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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창간 14주년 특별기획의 하나로 <행복사회의 리더십>을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지난해 오연호 대표기자가 연재한 '행복지수 1위 덴마크의 비결을 찾아서'의 속편격이다. 덴마크 행복사회의 뿌리를 찾아가면서 우리는 더 나은 행복사회를 위해 오늘 어떤 씨앗을 뿌릴 것인지를 모색해본다. 이 연재는 2014년 9월 초 단행본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오마이북)로 출간될 예정이다. [편집자말]
'과연 해피엔딩이 될 것인가?' 우리는 영화를 볼 때 이 점에 주목한다. 정을 준 주인공이 곤경에 처하면 가슴이 아프다. 결말만은 주인공이 행복해지길 바란다. 어디 영화뿐이랴. 한 인간의 삶을 지켜볼 때도 마찬가지다.

그룬트비는 해피엔딩의 주인공이다. 행복한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다. 그는 덴마크를 행복한 사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도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

세상엔 대의를 위해 개인의 행복을 희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시대와 씨름하다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병들어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비록 오래 산다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지 못한 채 눈을 감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룬트비는 달랐다.  

그룬트비의 생가를 둘러보며

 그룬트비 생가. 코펜하겐에서 남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 우드비(Udby)에 있다.
 그룬트비 생가. 코펜하겐에서 남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 우드비(Udby)에 있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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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14년 1월 28일 칼바람이 불던 겨울, 그룬트비의 생가를 찾아갔다. 코펜하겐에서 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작은 마을 우드비(Udby). 그룬트비는 이곳에서 1783년 9월 8일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가지붕으로 된 그룬트비의 집으로 들어서는 것은 마치 18세기말로 떠나는 시간여행 같았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생가는 사각형이었는데 한가운데에 있는 마당이 꽤나 넓었다. 마당 위쪽 중앙엔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고 거기에 그네인 양 고무타이어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지금 어린 그룬트비가 이 마당에 나타난다면 아마도 이 고무타이어 그네를 타고 놀지 않을까?

어떤 사람들은 그룬트비를 덴마크의 아버지라고까지 부른다. 그런 인물이 뛰어놀았던 마당 한가운데서 나는 한참이나 사방을 둘러보았다. 날은 여전히 햇볕 한줌 없이 을씨년스러웠다. 벌써 7일째 햇볕을 보지 못했다. 날씨가 이처럼 좋지 않은 나라가 행복지수 세계 1위라니. 그룬트비 같은 인물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해봤다.

 그룬트비 추모비와 그가 한때 담임목사로 설교한 교회. 그 사이로 그룬트비의 생가가 보인다.
 그룬트비 추모비와 그가 한때 담임목사로 설교한 교회. 그 사이로 그룬트비의 생가가 보인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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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바로 뒤쪽으로 시골 교회가 보였다. 250년 이상 된 이 교회가 그룬트비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목회를 했던 곳이고, 그룬트비 자신도 한때 이곳에서 목회를 했다. 교회에 들어서니 앞마당에는 그룬트비 아버지의 무덤이 있었다. 그룬트비의 흔적을 찾아 교회주변을 한 바퀴 돌아봤다. 아주 조그마한 뒷동산 쪽에 그룬트비의 추모비가 보였다. 그곳으로 오르는 길은 나무 계단이었는데 눈이 덮여 있었다. 발자국이 전혀 없는 것을 보니 며칠간 그룬트비가 심심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조심스레 눈을 밟고 한 발 한 발 올라갔다. 3m 높이의 추모비. 아버지의 묘비명은 소박했는데 아들의 추모비는 그것보다 20배 이상 컸다. 아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추모비는 교회와 그의 생가를 함께 내려다보고 있다. 그 앞에 서니 마치 그가 지금 살아있는 채로 나를 맞이하는 것 같았다. 나는 추모비 앞에서 고개를 잠시 숙인 뒤에 이렇게 한마디 건넸다.

"이 우중충한 날씨에 어떻게 하면 인생을 그렇게 뜨겁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까?"

그룬트비가 만약 살아있다면 나에게 뭐라고 답했을까? 답을 기다리며 사방을 둘러보니 산 하나 없이 평평한, 전형적인 덴마크의 농토뿐이다. 눈 덮인 그 농토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 두꺼운 외투를 헤집고 살을 에인다. 세찬 바람소리 속에서 그룬트비가 이 한마디로 답하는 것 같다.

'행복하려거든 사랑하라.'

