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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7 출산 예정일을 한 달 앞두고 내 생일이 있었다. '엄마'가 되기 전, '출산'이라는 거사가 있기 전에, 생일을 기다리는 기분은 남달랐다.

내 생일 며칠 전. 한여름의 독일에는 만끽해야 할 푸르름이 가득했다. 아이는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었고, 이제 곧 막달이라서 막바지로 커가는 게 느껴졌다. 밤마다 발길질하며 자신의 존재를 온몸으로 전달하는 아이. "도대체 어떤 녀석일까" 궁금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은 여느 부모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출산을 앞두고 아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리스트로 만들어 차근차근 구매해나가고 있었다. 아기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아기침대는 남편이 어디서 가져온 중고물건 정보지를 통해 구매했다. 비록 중고지만, 물건을 쓰던 아이들이 곱게 사용해서 흠도 얼마 없는 것이어서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마른 수건으로 아기침대를 닦으며 곧 세상에 올 아이를 생각했다.

"우리 침대에 아기 이불을 깔고 자자"

이런 내 모습을 본 남편은 이렇게 덧붙였다.

"아무래도 아이가 이 침대를 낯설게 느끼게 느끼지 않도록 해야겠어. 엄마 아빠 냄새가 밴 이부자리를 만들어 줘야지. 오늘부터는 여기 우리 침대에 아기 이불을 깔고 자자."

처음엔 아기에게 깨끗한 이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엄마 아빠의 체취를 아기가 느끼면 한결 편안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나 사이에 아기의 작은 이불을 놓아두었다.

내 생일 며칠 전. 한여름의 독일에는 만끽해야 할 푸르름이 가득했다. 아이는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었고, 이제 곧 막달이라서 막바지로 커가는 게 느껴졌다.
 내 생일 며칠 전. 한여름의 독일에는 만끽해야 할 푸르름이 가득했다. 아이는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었고, 이제 곧 막달이라서 막바지로 커가는 게 느껴졌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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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4 독일인 남편은 남편 고향으로 와서 친구가 없는 나를 위해 주변 친구를 모아 작은 생일파티를 열어주었다. 나는 친정 생각도 나고, 임신 후 격변하는 신체의 변화와 감정의 변화로 하루에도 열두 번씩 기분이 널뛰기했기 때문에 남편의 그런 작은 배려와 마음 씀씀이가 무엇보다 고마웠다. 덕분에 출산을 앞둔 불안을 조금이나마 잠재울 수 있었다.

마침, 내 생일 이튿날은 가까운 친구, 마릔의 생일이기도 해서 나와 그 친구의 생일을 기념할 겸 근교로 캠핑을 나서기로 했다. 예정일은 한 달이나 남았고, 이 화창한 여름날을 그냥 보내기가 아쉬운 우리들은 작은 소풍을 위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친구네가 또 가까운 이웃을 불러오는 바람에, 소박하게 생각한 캠핑은 총 여덟 명으로 늘어나서 제법 큰 자리가 되었다.

캠핑을 가는 날 아침. 나는 친구, 마릔이 통화를 하는 사이 주방에서 그녀의 취향으로 꾸며진 살림을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 타일이 깔린 주방 바닥에 유리잔을 놓쳤다. 그 바람에 와장창 유리가 사방에 튀고 난리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날카롭게 깨진 유리는 날이 서 있어서 나는 불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나는 아침부터 유리를 깨뜨리는 일을 예사로 넘기려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우리는 신바람나게 차를 몰아 캠핑장에 다다랐고,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아침에 유리잔을 깼기 때문에 그냥 집에 있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밖으로 나가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마음을 추스르려고 노력했다. 아주 잠깐, 이유 모를 불안감에 울창하게 자란 나무가 설마 우리 텐트를 덮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키가 큰 나무는 단단한 뿌리를 흙 속에 파묻고 있어서 의심을 접었다.

생일을 맞은 마릔과 나에게 행운을 비는 말들이 오가고, 곧 태어날 아기에 대한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사방이 초원과 울창한 나무들, 그리고 완만하게 숲을 끼고 도는 호숫가로 둘러싸인 그곳은 조금 과장을 보태면 아무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은 작은 유토피아였다. 나는 내 생일을 즈음에서 이런 멋지고 낭만적인 곳에서 남편과 함께 있다는 것에 감격했고 감사했다.

