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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유신>과 '박정희 시대의 민주노조운동과 대한조선공사'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겉표지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유신>과 '박정희 시대의 민주노조운동과 대한조선공사'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겉표지
ⓒ 한겨레출판·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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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을 앞두고 한국의 사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독재자의 딸이 인권변호사와 맞붙는 선거에서, 어쩌면 그 둘의 극명한 대비가 국민의 역사 인식과 맥을 같이하는 싸움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학자로, 한 사람의 시민으로 그들이 가진 사명감은 분명했다.

"역사가 퇴보해선 안 된다."

모임의 막내 격인 한홍구 교수가 나섰다. 그렇게 그는 독재자의 시절을 기록했다. 그의 딸이 '퍼스트레이디'로 정치를 배운 그때를.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자유와 인권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희생의 대가다. 정녕 이 세대는 그 선진들에게 빚진 자들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누림이 무임승차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유신시대를 부끄럽게 살아온 세대가 용서 받을 길이 있을까." -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유신> 여는 글에서)

비슷한 시각, 역사학을 공부하고 미국에서 한국학 교수로 재직하던 남화숙 박사는 부산 영도의 어느 조그만 사무실에서 1만 쪽에 가까운 문서를 발견한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 시절 불타올랐던 선진적인 노동운동에 대한 기록이었다.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아래 조공)의 노동자들이 폭압적인 박정희 정권의 군홧발에 신음하지 않고 도리어 얼마나 민주적이고 진취적인 노동 운동을 펼쳤는지를 알 수 있는 문서들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확고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각각 <유신>과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를 썼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세운 박정희 정권의 잔인한 야만성과 비정규직·비숙력공·여성을 감싸 안았던 노동자들의 민주성이 극명한 대비를 이뤘다. 동시대에 펼쳐진 이 두 아이러니한 사실 앞에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한 교훈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 역사에 새겨지지 말았어야 할 이름 '유신'

박정희는 1971년 4월 25일, 장충단 공원에서 "내가 이런 자리에 나와 여러분에게 '나를 한 번 더 뽑아주십시오'하는 정치연설은 오늘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라며 유세했다. 불행히도 그는 그 약속을 지키고야 말았다. 유신을 통해 국민에게서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버렸기 때문이다.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정권은 대기업 편에 서서 노동운동에 헌신적인 노조원들을 쓸어 냈다. 이후 다시 자주적인 노동운동이 분출하기까지 18년이 걸렸다. -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북트레일러 갈무리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정권은 대기업 편에 서서 노동운동에 헌신적인 노조원들을 쓸어 냈다. 이후 다시 자주적인 노동운동이 분출하기까지 18년이 걸렸다. -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북트레일러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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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에서는 박정희의 뜻이 곧 법이었다. 박정희가 유신헌법에 쑤셔 넣은 '긴급조치'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고 법원의 권한을 제한할 수도 있으며 대통령의 명령이 법률과 동일한 효과를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삼권분립은 무의미했다. 사실 새로울 것도 없다. 박정희가 집권한 18년 중 절반 이상이 계엄령, 위수령, 비상사태, 긴급조치가 발령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정통성 없는 정권을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저자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사실상 연쇄살인으로 규정했다. 박정희의 자리를 민주적인 수단으로 위협했던 이들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김대중 납치사건, 장준하 의문사. 그뿐 아니라 이인자들도 토사구팽하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는 일종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탱크를 앞세워 정권을 찬탈했을 뿐 아니라 일본군 장교, 남로당 군부 프락치란 경력은 그를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 시절 박정희가 정권 비판에 특히나 민감했던 이유는 그를 향한 비판이 거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장준하는 "대한민국 국민 29,999,999명이 대통령 될 자격이 있어도 일본군 장교 출신 다카키 마사오만큼은 대통령 될 자격이 없다"고까지 갈파했다.

