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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99년부터 국내외 근현대사의 현장에서 묻힌 역사의 진실을 찾고자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중국대륙과 미주, 일본, 러시아 등 국외와 국내 항일의병지를 취재노트와 카메라를 메고 여러 차례 누볐다. 그 역사 현장들은 거의 100년이 지난지라 대부분 그 원형이나 흔적을 찾기가 몹시 어려웠다. 여기에 '나만의 특종'이라는 제목으로 주로 역사 현장 답사와 사진에 얽힌 뒷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다. - 기자의 말

 의향 호남의 뿌리인 광주 포충사
 의향 호남의 뿌리인 광주 포충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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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된다

우리나라가 이웃 나라인 일본에게 침략당한 것은 이미 400여 년 전, 1592년 임진왜란 때였다. 그 이전 우리는 일본을 '왜(倭)' '왜국(倭國)'  '왜구(倭寇)' 등으로 몹시 깔보고 업신여기며, 지난 날 우리 문화를 그들에게 전수해준 우월감에 젖어 살았다. 그런 새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하고,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등 서구에서 입수한 무기(조총)를 도입해 대륙 정벌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당시 우리 조정에서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기미를 감지하고서도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들이 쳐들어온 지 불과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내주고 선조 임금은 의주로 도망가기에 바빴다.

관군이 일본군에게 패해 곧 평양까지 점령당하자, 선조는 자기 혼자 살겠다고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떠남)하려고 했다. 이때 유성룡이 이를 만류했다.

"전하께서 우리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신다면 조선 땅은 우리 것이 안 될 것이며, 후일 백성들을 어찌 보려고 하십니까? 지금 동북의 여러 도가 남아 있고, 머지않아 호남 지방에 충의의 선비들이 봉기할 것인데, 어찌 경솔히 명나라에 가십니까?"

신하의 충간에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려던 몽진 행렬을 멈췄지만, 전란에 죽어가는 백성들의 안위보다 제 목숨 구걸에 급급한 못난 임금이었다.

역사는 영원히 반복한다고 했다. 임진왜란 이후 꼭 358년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인민군에게 내주게 됐다. 그러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그날 새벽 열차를 타고 남으로 도망친 뒤 거짓 방송을 했다.

"우리 국군은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선조 임금은 말을 타고 도망친 데에 견주어, 시대가 바뀌어 이승만 대통령은 기차를 타고 도망한 점이 다를 뿐이다. 임진왜란 때나 한국전쟁 때나 도성(서울)에 남아 적 치하 죽을 고생은 한 사람은 대부분 일반 백성이었다.

의로운 선비

임진왜란은 당시 조선 인구 500여만 명 가운데 약 300여만 명이 희생된 우리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이었다. 왜군의 총칼에, 역질에, 난리 중 먹을 게 없어 굶어죽었기 때문에 희생자가 많았다. 이때 임금을 비롯한 지도층들은 도망 다니기 바빴고, 왜군을 패주케 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수군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義兵) 승병(僧兵) 때문이었다.

 임란 구국 의병장 제봉 고경명 선생
 임란 구국 의병장 제봉 고경명 선생
ⓒ 녹천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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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고경명(高敬命)은 임진(1592년)년 4월에 왜적이 침략해 오자 그해 5월에 고향 담양에서 창의(倡義, 국난에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킴)했다.

"경명은 보잘것없는 선비다. 다만 충성만을 생각하고 힘이 없음을 생각지 않는다. 국가존망의 위기에 어찌 감히 제 몸을 아낄 수 있으랴. 의(義)로써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

의병장 고경명은 호남 의병 7000여 군사를 이끌고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그해 7월에 전사했다.

선생의 둘째 아들 학봉(鶴峰) 인후(因厚)도 전사했으며, 맏아들 준봉(準峰) 종후(從厚) 역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왜적을 토벌하여 나라를 구하려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고경명의 충의에 감동한 선조는 뒤늦게 다음의 교지를 내렸다.

"오직 내가 임금답지 못해서 백성들을 보존하여 살도록 도모하지 못하고, 한편으로 인화(人和)를 잃고 한편으로는 적을 막는 일을 하지 못해서 나라를 잃고 서쪽으로 옮겨서 의주에 몰려와 있은 지 이미 한 달이 지났다. 종묘와 사직은 빈 터만 남았고, 신하와 백성들은 어육이 되었으니 아득한 저 하늘이여! 이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 그 죄는 오로지 내게 있거니 깊이 부끄러울 뿐이다. … 고경명, 김천일(金千鎰)이 의병 수천을 규합하여 절도사 최원(崔遠)의 병마 2만과 함께 수원에 나와 주둔했다고 보고하니 나처럼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어찌 이와 같이 죽을힘을 내는 사람이 얻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제봉전서<霽峰全書> 하권 19~20쪽 '전라도 사민에게 내린 교서' 중에서)

의병장의 후손

 한말 구국 의병장 녹천 고광순 선생
 한말 구국 의병장 녹천 고광순 선생
ⓒ 녹천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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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뒤에도 일본은 조선 정벌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이 땅에 침략의 마수를 뻗었다.

이에 학봉 고인후의 12대손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은 60세 노구임에도 오로지 선조의 맥을 잇는 충의의 신념으로 담양 창평에서 창의의 길발을 휘날렸다. 그는 태극도안에 '불원복(不遠復, 머잖아 광복이 된다)'라는 세 글자를 단정하게 써넣은 군기를 사용하며 10여 년간 왜군과 혈전을 벌였다.

1907년 9월 11일(양 10월 17일)에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에서 10여 의병과 함께 왜군의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구례에 살던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당신 고을에서 전사한 고광순의 소식을 듣고 연곡사를 찾아 '哭義兵將鹿川高公戰死(곡의병장녹천고공전사, 의병장 녹천을 애도하노라)'라는 조시를 바쳤다.

국화 옆 새 무덤

千峯燕谷鬱蒼蒼(천봉연곡울창창) 수많은 연곡의 봉우리 울창한 속에서
小劫虫沙也國殤(소겁충사야국상)  이름 없는 백성들이 나라 위해 싸우다 죽어 갔구나.
戰馬散從禾壟臥(전마산종화농와) 전마는 흩어져 논두렁 따라 널려 있고
神鳥齊下樹陰翔(신조제하수음상) 까마귀들이 떼를 지어 내려앉을 듯 돌고 있구나
我曹文字終安用(아조문자종안용) 나 같은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거나
名祖家聲不可當(명조가성불가당) 이름난 가문의 명성을 따를 길 없나니
獨向西風彈熱淚(독향서풍탄열루) 가을바람 속에 홀로 뜨거운 눈물 뿌리는데
新墳突兀菊花傍(신분돌올국화방) 국화 옆에 새 무덤 하나 우뚝 솟아났구나

 매천 황현 선생
 매천 황현 선생
ⓒ 매천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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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은 자신의 문약(文弱)을 늘 부끄러워하다가 삼년 뒤 경술국치를 당하자 더 이상 '글만 아는 선비'가 될 수만은 없어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로 순절했다.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와 짐승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이 나라가 망하고 말았구나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천고 옛일 돌아보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글 아는 사람 구실 어렵구나
- <절명시> 네 수 중 제3수

나는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담양의 포의사(褒義祠), 구례의 연곡사와 매천사(梅泉祠)를 두루 답사하면서 호남은 왜 의향(義鄕)인 줄 그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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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