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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 SBS <힐링캠프> 시청자 특집에 출연한 강신주 철학박사.
 3일 SBS <힐링캠프> 시청자 특집에 출연한 강신주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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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가 월요일 SBS의 <힐링캠프>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강신주의 언행이 영 불편한 사람들도 있고, 그를 두둔하는 사람들도 있다. 강신주는 요즘 잘 팔리는 사람이다. 많이 소비되니 소비자 고발도 그만큼 많은 건 당연할 테다. 헌데 강신주에 대한 사람들의 짜증은, 그에 대한 대량의 선호에 묻힐 정도를 넘어선 모양새다.

사람들은 왜 강신주에 떨떠름해 할까? 물론 강신주 본인이라면 지금까지 주장해온 대로 자신이 사람들의 진짜 문제점, 아픈 곳을 (바로 그 사람들의 인생을 위해) 과감히 찌르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생각이 다르다.

철학자와 비철학자

강신주를 불편해 하는 사람들은, 그가 스스로를 철학자로 소개한다는 점을 우스워한다. 일단 사회의 보편적 기준에서 보면 강신주는 어디까지나 철학을 전공한 강연자, 저술가이지 철학자는 아니다.

물론 강신주가 자칭 철학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나 역시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무엇보다 먼저 미모로 평가받고 싶은 사내다. 평생 단 하나의 명함만 써야 한다면 나는 서구화되고 획일화된 이 시대의 억압적 미적 취향에 맞서 나의 명함에 '미남(美男)' 두 글자를 분연히 새길 것이다. 진심이다.

재밌는 건 강신주가 철학자라는 자칭을 자신과 대중을 구분하는 용도로 쓴다는 점이다. 강신주는 "철학자들이 대중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한다. 또한 자신은 거리낌 없이 "내려온다"고 말한다.

대중은 공장에서 양산된 기성품이 아니다. 대중이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상당히 기만적이다. 기본적으로 전혀 다른 개인들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용어를 쓰는 이유는 편의성을 위해서다. 강신주 자신은 대중의 일원이 아니란 말인가?

강신주는 자신과 대중을 분리하는데, 나는 근거 없는 심리학 따위는 펼치고 싶지 않으므로 이것을 강신주의 자의식이라느니, 그의 오만함의 증거라느니 하는 비생산적인 말은 하지 않겠다. '텔레파시 품성론'을 제쳐두더라도 한 가지 맥락은 분명하게 남는다. 이 분리법은 강신주에게 판매 전략으로 기능한다.

힐러와 킬러

강신주가 <힐링캠프>에 나와서 고운 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상이한 영업 전략의 충돌이었으니 삿대질은 예정된 것이었다. 다만 그게 '철학자' 강신주가 철학자가 못 되는 연예인들과 방청객들을 혼내는 결과로 나온 것뿐이다.

강신주는 '힐링'이라는 단어와 '자기계발서'를 무용하다고 한다. 약효가 잠시만 나타나는 진통제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책은 왜 자기계발서가 아니란 말인가? 성공과 찬란한 미래를 제시하는 텍스트만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독자(청중) 자신을 위해' 특정한 태도와 행동을 주문한다면, 그게 자기계발서이며, 힐링이며, 멘토링이다.

마침 강신주가 자칭으로나마 '철학자'이니 철학 이야기를 해 보자. '유쾌'를 유발하는 것이 '미(美)'라면 어찌하여 우리는 비극 작품을 예술로 소비하는가? 왜 우리는 공포물, 고어물과 같은 '불쾌'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가? 철학은 미란 무엇인가를 고찰함과 동시에 추(醜)가 미로 전환되는 과정도 탐구한다. 예술의 영역에서 불쾌도 결국 쾌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강신주의 독설도 힐링의 한 종류, 즉 신제품 힐링이다.

흔해 빠진 힐링이나 강신주 식의 '킬링'이나,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의 소비재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 효능도 다를 리 없다. 강신주는 <힐링캠프>의 그 '힐링'이라는 단어가 너무 싫다고 한다. 물론이다. 현대기아차 영업사원은 외제차를 칭찬하지 않는다.

힐러의 영업, 킬러의 영업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듯 불행한 사회는 약을 만든다. 위로, 훈계, 비법 전수, 질책 등 다양한 약제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시장이 형성된다. <힐링캠프>는 해당 시장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다. <힐링캠프>는 글이 아니라 영상으로 판매된는 약일 뿐, 처방전의 공식 자체는 오래됐다.

 3일 방송된 SBS <힐링캠프> 시청자 특집에서 강신주 박사가 강의를 하고 있다.
 3일 방송된 SBS <힐링캠프> 시청자 특집에서 강신주 박사가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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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모두 힘들다. 나(출연자) 역시 힘들었다. 그러나 고통을 견디고 노력한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당신들(시청자)은 나의 인생을 참고하라. 내가 응원(힐링)해 주겠다."

그런데 이제 힐링으로는 마취가 안 되는 시대가 된 모양이다. 여기서 잠깐 '약장수'들의 진화과정을 복기해 보자. 나는 지금 시장의 논리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우리 사회의 경제적 문제를 끌어들여 보겠다.