"광복조국의 하늘 밑에는 적반하장의 세상이 왔다. 펼쳐진 현대사는 독립을 위해 이름 없이 피 뿜고 쓰러진 주검 위에서 칼을 든 자들을 군림시켰다. 내가 보고 들은 그 수없는 주검들이 서러워질 뿐, 여기 그 불쌍한 선열들 앞에 이 증언을 바람의 묘비로 띄우고자 한다." - 장준하, '돌베개에 붙이는 말' (<유신> 138쪽에서 재인용)

유신체제의 법령 입법과 개정의 공로와 실력이 높이 평가돼 유례없이 승진한 당시 김기춘 검사는 지금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고 있다. 유신 시대의 열혈 청년 장교 남재준은 국정원장이 됐다. 유신을 잊고 살아온 대가는 꽤 크다. "하필 박근혜가 보고 배운 박정희는 집권 말기의,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는 저자의 지적이 공허하게 들리지만은 않는 이유다.

오히려 더 민주적이었던 노동자들

남화숙 교수는 거의 1만 쪽에 가까운 노조 자료를 여러 차례 읽는 뒤 큰 혼란에 빠졌다고 회고했다. 한국에서 자주적인 노조가 등장하기 시작한 1980년대보다 한참 전인 1960년대에 일부 산업 노동자들이 전투적이고 민주적인 노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니! -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북트레일러 갈무리
 남화숙 교수는 거의 1만 쪽에 가까운 노조 자료를 여러 차례 읽는 뒤 큰 혼란에 빠졌다고 회고했다. 한국에서 자주적인 노조가 등장하기 시작한 1980년대보다 한참 전인 1960년대에 일부 산업 노동자들이 전투적이고 민주적인 노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니! -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북트레일러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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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조공 노조의 성명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주제는 '소속된 모든 노동자의 공평하고 평등한 대우'였다. 산업화란 미명 아래 희생이 당연시되던 시대란 점을 감안하면,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더군다나 지금과 비교해 굉장히 권위주의적이고 경직된 사회였을 텐데 말이다.

노조는 많은 문서에서 노조가 두 가지 사명을 수행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회사와 산업이 번창하도록 돕는 것과 조합원을 위해 좀 더 복지를 확보하는 것. 이런 목표는 회사 관리자들이 경제 발전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공유한 평등한 파트너로서 노동자를 존중한다면 쉽게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측은 규제로만 노동자들을 얽매려 했다. 예컨대 3분 지각에 출근을 못 하도록 막았고, 무보수 휴게 시간도 간섭하고 청소를 시키려고도 했다.

조공 노조의 간부들은 민주적 원칙에 따라 노조를 운영하는 것이 위험을 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이 스스로 권위를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민주적으로 행동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이런 해석을 내놨다.

"그런 자세를 통해서 신분의 평등과 부의 공평한 분배에 대한 그들의 민주적 열망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분의 평등과 부의 공평한 분배는 한국 사회에서 그들이 제대로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조건이었다." -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226쪽

또한 노조는 공정성과 연대성을 강조했다. 당시 조공은 고용이 보장되고 좋은 임금과 여러 혜택을 누리는 본공과 회사의 수주가 부족할 때 제일 먼저 해고되는 임시공으로 분할돼 있었다. 임시공은 경영 합리화 방책의 일환으로 도입됐지만, 노동자들의 단결을 약화하기 위해서도 좋은 틀이었다.

조공의 문서를 보면, 60년대 기업의 비용절감 노력이 진행되면서 임시공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63년 본공의 16%에 불과하던 임시공 비율이 67년도에는 본공의 수를 뛰어넘어 153%에 이른다.

그런 상황에서 노조는 임시공을 자신들의 품 안으로 받아들였다. "법은 만민에게 평등한 것으로 법을 위반한 협정은 있을 수 없고 이러한 협정은 당연히 무효가 된다"는 노동청의 해석을 이끌어 낸 노조는 임시공의 가입 자격을 제한하는 단협 조항의 변경을 요구했다. 소속감과 유대감이 절실히 필요했던 임시공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결국, 평등한 공동체를 통해 이상적인 민주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 이는 노동자들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면 더욱 놀랍다. 사실 당시로는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주장이었다. 탐욕에 젖은 정치인과 기업가들이 헤아릴 수 없는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조공 노조는 경제 발전과 노동자 복지라는 두 가지 목표가 양립할 수 있거나 심지어 상호 보완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다. 노조원들은 노동자의 복지를 희생물로 삼아 탐욕스런 이윤 추구를 허용하는 방종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제3의 길로서 인간적인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으며, 그것이 사회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286쪽

