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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의 작가 조지오웰은 1936년 영국 북부 탄광지대에서 탄광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삶을 기록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 그 결과물이다. 이 책에서 석탄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가 얼마나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위건 부두로 가는 길)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가 얼마나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위건 부두로 가는 길)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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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래 누가 석탄을 캐고 있는 곳은, 그런 곳이 있는 줄 들어본 적 없이도 잘만 살아가는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다.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곳 얘기는 안 듣는 게 좋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머지 반쪽이다. 아마도 우리가 하는 모든 것, 말하자면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부터 대서양을 건너는 것까지, 빵을 굽는 것부터 소설을 쓰는 것까지, 모든 게 직간접적으로 석탄을 쓰는 것과 상관이 있다.

오웰이 머물렀던 탄광지역 '위건'보다는 프리미어리그 축구팀 '위건'이 더 귀에 익어 친숙해진 우리들에게 선뜻 다가오는 글은 아니다. 먼 나라 영국의 이야기이고, 우리들의 현실 또한 연탄을 애용하던 시대는 갔다. 1980년대 중반부터 불어 닥친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석유나 가스가 석탄을 대신하게 되었고, 탄광과 탄광 노동자는 먼지처럼 작아졌기 때문이다. 

석탄과 식민지를 연료로 이룬 근대화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이 가능해져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 근대사회가 전개되었다. 석탄은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핵심 동력이었다. 석탄을 태워 발생시킨 증기로 증기기관을 움직였고, 철광석을 녹여 대량의 철을 생산하기 위한 고온의 용광로는 석탄이 있어 가능했다.

산업혁명 이후 전개된 근대사회의 물질적 풍요와 번영은 석탄을 연료로 했던 굴뚝산업이 바탕이 되었다. 그래서 산업화와 근대화를 추구했던 국가들은 너나없이 석탄 확보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의 화려함 뒤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대량생산의 도구가 되어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던 노동자들, 제국주의 국가의 상품 시장과 원료 공급지가 되어 수탈당했던 식민지 주민들의 희생이 그것이다. 

오웰이 광산 노동자들을 따라 온몸을 납작 엎드려 막장까지 기어들어가고 그들이 사는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썼던 1930년대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탄광 개발에 열을 올렸다. 최대 탄광으로 알려진 아오지 탄광이 개발되었고, 강원 남부 지역의 영월탄광, 삼척, 도계, 장성탄광이 개발되었다. 대공황 이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제국주의 침략 전쟁 수행을 위해 석탄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개발된 탄광 막장에서 탄을 캐던 노동자들은 동원된 조선인과 중국인들이었다.

성장 신화에서 밀려난 그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 아래 조국 근대화와 경제 성장에 올인 했던 시절, 석탄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 시책으로 국내 석탄 증산에 주력했다. 탄광 노동자를 구하는 구인 광고들이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의 전봇대에 나붙었고, 영월, 정선, 태백 등 강원남부 지역의 탄광촌 인구가 급증했다.

군대식 조회를 서고 있는 탄광 노동자들(고한 삼탄아트마인)
 군대식 조회를 서고 있는 탄광 노동자들(고한 삼탄아트마인)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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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이 조국 근대화와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된 것처럼, 지하 막장에서 갖가지 위험에 노출된 채 탄을 캤던 탄광 노동자들 또한 '한강의 기적'을 이룬 주역들이었다. 하지만 탄광노동자들의 중요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석탄 증산을 통한 이윤 추구'에 밀려 그들을 위한 기본적인 시설조차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다.

밤낮으로 물 때문에 싸웠어. 물도 초롱을 가지고 순서를 기다리다 어느 얌체 같은 년이 바쁘다고 남 물동이 뒤에다 살짝 갖다 놓는 거야. 그때는 물초롱이 누구 건지 다 알고 있는데. 그러면 자박생이 꺼들고 싸우는 거야. 그 물 한 초롱 받을라고. 뭐가 제일 원이냐면 강물 훨훨 내려가고 물 맑은 데 가서 물 실컷 쓰는 게 원이였어 …(중략)… 회사에 목욕탕이 없어서 신랑들이 집에 돌아오면 새까매 가지고 아들이 아빠를 몰라. 다 똑같거든. 새카매가지고. 80년에 그일 겪고 나서 목욕탕 지어지고 나니까 그나마 조금 나아졌어. (사북청년회의소, <탄광촌의 삶과 애환>)

탄광 사고(사북 동원탄좌 석탄유물전시관)
 탄광 사고(사북 동원탄좌 석탄유물전시관)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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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막장에서 탄을 캐다보면 온몸이 검은 석탄가루로 범벅이 된다. 그래서 탄광 노동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목욕과 세탁 시설이었다. 하지만 석유파동을 극복하기 위해 석탄 증산에 주력하던 1970년대까지 사북 동원탄좌에는 탄광 노동자들을 위한 목욕시설 조차 없었다. 동원탄좌에서 광산노동자들을 위한 대규모 목욕 시설을 마련한 것은 1980년 사북항쟁을 겪고 난 후였다.

'한강의 기적'이란 성장 신화에서 탄광 노동자들은 외진 구석자리로 밀려났다. 석탄의 역사를 살펴본다는 것은 그들이 원래 있어야할 자리가 어디인지 찾아보고자 함이다.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이후 그들은 먼지처럼 작아졌지만, 지하 막장에서 하나 뿐인 목숨 내맡기고 석탄을 채굴하며 흘렸던 그들의 검은 땀방울의 의미를 되새겨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나머지 반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태그:#석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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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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