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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종로구청앞에서 시위를 펼치고 있는 이승철씨
 지난해 12월 종로구청앞에서 시위를 펼치고 있는 이승철씨
ⓒ 추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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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년간 서울 종로구청을 방문하거나 지나는 길이였다면 구청 옆 화단 앞에 설치되어 있는 천막을 보셨을 것 같습니다. 세월 속에서 낡디 낡은 천막을 뒤덮은 것은 재개발 강제철거를 규탄하면서 종로구청장에게 책임을 묻는 날선 구호를 적어 놓은 펼침막이였습니다.

종로구청 앞에 1평짜리 천막이 쳐진 것은 2011년 초입니다. 천막의 주인은 이승철(58세)씨.

그는 공평 재개발 지구(1, 2, 4지구)에 가게를 연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한 푼 받지 못하고 쫓겨나면서 노숙투쟁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지난 2011년 이후 종로구청이나 그 앞을 지나가다 보면 화단 옆에 설치되어 있는 살벌한 풍경의 농성현장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익숙한 모습은 13일 오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날 찾은 종로구청 앞은 조금은 낯선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보름여 전인 1월 29일 이승철씨와 시행사 측이 극적으로 합의를 이루면서 자발적으로 농성물품을 치웠기 때문입니다.

길바닥 위에 스티로폼 한 장, 그 위에 추위 막는 건 '비닐'

이승철씨와의 인연은 지난해 4월경 인터뷰를 한 후로 계속 이어졌습니다.(관련기사) 그 이후 관심을 갖고 근처를 지나는 길에는 방문도 하면서 그의 험난했던 투쟁과정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털어놓는 노숙투쟁의 날들은 일반인의 상상으로는 감히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형극의 세월이었습니다.

이승철씨는 2011년 종로구청 앞에서 노숙투쟁을 시작한 지 수개월 후에는 더위와 추위를 어느 정도나마 막아낼 수 있는 천막을 설치했다고 했습니다. 실질적으로 2008년부터 시작된 장기 투쟁을 위한 보급기지였던 셈입니다.

전국철거민협의회(전철협)에 가입하면서 2009년 1월 용산철거 참사 현장에도 동조 투쟁을 하면서 고통을 함께하는 등 2008년 이후 주요 철거 관련 시위현장에는 그의 모습이 빠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종로구청 화단 옆에 세워져 있던 이승철씨의 천막
 종로구청 화단 옆에 세워져 있던 이승철씨의 천막
ⓒ 추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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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과정에서 신나를 온몸에 뿌린 후 자살 소동도 벌였다고 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2010년 5월 30일경 자신이 세들어 있던 상가에 대한 명도절차가 진행되면서 철거민 십수 명과 함께 철거용역 400명과 맞서다 중과부적으로 끌려나오면서 무수한 구타를 체험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이승철씨의 투쟁이 지난하게 이어졌지만 시행사 측과의 협상은 계속해서 수평선을 그려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와 투쟁에 함께했던 동지들이 하나둘씩 떨어져나가면서 지난해 9월경부터는 혼자 남아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야만 했습니다. 
 
이승철씨의 투쟁이 끝없이 이어지자 종로구청은 지난해 9월, 민원인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이유를 들며 법원에 천막과 시위용품을 철거할 수 있게 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접수했습니다.

또 이 같은 신청이 11월경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지면서 이씨의 투쟁환경은 초기의 모습과 같이 다시 한번 열악해졌습니다. 구청 측이 12월 11일 천막을 철거한 후 스티로폼 두 장을 이어 붙인 후 이불 위에 비닐을 덮은 채 거주하면서 24시간 투쟁을 이어가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추위에 고스란히 노출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이승철씨는 지난해 12월 17일 부터는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2013년 12월 16일 종로구청앞 집회
 2013년 12월 16일 종로구청앞 집회
ⓒ 추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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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보게 달라진 이승철씨 "건강은 잃었지만 신념은 지켰다"