① 경제활황기 : '넌 할 수 있다'고 나팔 부는 응원가. 긍정, 용기, 꿈 등의 용어가 어지럽게 난무한다. 외국서적으로는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 대표적. 국내 서적으로는 <배짱으로 삽시다>가 있다.

② IMF 이후 경직기 : '88만 원 세대'로 대변되는 20~30대 젊은이들의 좌절이 고착화되면서 '힐링'이 난무하기 시작. 신비주의로 빠지는 외전 격의 형태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시크릿>이다.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니까 정신집중으로 BMW 오너드라이버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엔 능력으로는 어차피 안 되며, 사실 능력이란 것의 실체도 없다는 사고가 전제되어 있다.

③ 현재 : 누가 쓰다듬어 준다고 취업이 성사되거나 대출 원금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힐링으로도 해결되지 않으니 채찍질하는 상품이 출현. 제목만 보자면 "청춘은 아픈 거고, 어른이 되려면 천 번은 흔들려야 하는 법"이라 하는, 힐링과 '킬링'의 모호한 징검다리 격인 김난도를 거쳐 2014년에는 강신주가 유행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힐링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채찍질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상기의 거칠고 자의적인 구분법에 독자 여러분이 동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자기계발 상품이 심하게 유행을 타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사람은 대체로, 노력해도 불행할 때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찾으려 하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강신주는 소비자의 '니즈(needs)'를 잘 캐치했다고 볼 수 있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즐겨보라는 건 선택인데, 피할 수 없는 시점에서 이미 선택이 아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이 가중되면 메조키스트가 되는 게 정신건강엔 더 좋을 수도 있겠다. 그런 면에서 강신주의 자칭 철학자 타이틀은 훈련소 조교가 쓰는 빨간 모자와 다를 바 없다. 불행한 사람을 앉혀놓고 자기가 불행한 건 자기 잘못이라는 자아비판을 짜내는 그의 화술엔 학자다운 지성이나 사려가 느껴지지 않는다.

제비와 약장수

'픽업 아티스트'가 그냥 제비이듯, 멘토라는 말 대신 쉽고 편한 우리말을 쓰는 건 어떨까. 서점가에는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멘토'가 즐비하다. 대중을 대상으로 삼음은, 실은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이들을 '약장수'라 칭함에 무리는 없으리라.

약장수가 파는 약이 다 그렇듯 대중을 향한 소위 '멘토링'이 약효를 발휘하는 경우는 없다. 자기계발서의 처방전은 대개 두 가지 경우로 무의미하다. 첫째, 너무나 당연해서. 둘째, 너무나 황당해서.

 28일 오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철학자 강신주 박사의 '김수영 다시읽기'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
 강신주 박사. (자료사진)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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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는 '당신 자신의 문제에 직면하라' '당신 문제의 원인은 당신 자신이다' '당신의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를 불필요하게 길고 가학적인 방법으로 도출시킨다. 따라서 강신주는 주로 아이템보다는 스타일을 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끔은 문제의 해결책도 제시한다. <시크릿>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해 상상훈련을 하라고 한다. 강신주는 자본주의의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 냉장고를 버리라고 한다.

그 역시 대부분의 약장수들처럼 제 나름의 진정성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의 심리상태가 본인의 객관적 상태를 증명하진 않는다.

강신주가 공정한 사람이라면 자신도 기꺼이 독설의 대상이 될 준비가 되어 있으리라. 강신주는 한 연예인에게 그가 먹는 밥은 밥이 아니라 사료라고 했다. 결국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려는 신체를 위한 식단이라는 이유에서다. 그 논법을 본인에게 그대로 적용하면, 강신주의 말과 글은 결국 본인이라는 약을 파는 전단지가 아닌가?

'훈수'로 삶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서론도 본론도 길었다. 강신주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그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은 이유에 대한 추론이 기사의 주제였다. 많은 약장수들이 자신의 약은 다른 약들과 다르고, 이 약만이 진짜라고 한다. 강신주도 마찬가지다.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다르지 않음의 동어반복적 허망함이 그에 대한 피로감의 실체일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불행이 있다. 내게도 해결하기 힘든 불행이 있다. 그중 태반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떠나 있다. 그게 삶의 모습이다.

애초에 인간의 불행이 그깟 마음가짐으로 쉽게 해결될 문제이던가? 만약 해결책, 아니 해결책이 아니라 적어도 진짜 진통제가 있다면 그건 강신주나 김난도 류가 내놓는 '훈수'가 아니라 외려 예술에 있다.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예술로 소비했고, 우리 조상들은 삶의 아픔을 관조하는 법을 알았다.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기 직전 운치 넘치는 자조시를 읊었다. 이방원은 정적의 마지막 작품을 역사에 기록해 주는 품위가 있었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투표를 하면 된다. 정치를 하고 남는 시간에 우리는 자신을 위해 어떡해야 할까? 나도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힐러'이건 '킬러'이건 멘토이건, 우리의 문제를 품는 건 그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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