모기조차 없는 그곳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저녁을 보내고 밤이 되어 각자의 텐트로 흩어진 우리들. 나는 언제나처럼 야밤의 소변을 해결하기 위해 주섬주섬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임신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을 가야 하는 것은 예비엄마의 고충이었다.

깨진 유리잔, 불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미 배가 살살 아프고 평소와 다른 통증이 시작되긴 했지만, 몸이 피곤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나는 익숙한 배설욕을 느끼며 묵직한 배를 안고 텐트에서 멀어졌다. 이미 사방은 어둠으로 가득해서 달빛이 비추는 것만 알아볼 수 있었다.

캠핑장에 도착해서 본 키 큰 나무는 달빛 속에서도 빛나지 않은 채 어둠을 껴안고 있는 듯했다. 어둠 속에 몸을 맡기고, 달빛을 따라 오솔길 끝까지 간 나는 거기에서 소변을 보기 위해 자리에 앉았으나 자리에 앉는 것과 동시에 잔디밭에 쓰러졌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세상에서 맛본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고통에서 단연 최고였다.

내 머릿속에서는 '아직 예정일이 아닌데'라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불청객의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정신을 수습하고 남편을 목청껏 불렀다.

"마티스~!"

고통에 질린 내 비명소리는 호숫가에 울려 퍼져 메아리를 만들었다. 그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 속에서도 울려 퍼졌다.

'나는 어떻게 되나? 내 아기는 건강한 건가? 설마 이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머릿 속에 스치는 공포와 뱃속을 휘감는 고통을 참고 나는 다시 한 번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나의 애절한 소리에 스스로 포박된 기분이었다.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몇 초 후 다급하게 달려오는 남편의 발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이제야 살았구나, 잠시 안도했다. 나와 아기를 사랑하는 애절한 남편의 심장 소리가 그의 발끝에서 나의 몸 속으로 전달되었다(이런 남편의 발소리를 듣고서 남편 애정의 척도를 가늠했다는 건 세월이 지난 후 몇몇 친구에게만 고백했다).

애절하고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나의 생사를 확인한 남편은 자기가 괜찮다며, 정신을 잃지 말고 잠깐만, 아주 잠깐만 기다리라고 내 손을 한 번 꼭 잡아주고는 텐트가 있는 곳으로 다시 쏜살같이 달려갔다. 나는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깊은 호흡은 내뱉고 들이마셨다. 순간순간 아픔이 사라진 것 같기도 했지만 고통은 날카롭게 날이 서서 나를 괴롭혔다. 숨조차 쉬기 어려운 고통은 내 뱃속 어딘가를 아프게 할퀴는 것 같았다.

남편과 함께 뛰어온 친구들은 어둠 속에서 웅성거렸다. 다들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널브러진 내 모습에 놀라 있었다. 그들은 들것이 없었으므로 궁여지책으로 널찍한 이부자리를 가져왔다. 이불 위에 누운 나는 그 친구들이 전혀 고맙지 않았다. 균형이 전혀 맞지 않은 이불 위에서 나는 오히려 멀미를 느끼며 고통에 고통을 더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전혀 겪어보지 못한 친구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는 이리저리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도중에 내려서 걸어가는 게 더 낫겠다 싶을 정도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누워 있는 게 다였다. 어쨌든 대학병원 응급실로 간 나는 초음파 검사를 했다. 하지만 헤아릴 수 없던 고통은 병원에 도달할 무렵 이미 사라져 있었다. 초음파로 뭔가를 찾아내려던 의사는 원인을 알 수 없다며 야외활동을 자제하고 집에서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나의 갑작스런 진통으로 혼비백산한 가족은 병문안을 왔고 나는 누운 채로 가족과 친구를 만나야 했다.

D-day 그 난리를 겪고 나는 의사의 말대로 외출을 삼가고 침대를 지켰다. 그 고통을 한 번 맛보았기 때문에 최대한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걸음걸이도 조심했다. 한 이틀간은 아무 일도 없이 넘겼으나 셋째 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캠핑장에서 느꼈던 것의 두 배 이상 되는 고통이 다시 엄습한 것이다.