그룬트비는 많은 것을 사랑했다. 그는 기독교 신자로서 목회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했다. 민족주의자, 애국주의자로서 덴마크 민족과 나라를 사랑했다. 교육자로서 시민을 사랑했다. 자유주의자로서 금기에 도전하는 것을 사랑했다. 시인으로서 시와 노래를 사랑했다. 감수성이 풍부한 남자로서 여인을 사랑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그는 역동적이었다. 게다가 그는 천수를 다했다. 19세기로서는 매우 드물게 무려 89세까지 살았다.

미래학자 얀센 "그룬트비는 덴마크의 행운"

 그룬트비 도서관에 있는 그의 초상화.
 그룬트비 도서관에 있는 그의 초상화.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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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미래학자인 랄프 얀센씨를 코펜하겐에서 만나 저녁식사를 했다. 우리에게 <드림 소사이어티> 저자로 알려진 덴마크인이다. 그는 덴마크가 왜 행복지수 세계 1위의 나라가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그룬트비를 언급했다.

"우리 덴마크인들은 참 행운아들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그룬트비 같은 사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나는 어떤 말이 이어질지 짐작을 하면서도 "왜요?"라고 물었다.

"그는 민주주의에서 꼭 필요한 것들을 주창했어요. 민주헌법보다 중요한 것이 시민의 자유, 시민의 각성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민교육에 열정을 바친 겁니다. 그는 지금 덴마크의 좌파와 우파 모두로부터 존경받고 있습니다."

이 미래학자는 한 명의 리더가 한 사회를 바꾸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말해줬다. 래서 나는 궁금했다. 만약 그룬트비가 오늘의 덴마크 사회의 기틀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그런 그룬트비는 누가, 무엇이 만들어냈을까?

이걸 우리의 질문으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대한민국을 행복사회로 다시 세팅하기 위해서는 리더와 시민이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한데, 행복사회를 위한 리더십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분명한 정신적 가치와 열린 사고

그룬트비에 대한 나의 공부는 아직 얕다. 그래도 무엇이 그를 만들었는가를 한 번 중간 정리해보자.

첫째, 분명한 정신적 가치가 있었다. 그룬트비에겐 그것이 신앙의 힘이었다. 목회자로서, 크리스천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서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그에게 있었다.   

그룬트비의 이웃 사랑은 자선이나 도와주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가 폴크(Folke)라는 단어를 어떻게 '진화'시켰는가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덴마크 사회에서는 Folke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학교(Folkeskole), 교회(Folkekirten), 정당(Folkepart)의 이름에도 들어가 있다. Folke는 아예 문화가 되어 있다. Folke는 그룬트비가 유행시킨 말인데 그의 식대로 풀이하면 '민족성을 담지한 깨어있는 시민'정도가 되겠다. 네 이웃을 '깨어있는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그룬트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덴마크의 문화와 시스템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룬트비는 이웃사랑이 평등사회 구현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많이 가진 사람이 적고, 충분히 가지지 못한 사람이 더 적을 때, 우리 사회는 더 풍요로워진다."

덴마크의 사회복지 시스템은 이런 형제애와 평등의 가치 위에서 이뤄졌다.

둘째, 독서의 힘이다. 그는 청소년 시절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고향을 떠나 펠트 목사로부터 6년 동안 개인 교습을 받았는데 이때 방대한 독서를 했다. 종교, 정치, 역사, 어학 등 그의 전방위적인 관심은 이때의 독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셋째, 감성의 힘이다. 그룬트비는 어린 시절 노래 속에서 자랐다. 가족 분위기가 그랬다. 그래서 그룬트비는 감성이 풍부했다. 그는 시인이자 찬송가 작사·작곡가가 되었다. 오늘날의 덴마크 교회에서 불리는 찬송가 전체에서 그룬트비의 곡은 271곡이나 된다. 그룬트비가 작사·작곡을 것을 다 모으면 1400곡이 넘는다. 어떤 덴마크인은 그를 "다윗 이후 최고의 시인"이라고 말한다. 덴마크인들은 부활절, 크리스마스, 결혼식, 장례식 등에서 그룬트비가 지은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그는 어떤 논리나 이론에 앞서 감성에서 덴마크인들을 이끌었다.

넷째, 열린 사고의 힘이다. 그룬트비는 애국자였으나 국수주의자가 아니었다. 조국을 사랑했으나 외국문화에 열려 있었다. 그는 1828년부터 왕립재정부의 지원을 받아 영국으로 가서 문학을 공부했다. 매년 3개월씩 3년간 영국에 머물 수 있었다. 이때 그룬트비는 세익스피어에 매료되었고 영국의 자유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토론을 중시하는 옥스퍼드 대학의 자유로운 학풍에 매료되었다.

