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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밤늦은 시간 텔레비전에서 하는 <델마와 루이스>를 본 기억이 난다. '주말의 명화' 류의 프로그램이었을 터다. 초등학생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도 많았지만(나중에 알고 보니 청소년관람불가 영화였다), 델마와 루이스의 대담한 모험담은 퍽 인상적이어서 아직까지도 몇몇 장면이 선명히 떠오른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 포스터
 영화 <델마와 루이스> 포스터

자주 길 위에 서는 삶을 살게 되면서 <델마와 루이스>를 자주 떠올렸다. 그녀들의 모험에 비해 내일로 여행이란 얼마나 평화로운가. 위태로운 순간이래봤자 기차를 놓치는 정도 아닌가. 그렇다고 권총강도질이나 절벽 드라이브에 도전해보고 싶은 건 아니지만 말이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 못지않게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하다. 그 로드 무비의 제목이 <그랜드캐년>이 아니라 <델마와 루이스>였던 건 그 두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일로 여행도 마찬가지다. 여행은 순천, 안동, 부산과 같은 지명으로 남을 수도 있고 비가 왔다거나 추웠다거나 하는 기상으로 기억될 수도 있지만 혼자인 여행이 아니라면 단연 동행의 비중이 크게 남는다.

달무리를 보고 떠난 여행

경우에 따라 혼자 혹은 여럿이 여행한다. 동행은 대부분 친한 친구 한 둘이다. 선호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만 장단점은 명확하다. 여행지 자체에 집중하고 싶으면 혼자 가는 게 백번 낫다. 하지만 여행 과정에 의미를 둔다면 좋은 동행이 좋은 여행을 만든다.

작년 이맘 즈음의 내일로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 한다. 친구 한 명과 함께 여자 둘이서 여행한 적은 많지만 나는 유독 그 여행을 <델마와 루이스>의 이미지로 기억한다.

권태가 지나친 겨울이었다. 떠날 필요가 있었다. K와 나는 그렇게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였다. 직전 학기의 문학 수업에서, K는 늘 맨 앞자리에서 발표하던 학생이었다. 종강파티에서야 겨우 말을 섞어본 우리는 우연히 합류한 을왕리 모꼬지에서 함께 달무리를 보게 되었다.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단초랄까 하는 것은 오직, 나란히 고개를 쳐들고 본 그 해변의 달무리였다.

델마와 루이스의 여수밤바다

나는 내일로 여행을 열 번도 넘게 다녀오고 심지어 내일로 기차여행 가이드북까지 낸 기차여행 초고수. K는 살면서 여행이란 걸 다녀본 일이 별로 없는, 게스트하우스가 뭔지도 모르는 여행 생초보. 조합부터 재미있는 여행이었다.

K는 자기 삶이 회전목마 같다고 했다. 꾸준하게 움직이고는 있지만 같은 자리를 맴도는 정적인 삶. 반면 내 삶은 롤러코스터 같았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게 내달리거나 붕 날아 버리기 일쑤. 규칙성 같은 건 없다. 나는 그 스릴에 지치고 멀미가 났다. 여행이 지겨웠다. 회전목마 같은 삶이 부러웠다.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을 갖고 싶었다.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여자의 여행이었다. 재미있었다. 공부에 대해서나, 사랑에 대해서나, 미래에 대해서나, 우리들의 생각과 경험은 무척 다르고 또 같았다. 선뜻 동행을 결정한 것 자체가 모험인 여행에서 우리는 여행 그 이상을 나눴다.

여행
 여행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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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친구라도 긴 여행 중에는 다툴 일이 생기곤 한다. 하물며 우리는. 어차피 안 친하니까 만약 여행 중 안 맞더라도 친구 잃을 위험 부담은 없는 거 아니냐고 농담했지만 우리는 달무리가 점지해준 인연인지 친구가 됐다. K는 그리고서 곧 학교를 떠났기 때문에, 여행이 아니었으면 친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강릉, 태백, 안동, 순천을 거친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는 여수였다. 가고 싶은 도시를 묻는 질문에 K가 유일하게 말했던 곳이 여수다. 여수밤바다를 보며 버스커버스커의 '여수밤바다'를 듣고 싶댔다.

여수밤바다
 여수밤바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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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가 바란 대로 우리는 여수밤바다를 봤고 여수밤바다를 들었다. 내가 여수에 가면 늘 가는 해양공원의 전망 좋은 카페가 있는데 마음씨 좋은 사장님은 우리가 해양공원을 떠날 때까지 그 곡을 반복해서 틀어주셨다. 겨울의 밤바다는 쓸쓸했지만 여수밤바다니까 괜찮았다.

끝나지 않은 청춘, 내일로

이것은 지난 겨울의 이야기. 올 겨울, 나는 또 한 번의 내일로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인생상담가와 음악치료사, 여행전문가 셋이서 떠나는 '청춘지게꾼 전국투어'. <델마와 루이스>에 이은 <세 얼간이>의 크랭크인. 나는 우리의 새로운 로드무비가 기대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1020 참여형 미디어 펀미디어에도 실렸습니다. http://cafe.naver.com/rumorxfile/860211
'레일러 박솔희의 여행칼럼'은 이번 회로 종료됩니다. 그동안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태그:#청춘지게꾼, #내일로, #청춘내일로, #델마와루이스, #여수밤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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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2011년 <청춘, 내일로>로 데뷔해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2021년 10월 아기 호두를 낳고 기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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