지난 2월 13일(목) 종로구청 민원실에서 만난 이승철씨의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불과 십수 일 전 길바닥 위에서 단식투쟁을 하면서 제대로 씻지도 못해 덥수룩한 수염으로 뒤덮여 무척이나 초췌했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의 옆에 서 있는 부인의 얼굴에서도 더 이상 어두운 그늘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2007년부터 단 한 푼의 수입도 없이 극한투쟁에 내몰리면서 집안 살림밖에 모르던 그도 재작년부터는 현장에 나와 남편 뒷바라지를 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살림밖에 모르며 순하던 그의 부인은 1월 중순경에는 구청 측에서 스티로폼과 이불 등을 치우려 하자 목에 커터 칼을 대놓고 자해 소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십수 일 전까지만 해도 그들 부부는 절박한 상황에 내몰렸다는 것이지요.  

이날 만난 그의 부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시행사 측과 합의가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아침마다 집을 나서 종로구청 앞 시위현장으로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서 그렇다"고 표정이 밝아진 까닭을 밝혔습니다.

이승철씨 부부가 그동안 밀린 주차위반 범칙금을 구청에 납부한 후 향한 곳은 종로구청 바로 옆에 위치한 청진파출소였습니다. 이승철씨가 청진파출소를 찾은 것은 지난 4년 투쟁과정에서 받은 고마움 때문이라면서, 감사했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이승철씨는 수년간 노숙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화장실 이용은 물론이고 식수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을 드나들어야 했다고 합니다. 또 겨울에는 뜨거운 물을 가져오기 위해 이곳 파출소의 정수기를 수시로 이용하기도 했지만 파출소 직원들은 단 한번도 싫은 소리 한적이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그가 가장 고마워하고 있는 것은 홀로 노숙투쟁을 하는 현장을 이곳 파출소 직원들이 수시로 찾아와 안위를 챙겨줬다는 부분이었습니다. 날씨가 영하로 곤두박질 칠 때면 어김없이 순찰을 도는 직원이 수시로 찾아와 그의 안위를 물었고 또 어떤 직원은 핫팩을 건네주기까지 하면서 건강을 염려해줬다는 겁니다.

이씨를 맞는 파출소 분위기가 재미있었습니다. 불과 며칠 만에 몰라보게 변한 이승철씨의 모습에 경찰관들이 더 놀라워하고 진심으로 반기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파출소에 대기 중이던 이한성 경위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이곳 청진파출소에서 근무한 게 1년 반 정도 된다고 했습니다. 이승철씨와 인연을 1년 반 동안 이어왔다는 것이지요.

이승철씨는 이 경위가 내놓은 유자차를 같이 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느꼈던 고마움을 거듭해서 표현했습니다. 이승철씨의 이 같은 감사의 말에 이한성 경위는 "그렇게 느껴주셨다면 저희가 오히려 고맙다"며 화답했습니다. 

이승철씨를 반갑게 맞이한 이한성 경위
 이승철씨를 반갑게 맞이한 이한성 경위
ⓒ 추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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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위는 이어 "바닥에서 주무시니까 근무자들이 날씨 추울 때는 순찰 때마다 안위를 살폈다"면서, "경찰의 입장을 떠나서 같은 시민 개인의 입장에서 안타까워하며 더 이상 불행으로 이어지지 않게끔 하는 마음이었다"고 심경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경찰 입장에서는 편치 않았을 것 같은 노숙 투쟁 중인 철거민. 그런 민원인을 따뜻한 마음으로 지켜봐준 것이 더 이상의 불행을 막고 시행사 측과의 적극적인 합의로 이어져 이승철씨가 성공적으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데 큰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합니다.

2007년경부터 투쟁을 시작한 후 자신의 몸에 신나를 끼얹기도 하는 등 극한적인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승철씨의 8년. 그 시간을 들여다보면서, 우리 사회가 좀 더 따뜻하고 살 만한 세상이 되기 위해서 모든 공무원들이 종로경찰서 청진파출소 직원들과 같이 따뜻한 시선으로 민원인을 대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종로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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