남편은 침착하게 산파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임신 후 가정분만과 수중분만을 고려했기 때문에 독일의 한 산파를 알고 지냈다. 산파 언니는 눈썹을 휘날리며 우리집에 찾아왔고, 그녀는 나를 살펴보았지만, 양수가 터지지 않았다며 출산의 기미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이 고통은 무엇인가? 지난번보다 극심한 고통 앞에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순간순간 정신을 잃었고, 정말 숨이 가빠서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통증을 감내했다. 고통이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과 친구가 차를 몰아 출산 예정 병원으로 달려갔다. 다시 초음파를 하자, 내 신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대로 두면 아기와 산모에게 위험이 따른다고 했다. 의사의 설명은 남편의 통역으로 나에게 전달되었지만, 의사의 표정만으로 뭔가 심상찮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사는 결론적으로 오늘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문 밖으로 나갔다.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눈물을 쏟았다. 역시나 복잡한 심정이었다. 내가 계획했던 자연분만의 꿈이 날아갔다는 것, 예정일보다 4주 이르게 아기를 조기분만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는 것. 남편은 수술을 해야 위험하지 않게 아기를 출산할 수 있다며 나를 위로했다. 그도 같이 수술실에서 내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다. 남편의 얼굴도 긴장감이 가득해 핏기조차 찾을 수 없었지만, 그를 위로할 만큼 나는 여유롭지 못했다.

수술 과정 생중계... 남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척추마취는 순조로웠다. 척추에 주사를 놓고 몇 분 후에 하반신에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나는 바로 수술실로 옮겨졌고 간호사가 나의 배 위에 작은 커튼막을 걸고 수술도구를 준비하자 의사들이 등장했다. 머리에 위생캡을 쓴 남편의 모습은 낯설었지만 그의 긴장한 눈빛을 보자, 나라도 진정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나는 산파와 연습했던 호흡법으로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남편은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위안의 말을 해주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감은 그가 아닌 누군가도 줄 수 없는 것이므로 그의 말에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당시까지 남편과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고 아직 독일어를 배우지 않은 나로서는 작은 커튼막 저편으로 들리는 의사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남편은 배를 짼다거나 아기가 보인다는 그들의 대화를 곁에서 들어야 했기 때문에 좌불안석이었다. 출산 과정이 그대로 생중계되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중에야 헤아릴 수 있었다. 나는 아무런 고통이 없는 상태로 남편의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기도를 했다. 내가 이렇게 엄마가 되는구나. 우리가 이렇게 부모가 되는구나. 한국의 가족이 보고 싶었다.

잠시 후, 아기가 나왔다는 신호를 받았지만, 아기의 울음소리가 순간적으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숨을 참고 울음소리가 어서 나기를 기다렸다. 몇 초의 순간은 억겁처럼 길고 길게 느껴졌다. 잠시 뒤 드디어 아기가 울었고 두 손을 꼭 잡은 우리는 드디어 숨을 쉴 수 있었다.

아기는 태어나고 성장하고, 나도 새로 태어나고 자란다.
▲ 아기, 라고 쓰고 축복이라고 읽는다. 아기는 태어나고 성장하고, 나도 새로 태어나고 자란다.
ⓒ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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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핏기를 닦은 아기가 우리 곁에 놓여졌다. 작은 손가락과 발가락, 그보다 더 작은 손톱과 발톱, 아직 뜨지 못한 눈. 이 감동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을 했다.

"내 아기, 어느 별에서 온 거니?"

그리고 남편과 나는 같이 눈물을 흘렸다. 감사의 눈물. 기쁨의 눈물이었다. 아무나 붙잡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 이런 것일까?

우리는 그 아이에게 이쁜 이름을 지어주고 잘 기르고 있다. 결국 아기는 엄마, 아빠의 사랑 안에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려는 믿음 안에서 자라는 것 같다. 부모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한편 내가 얼마나 강인한 존재인지 생각할 수 있는 축복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출산, 그 아름다운 이야기> 기사 공모글입니다.



태그:#오마이 출산기 , #재왕절개, #출산의 기쁨 , #독일에서 출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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