그룬트비는 자유로운 사고를 제약하는 어떤 것도 반대했다. 그는 열린 마음으로 토론을 하는 것이 법이나 기관보다 더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반대의견을 가진 자를 제압하지 않고 오히려 환영했다.

"교회 안에서도 비판의 자유 있어야"

 그룬트비 도서관 풍경. 누구에게나 개방된다.
 그룬트비 도서관 풍경. 누구에게나 개방된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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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애국의 힘이다. 그룬트비는 무엇보다 애국자였다. 1807년 영국이 코펜하겐을 침공했을 때 청년 그룬트비는 직접 저항군으로 참여했다. 그는 1808년 자신의 첫 문학작품인 <덴마크의 가장무도회>를 통해 패전 이후 국가가 위기를 맞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덴마크 국민들을 질타한다.

목사 그룬트비의 애국은 한때 그를 정치가로 변신시킨다. 그는 1848년부터 1849년까지 절대왕정을 종식시킨 제헌의회에 참여했다. 65세부터 71세까지 하원의원을 몇 차례 지냈고, 83세에 잠시 상원의원이 되었다.

여섯째, 그는 용기가 있었다. 그룬트비는 소수파 신세를 감내하는 용기, 직언하는 용기가 있었다. 그는 문제가 있으면 고치려 했다. 개혁과 혁신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그에 따르는 논쟁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기득권세력의 문제를 주로 지적했기 때문에 당대로서는 언제나 소수파였다. 그가 만든 찬송가와 책은 오랫동안 판금을 당했다. 그래서 목사 자리를 찾기도 힘들었다. 그의 교육관, 교회관은 처음엔 소수파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대중의 인정을 받게 된다.

일곱째, 그는 열정이 있었다. 그래서 그룬트비는 늘 새 판을 짰다. 그는 교육 쪽에서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자유학교'라는 새 판을 만들었듯이 종교 쪽에서도 그랬다. 그는 목회자이면서도 시민들이 '교회로부터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목회자 신분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주장이다.

덴마크 국민들은 1848년 자유헌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덴마크는 1536년에 만들어진 루터교를 국교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대왕정시대에 왕은 국민의 믿음을 책임지고, 국민을 '이단'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모든 덴마크 국민들은 국교인 루터교회에 다녀야할 의무가 있었다. 그룬트비는 이것을 '종교탄압'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기독교는 자유 없이 존재할 수 없다면서 덴마크인들이 국가 교회에 속하지 않을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국가 교회 안에서도 다른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그룬트비의 영향으로 덴마크에서는 정치권과 목회자가 개입하지 않은 자유로운 교회인 '시민의 교회'(Folkekirken)들이 생겨났다.

그룬트비가 종교의 자유를 주창할 때 그는 분명 소수파였다. 그러나 1920년 코펜하겐 북쪽의 한 언덕에 그를 기념하는 교회가 세워진다. 그 자금은 정부와 시민이 각각 반씩 분담했다. 소수파 그룬트비는 어느새 그렇게 국민 다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새마을 운동과 그룬트비 정신

그룬트비는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일제 강점기의 농촌계몽운동, 이상촌 건설운동도 그룬트비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펼치면서 덴마크 농촌사회를 그 한 모델로 여겼다는 점에서 그룬트비의 영향은 새마을 운동에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되돌아보면 참 아쉬운 일이다. 그룬트비는 자유와 평등을 그 무엇보다 강조했는데 새마을 운동에서는 그것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국가가 주도를 했다. 농민은 지시대상이었고, 근면하기만 하면 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농민을 진정한 주인으로 삼고, 근면과 함께 자유와 평등도 강조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코펜하겐의 그룬트비 연구소에서 복사해온 그룬트비 전기를 짬짬이 읽고 있다. 언젠간 내 스스로 그의 전기를 쓰고 싶다. 대한민국을, 한반도를 다시 재구성할 리더를 기다리며.  

 오연호 대표 기자가 연재했던 <'행복사회의 리더십'-'행복지수 1위 덴마크 비결을 찾아서'>가 2014년 9월1일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오마이북)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오연호 대표 기자가 연재했던 <'행복사회의 리더십'-'행복지수 1위 덴마크 비결을 찾아서'>가 2014년 9월1일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오마이북)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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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대표기자 & 대표이사. 2000년 2월22일 오마이뉴스 창간. 1988년 1월 월간 <말>에서 기자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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