그러나 이들의 노력도 결국 국가의 개입에 무너지고 말았다. 회사는 노조의 힘이 점점 커지자 공권력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노조가 경제발전이라는 국가적 사명에 대한 심각한 장애물이나 위협으로 묘사하고, 정부가 그렇게 믿도록 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결국, 1972년 10월, 박정희는 주요 도시에 탱크와 군대를 진입시키고 국회를 해산시켰다. 그와 함께 노동자들의 장밋빛 전망도 와장창 박살이 나고야 말았다.

1960년대 조공 노동운동에서 매우 강조되고 소중히 여겨지던 가치는 '노조의 자주성'과 '내부 민주주의'였다. 그들이 원하고 요구했던 것은 공평한 분배, 민주주의, 노동자의 발언권,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었다. -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북트레일러 갈무리
 1960년대 조공 노동운동에서 매우 강조되고 소중히 여겨지던 가치는 '노조의 자주성'과 '내부 민주주의'였다. 그들이 원하고 요구했던 것은 공평한 분배, 민주주의, 노동자의 발언권,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었다. -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북트레일러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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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유신'

박정희가 자행한 '공포의 정치'는 민주화 과정에 힘을 잃었지만, 박정희가 깔아놓은 '욕망의 정치'는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오리와 기러기가 노닐던 모래땅에 세워진 아파트는 어느새 서울을 대변하는 집단이 됐다. 개발을 독려했던 박정희 덕분에 강남은 지금껏 불패란 수식어가 뒤따라 붙는다. 탄탄한 학군을 바탕으로 그들만의 성을 세워놓고 국가 위에 군림한다. 언젠가 강남에 입성할 수 있다는 달콤한 희망은 산업화의 향수와 결합해 역사를 망각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학자가 집필한 두 권의 책을 통해 진실을 알 수 있다. 정부 광고판이 돼버린 신문이 있었고, 공안사건을 조작해 살인을 저지른 사법부가 있었으며, 군대에서 1년에 1500명이 죽던 시대. 한 사람의 자유를 위해 만인의 자유가 희생된 그 시대에 "직급이 낮은 노동자에게 인상분이 더 많이 돌아가야 한다"던 민주노조가 싹텄음을, 그리고 그 싹은 유신의 주인공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음도.

그리하여 우리는 경제발전이란 허명을 벗고 사리사욕에 찌든 기회주의적 인간을 마주할 수 있다. 이제 산업화를 찬양하려거든 남성경찰들 앞에서 속옷 차림으로 맞선 어린 여공들을, 더 낮은 곳으로 연대의 손길을 내민 노동자들을, 엄혹한 시대에 사법 살인을 당한 영령들의 넋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는 지극한 상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유신>의 저자 한홍구 교수는 글을 마무리하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공개장을 썼다. 5·16과 유신에 대해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말과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희생된 분들'이란 표현을 거론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발 부탁입니다. 치유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상처에 소금을 뿌리지는 말아주십시오.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피해자에게 악플만 달아도 범죄가 되는 세상입니다. 아버지가 지은 죄를 대신 갚으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역사에 대한 범죄만은 저지르지 말아주십시오. (중략) 사과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몇 년 전 방영된 드라마 <여인천하>의 중전마마 대사를 빌려 딱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그 입 다물라!" - <유신> 433~434쪽

역사를 돌아보면 딱 두 부류의 인간이 남는다.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 그러니 그대, 부디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이 되어라. 지금도 역사는 기록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유신>, 한홍구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2014.01, 2만 원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남화숙 지음, 남관숙·남화숙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2013.12, 2만3천 원



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한겨레출판(2014)


태그:#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유신, #한홍구, #남화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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