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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티공소 마을 초입에 자리한 단층의 흰색 시멘트 건물인 공소는 1868년 설립된 천주교 부산교구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곳이다.
▲ 살티공소 마을 초입에 자리한 단층의 흰색 시멘트 건물인 공소는 1868년 설립된 천주교 부산교구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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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금) 볕이 따뜻한 늦겨울, 살티순교성지를 찾았다. 전국의 많은 순교 성지 중 살티를 찾은 건 단순히 내가 사는 부산과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소풍가듯 가볍게 나섰다. 언양에서 밀양으로 가는 24번 국도를 따라가다 어렵지 않게 살티를 찾을 수 있었다.

살티순교성지가 위치한 울산 덕현리는 작고 한적한 마을이다. 현대식으로 개조한 아담한 집들이 많아 전형적인 시골마을 풍경은 아니다. 집들 창가에 성모마리아상이 비치는 것을 보니 아마 천주교 신자들이 성지 주변에 새롭게 집을 꾸민 듯하다.

마을의 평화스러운 모습과 달리 마을 초입에 자리한 단층의 흰색 시멘트 건물인 살티공소는 약간의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공소는 천주교의 단위교회로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지역신자들의 모임을 말한다.

소풍가듯 가볍게 나선 순교 성지 살티

안내문 살티공소 앞 바윗돌에 붉은 색으로 새겨진 안내문에는 이곳이 그 시대 살아남은 자들의 피난처임을 말해주고 있다.
▲ 안내문 살티공소 앞 바윗돌에 붉은 색으로 새겨진 안내문에는 이곳이 그 시대 살아남은 자들의 피난처임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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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티공소 앞 바윗돌에 새겨진 안내문 글씨의 붉은 색이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안내문은 이곳이 처참한 죽음의 절벽에서 실낱같은 생명줄을 잡고 연명해야 했던 그 시대 소외자들의 피난처였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당혹스러웠다. 신해박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 천주교 박해는 교과서에서만 보았을 뿐 한 번도 죽음에 직면했던 그들의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다. 당시로서는 생소한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혹독한 고문 속에 내던져져 죽어 갔다는 사실에 새삼 몸서리가 쳐진다.

안내문에 따르면 이곳 '살틔공소'는 1866년 병인박해를 헤치고 살아남은 자들이 옮겨온 피난처로 형성됐다. 1866년 당시 '살틔공소' 주위는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삼림이 울창해 맹수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실제로 안내문에는 김문옥 신부 부친이 호랑이에 잡혀 먹혔다는 얘기를 적어놓았다. 사람들 대신 맹수들 곁으로 피난 왔으니 당시 예수교라는 생소한 믿음이 기득권에 피해를 줄 것이라고 판단한 이들이 맹수보다 더 무섭고 포악했음을 알 수 있다.

석남사까지 교인들을 잡으러 왔던 관원들도 이곳을 알아채지 못하고 경주로 넘어가곤 해서 이곳이 교인들의 죽음을 면하게 해준 '살터' 혹은 '살틔'로 불리게 됐다고 안내문은 적고 있다.

공소내부 살티공소내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예배를 하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 있다.
▲ 공소내부 살티공소내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예배를 하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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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티공소의 문을 살짝 열어보니 영화에서나 볼 법한 소담한 예배당의 모습이 드러난다. 시멘트 벽이 흰색과 초록색으로 깔끔하게 칠해져 있다. 정면의 큰 십자가가 위엄보다는 푸근함을 준다. 교회나 성당에 있는 긴 예배용 의자가 없이 마룻바닥만 있다. 예전의 모습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예배하는 모양이다.

150년 전 맹수들이 들끓는 숲속에 모여 무릎 꿇고 예배드린 이들은 과연 어떤 확신을 가졌던 것일까? 출세수단도 아니고 사교모임도 아닌 것은 분명하다. 현대인들이 신앙을 갖는 가장 큰 이유라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도 아닐 것 같다. 그러기엔 너무나 치열한 믿음이다. 이들은 과연 무엇을 깨달았던 것일까? 그 깨달음이 지금도 존재하는가?

소수자의 생각에 매질해야 했던 이유에 분노

살티순교성지 순교자 김영제 베드로의 묘와 그 가족들의 묘가 위치해 있다.
▲ 살티순교성지 순교자 김영제 베드로의 묘와 그 가족들의 묘가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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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티공소로부터 마을을 가로질러 500m 정도 가면 순교자 김영제(金永濟 1827~1876) 베드로의 묘와 그 가족들의 묘가 위치한 살티순교성지가 있다. 김영제의 조부 김재권(프란치스코)은 부산지방 최초의 천주교신자였다. 김영제는 무진박해가 경상도 지역을 휩쓴 1868년 7월 체포돼 극심한 고문을 당한다. 1869년 나라의 경사로 특별사면을 받게 돼 현재의 살티 지역으로 옮겨 살았으나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으로 1875년 결국 명을 달리했다.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당시 지식인과 민초의 이야기를 그린 김훈의 역사소설 '흑산'을 보면 매질을 당하는 극심한 고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매질 후 장독을 피하기 위해 똥물을 마셔야 했다는 부분에서는 매질은 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오장육부에 직접 내려치는 것임을 알았다. 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매 맞는 자의 정신과 영혼에 내려치려는 의도가 분명했던 것도 알았다. 하지만 똥물을 마셔가며 매질의 고통을 이겨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힘들었다.

다만 다수가 아는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소수자의 생각에 매질을 해야 했던 이유에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다른 생각을 가진 소수자들은 당연히 매질하고 죽여야 한다는 기득권층의 생각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대다수 민초들의 무관심이 더 안타깝고 무섭다.

십자가 길 살티순교성지에 십자가 길 14처가  세워져 있다.
▲ 십자가 길 살티순교성지에 십자가 길 14처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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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소풍하듯 온 살티에서 너무 무거운 짐을 안은 듯하다. 이미 150년이나 흐른 이야기인지, 불과 150년 전 이야기인지 판단이 희미해진다. 약한 자들에게 가해지는 다수의 폭력은 여전한 건 아닌지…. 천주교 성지로 박제화된 '살티'가 아닌 서로의 다른 생각과 믿음의 이유를 성찰하는 '살틔'가 우리들 삶 속에서 거듭나야 할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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