. 진해공장은 고부가가치 선박에 치중하고, 중국에는 밀려드는 수주물량을 채우겠다는 포석이었다. 이후 STX는 4조 원가량을 투자해 창싱다오 공장을 준공하고 운영했지만, 2013년 위기를 맞으면서 무리한 투자였음이 확인됐다. 이 과정에서 STX 창싱다오 조선소는 헐값으로 팔리는 사태를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4월 16일 미국 버지니아 폴리테크닉 주립대학에서 미국 유학생 조승희씨의 총격사건으로 32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초반에는 중국계 유학생으로 알려졌다가 한국계 재미교포로 확인되었다.

주한중국대사관 황정일 공사... 피로 호소로 링거 맞다가 급사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 14일 오후 3시 나는 베이징 공항 도착 홈에서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조용히 출구로 나오는 상복을 입은 일행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들은 전날 베이징에서 영결식을 치르고 귀국하는 주한중국대사관 황정일 공사의 유족들이었다.

7월 29일 피로를 호소한 황 공사는 대사관 인근에 있는 병원을 찾았다가 링거를 투여하는 상태에서 로세핀을 맞다가 급사했다. 링거액의 칼슘과 로세핀이 응고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문제로 비상식적인 처방이었다. 대사급 공사가 사망했지만, 한국은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유족들은 한국과 중국에서 법정소송을 진행했지만, 대부분 패소했다. 이 사건은 대사급 공사마저 중국과의 문제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말해준 가슴 아픈 사건으로 기억되었다. 

<화폐전쟁> 책표지.
 <화폐전쟁> 책표지.
ⓒ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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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시장에서 잊을 수 없는 비상의 기억을 만드는 이해에 중국 금융계에서는 의미 있는 하나의 책이 출간됐다. 쑹훙빈(宋鴻兵)의 <화폐전쟁(貨幣戰爭)>이 바로 그 책이다. 1968년생으로 당시 39살이었던 쑹훙빈은 동베이따쉐(東北大學)를 졸업하고 미시건 대학에서 거시경제로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다양한 금융업을 겪은 후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컨설턴트를 지내면서 다가올 금융위기를 진단해 냈다.

그의 생각과 향후 중국의 금융전략에 대한 포부를 담은 이 책은 6월에 출간해 순식간에 장안의 지가를 올렸다. 이때에도 이미 측량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달러화를 축적하던 중국으로서는 잘못하면 종이쪽지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달러화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쑹훙빈의 저작은 중국 국민들뿐만 아니라 중국 정계나 재계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이후 쑹훙빈은 중국사회과학원의 산하 기관의 연구기관의 책임자가 되어 중국 거시 통화정책의 중요한 브레인 역할이 됐다.

중국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안화를 일본 엔화는 물론이고 달러에 버금가는 국제통화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미국 금융패권에 대한 도전이었고, 수많은 위험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국민들이 피땀 흘려 만든 제품으로 종이가 될 수 있는 달러를 구매하는 것을 바꾸는 장기적 전략도 차근차근 진행됐다. 덕분에 쑹훙빈은 이제 가장 유명한 중국 금융계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

탕웨이는 이 영화의 노출로 중국에서 운신의 폭이 좋아졌지만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 영화 색계의 중국 포스터 탕웨이는 이 영화의 노출로 중국에서 운신의 폭이 좋아졌지만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 영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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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1일에는 리안 감독의 새 영화 <색계(色戒)>가 중국 전역에 개봉해 인기를 끌었다. 탕웨이가 주연을 맡은 여주인공 왕자즈는 30년대 상하이 사교계의 꽃으로 불리던 국민당 정보원 정핑루(鄭平如 1918~1940)였고, 량차오웨이가 주연을 맡은 이 선생의 실제 인물은 친일파 왕정웨이가 만든 정보기관의 책임자 딩모춘(丁默邨 1901~1947)의 실화였기에 묘한 감회를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2007년 12월에는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와 장징궈의 유해가 고향인 저지앙성으로 이장할 계획이라는 발표되었다. 반면에 탕웨이는 지나친 노출 등을 핑계로 중국 영화계에서 출연 정지를 받았다. 하지만 이후 한국 등지에서 활동하며, 국제적인 스타로 부상했다.


태그:#보이보, #중국, #색계, #탕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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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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